서양 르네상스에 대해

4장. 르네상스의 중요 예술가와 작품으로 보는 르네상스 이미지와 시각. (11)

홍진영HJY 2016. 2. 21. 09:29

본론10. 르네상스 미술의 위대한 거장-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를 르네상스시대를 소개하는 이 작가의 글처럼 몇 장으로 압축하여 슬쩍 넘기려 하는 것은 분명한 신과 다름없는 불세출의 예술 천재에 명백한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대의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칭하며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불러졌으니, 이는 잘못한 인간영역이 아니라, 분명 신성 모독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행위와 예술작품을 소개 할 영역은 아마도 르네상스의 (예술)역사에서 따로 끄어내, 독립적인 전문 연구서로 다투어야만 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전체 역사와 예술을 다투는 이 글 특성상, 역시나 그의 뛰어난 능력을 표현하고,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위상은 르네상스 3대 미술요소는 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 났으, 그로 인해 르네상스의 핵심요소를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현재 이 시점까지도 고전이라는 시대의 영역이 (미술사에 있어) 성립되고 파악이 가능했다. 또한 300여정도인 시편을 제작할 정도로 그는 문장가 기질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인생사만큼이나, 위대하고 최고의 걸작인 예술 작품이 그의 손에서 탄생하게 만든다. 만든다는 인간의 영역이니, “자연에서 창조한다,“ 혹은 나타나 보인다,“는 뜻이 어울릴 것이다. 아무튼 르네상스 미술의 3대 영역 회화, 조각, 건축이 그의 손안에서 최고의 결정을 발휘했음에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대리석으로 세계적인 조각인 다비드와 세계적인 명화인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 천장화를 그의 손에서 탄생시켰다. 또한 인간의 역사에서 최고의 건축이라 부르는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곳곳에 그의 손길이 남아있다.

 

최초로 세계적인(유럽안의) 미술가들의 생애를 한권으로 정리한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예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로 인해, 예술은 정점에 도달하였으며,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천재성을 강조하고자, 우상화 및 미화된 사실의 표현마저 넣었지만, 정작 그의 책을 읽은 미켈란젤로는 기분 나빠했다고 알려 진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제자이었던 아스카니오 콘디비(Ascanio Condivi)에게 자신의 생애를 상세히 구술하여, 1553년에 책으로 출간하게 되는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쓰도록 했다. 이를 참고한 비사리는 예술가 열전2판을 다시 내면서, 그의 인생에 대한 것을 수정하게 되었다.

자서전의 성격이 짙게 표현한 콘디비의 1553년판 전기와 바사리의예술가 열전2판의 내용은 미켈란젤로의 생애를 추적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된다.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유명해진 이유는 그의 예술과 생애에 대한 기록이 당시나 그 이전의 예술가 보다 풍부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이처럼 훌륭한 전기가 2편이나 있는 최초의 예술가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본명은 미켈란젤로 디 루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o di Ludovico Buonarroti Simoni)로 조금 긴데, 이를 줄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로 부른다. 다른 예술가들이 예칭이나 이름만 짧게 부른 반면, 미켈란젤로는 항상 자기이름을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르티.” 라고 표기했으며, 그것을 벗어나고 있는 어떠한 명칭도 그는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주장대로 귀족 출신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그의 어릴 적 생애는 소박한 (가난한) 집안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부친 로도비코 부오나르티는 아레초 인근 카르레세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종의 시장노릇을 하던 인물로 기록이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둘째아들로 14753월에 태어났다 생후 한 달 쯤 온 가족이 피렌체 산타 크로체인근으로 이주하였으나, 아기 미켈란젤로는 인근 마을인 세티나뇨의 채석장이 있는 산골 마을에 있는 유모에게 맡겨 길러졌다고 알러 진다. 미켈란젤로 모친은 그의 나이 61461년 무렵에 사망했는데, 그는 어릴적 어머니 모습을 흐릿하게 슬픔이 있는 분위기로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여성의 모습 대다수가 언제나 관람자나 작품속의 다른 주인공과 마주하지 않으며. 그의 작품 장면에서 보이듯, 냉혹한 모습으로 보일 정도로 늘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이런 것은 친모와 애정을 나누지 못했던 미켈란젤로가 망각속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타난 것 일지도 모른다,

 

1487년 그의 나이 13세 무렵에 피렌체로 돌아와, 도메니코 기틀란다요의 작업장(화실)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14884월 무렵이다.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기틀란다요의 작업장(화실)에서 2년간의 수련을 받았지만, 이때 스승인 기틀란다요에게서 배운 것이 별로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으나, 이 말은 아마도 자신의 천재적 영감과 실력은 다른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타고난 재능 그리고 그에 따르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지 결코 스승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얕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기틀란다요 작업장(화실)에 들어온 무렵에 기틀란다요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중앙 제단 프레스코화를 제작하고 있었고, 당시 어린 소년인 미켈란젤로에게 이때 프레스코기법 및 이에 따른 어려준비작업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고, 이런 부분은 장차 바티칸의 시스티나예배당 프레스코천장화 작업에 쓰일 영양분이 되어 주기에 충분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했다. 특히 조토와 미사초의 작품을 연구하여,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틀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특히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삼위일체와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안에 있는 브랑카치 채플의 마사초의 작품을 보면서 마사초의 기법과 그의 작품 안에 있는 르네상스 정신의 핵심요소를 파악하게 된다. , 인간의 내면세계를 형성화하는데, 예술적 관심을 두었다. 브랑카치 채플의 낙원에서의 추방아담과 이브의 처절한 모습에서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던 마사초의 대담한 감정의 표현이 후에 나올 미켈란젤로의 작품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알만하다.

이때 그린 그의 드로잉(지금도 드로잉 일부가 남아 있다.) 은 대부분 마사초의 작품에서 모사 된 것인데. 인간의 내면에 세계를 드러내고 있고, 또한 그림을 조각처럼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몸, 근육에 대한 중분한 이해를 한 것이 틀림없다,

 

이에 그의 뛰어난 실력을 파악한 스승 기틀란다요는 미켈란젤로를 조각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로랜초 데 메디치가 세운 일종의 미술대학인 산마르코 수도원 정원의 (조각가)수련장에 들어가 게 해준 것도 아마도 기틀란다요의 수련 방침일 것이다, 아무튼 산마르코 수도원 정원의 (조각가)수련장에서 1489년부터 1490년까지 약 2년간 이 곳에서 조각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던 미켈란젤로는 1490년무렵에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위대한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양아들로 메디치가()에 들어갔다. 콘다비의 전기에 그들의 첫 만남과 과정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적어있는데, 실상은 로렌초가 어려 미술가와 학자들 사이에서 소문난 어린 미켈란젤로를 실험해보고자 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미켈란젤로가 성장배경이 메디치가()에 들어가면서 강력한 후원자를 만나게 되며, 어려가지로 그의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우선적으로 로렌초 저택에 기거하면서, 신 플라톤 철학에 노출된다. 저택에 있던 이러한 사상을 담긴 작품을 감상하게 되고, 그와 메디치가()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자로 가정교사이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 플라톤 철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인문학자이거나, 그러한 사상을 연구하던 ()학자들이었다, 플라톤의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비롯해 당시 피렌체 대학의 명교수인 플리치아노, 모든 사상을 통합하고자 하였던 피고 델라 마란돌라가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후일에 지도자로 양성 목표로 할 로렌초의 교육은 심히 수준이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지냈던 메디치가()의 자녀들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친밀성을 갖게 되어, 후일에 다른 신분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바, 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등 그의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특히 둘째 아들 조반니와 파치가의 음모로 암살당한 줄리아노 사생아인 줄리오는 나중에 교황자리까지 올라가 각자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가 된다. 이들은 미켈란젤로에게 어려 작품들과 건축을 의뢰한다.(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언급될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대리석 부조 계단의 성모1491-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아직 미켈란젤로가 10대 중반 무렵 때 일이다. 계단의 성모산마르코 수도원 정원의 (조각가)수련장의 책임자/관리자였던 베르톨로 디 조반니를 통하여 전수된 도나텔로의 조각/부조의 간접적인 영향력이 들어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도나텔로는 1422년에 꽃의 성모를 통해 이와 흡사한 저부조 형식을 선보였다.

 

계단의 성모를 통해 그의 천부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마치 그림을 새긴 듯한,느낌를 주는 대리석 돌 판에 두께가 얇고 회화적 원근법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실험적이지만,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다. 56cm의 대리석에 성모를 가득 차게 구성했으며, 이런 점은 그의 조각(부조)에서 특허와도 같은 요소가 된다. 성모는 다섯 개의 계단 옆으로 정방형 토대 위에 앉아 있고, 우미한 옷자락이 주름진 채 아름답게 돌 위로 흘러내린다. 성모의 옆모습은 가장 이상화된 고전적인 모습으로, 둥근 후광 안에 있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천의 주름이 코의 선과 평행을 이뤄 후광을 좀 더 강조해준다. 또한 주름진 옷은 작은 폭포처럼 어께를 시작으로 팔을 감아 내려가, 다리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 가장자리 프레임에 살짝 닿는다. 계단 위의 아이들(요한과 천사)은 관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보이게 함으로써, 원근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성모의 젖가슴속안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약간 떨어뜨린 아기(예수)의 도톰한 손이 옷 주름위에 올려 있다. 성모의 오른발이 왼쪽 다리 안으로 비스듬히 빠져나와 있는데, 이는 미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한 미켈란젤로가 의도적으로 구성했음을 알게 해준다.

 

헤라클레스처럼 몸을 뒤틀고 있는 아기예수의 특이한 자세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다섯 계단에서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계층이론이 발견된다. 당시에 플라톤의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인간을 다섯 계단으로 나누었고, 최고의 단계를 넘어서면 신과 합일을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교육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이러한 사상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이 작품의 그림에서 이를 표현하고자 했다.

같은 의미에서 이 작품의 그림에서 주인공인 성모 마리아(Maria)의 다섯 철자와 다섯 계단사이의 유사성을 통하여 신플라톤주의와 카발라 신비사상의 혼적을 추적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비교적 같은 시기에 제작했으나, 후원자 로렌초의 사망으로 작업이 중단하여 미완성작으로 남아있는 대리석 부조 작품켄타우로스의 싸움 1491-2년경추정은 작품의 주제는 명확하기 않으나, 왠지 그리스 신화 풍의 그림 조각 같다. 콘다비는 이 작품 주제를 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헤라클로스의 아내인 데이아네이라의 겁탈 장면이라고 소개 한 반면, 비사리는 헤라클레스와 켄타우로스의 싸움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그의 초기작품인켄타우로스의 싸움주제가 어찌되든 표현을 중앙에 있는 대장격으로 보이는 인물 주위로 여러 형태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옷을 벗은 알몸형태의 병사(인물)들의 회전운동의 리듬을 만들어 내며 얽히고설킨 격전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였다. 이전 작품계단의 성모보다 인물들의 움직임이나 표정에서 더 도드라짐이 많고, 일부에서는 격한 표정을 나타나기도 한다.

초기작품계단의 성모,켄타우로스의 싸움은 아직 나이가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가 로렌초 저택에 기거하면서, 신플라톤주의에 속한 작품을 보고, 또한 교육과 직접/간접적인 만남 등을 통하여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과 (이념적인)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계단의 성모는 가톨릭 종교적 주제를, 켄타우로스의 싸움은 그리스신화의 내용을 다투고 있다는 점에서, ()과 속()의 묘한 조화(?)가 느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초기 두 작품인 계단의 성모, 켄타우로스의 싸움은 미켈란젤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카사 부오나로티(Casa Buonarroti) 에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 도심 동쪽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약 5분 거리 내에 있는 이 저택은 당시 미켈란젤로가 매입은 했으나, 실제 그가 거주하지는 않았다. 후대에 미켈란젤로의 조카가 거주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카사 부오나로티를 지켜오다가, 1850년대 경부터 현재 이르기에, 미켈란젤로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492년 후원자인 로렌초의 죽음으로 미켈란젤로는 다시 부친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혼자서 미술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때 조각을 하기 위해 인체의 시신을 해부하도록 하는 수련도 이때 일이다. 조각가는 신체를 아름답고, 정확하게 조각을 하기위해, 뼈와 근육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피렌체 도심에서 서남부방향으로 좀 멀리 떨어져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인 산토 스피리토의 수도원장 니콜로 디 조반니 비치엘리니 (Niccoio di Giovanni Bicchiellini)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그는 인근 병원의 행려병자의 죽은 시신을 가져다, 미켈란젤로에게 인체를 해부하도록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 후, 수도원장 니콜로의 이러한 특별한 배려에 감사를 표하고자, 산토 스리스토 수도원에 목제로 조각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제작, 선물했다. 이 작품은 수세기 동안 사라졌다가, 1962년에 발견되어, 피렌체의 카사 부오나로티(미켈란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좌우/ 상하 크기는 약 135로 크지 않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몸에서 나온 인체의 정확한 황금의 비율에서 그의 인체 해부의 공부에 대한 노력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15C 마지막인 약 10년 동안 피렌체에 닥친 정치적인 혼란은 10대 후반-20대초의 미켈란젤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데, 이때 피렌체 정치적인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로렌초 사후 일단 메디치계승자인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권력을 넘어갔는데, 후계자 피에로는 예술 보는 시각이 부족해. 코사모와 로렌초 시절에 이어지던 피렌체의 미술의 삼미안(三美眼)이 쇠퇴의 길을 걸었던 것은 정치가로 삶의 한계라 그렇다고 차더라도 정치장악력과 의지, 그리고 결단력이 부족한 것은 개인의 능력한계치를 보아, 그동안 메디치가의 교육방침보다는 (로렌초가) 후계자를 세우는 과정에 있어 잘못된 선택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보나콜라의 정치적 선동을 어느 정도 얼마든지 그의 중심으로 길로 이끌 수 있었고, 개혁으로 이끌고 가던지, 또는 과감한 선택으로 그의 입을 막고, 단결력을 과시하는 모양새라도 보여야 하는 마당에 그의 무능한 정치력은 1494년 프랑스군의 피렌체 공격 시에 한번 싸움도 해보지 못한 체, 그의 메디치가문을 몰락으로 몰고 간다.

아무튼 시보나콜라는 당시 성직매매와 같은 로마 교황청의 타락과 허영심과 사치 등 피렌체의 내부적 문제점을 신날하고도 격정적인 설교의 종교적 언어로 공격하며, 피렌체는 하느님 심판의 날이 다가올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연설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이유로 방탕과 사치를 일삼는 지도층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여, 민중들의 감정을 격정 시키는데도 성공했다.

1494년 시보나콜라의 예언이 우연히 들어맞는데, 프랑스 대병력이 피렌체를 공격함으로 써 그의 위상은 이제 거의 신적인 위치로 격상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아무런 대책을 내 놓치 못한 피에로는 그들의 추종자들과 함께 도망쳤으며, 또한 그의 메디치는 피렌체에서 두 번째로 추방되었다.

 

결국 시보나롤라는 메디치가 축출된 피렌체룰 통치하게 되었고. 이를 급진적인 신정통치체계로 통치하였다 시보나콜라의 격정적인 연설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 놓게 된다. 피렌체의 철학자들은 신플라톤주의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을 버렸고, 그리스 철학과 신화 내용을 그리는 보티첼리 비롯한 회가들은 다시는 그와 같은 주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피렌체를 떠나야만 하겠다, 이와 같은 시보나콜라의 신정정치의 급진적인 성향을 잘 나타나주는 대표적인 예는 그의 집권이 성공한 후에 치러지는 카니발 축제 때 허영의 화형식을 거행하는 문화파괴 현상이었다. 이는 마치 현대 중국의 문화혁명기나 지금의 극단적인 이슬람주의(그 예로 I.S) 문화권에서 자행되고 있는 (과거)문화 파괴 현상과 거의 일치하다. 그들의 입지에서 사치스럽고, 불경한 내용을 담고 있는회화작품, , 서적 등을 불태우는 일이다, 이듬해 카나발 축제 때는 더 큰 규모로 자행되었다.

 

미켈란젤로도 집권전의 시보나롤라 연설, 특히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서 설교를 듣고 깊이 감명 받았다고 한다, 그는 수십년이 지난 후에 지금도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던 시보나콜라의 음성이 내 가슴에 메아리친다.”고 고백 할 정도로 그는 시보나롤라 연설을 인상 깊게 듣고 있었다. 이는 그의 후기의 대표작최후의 심판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의 가톨릭에 대한 사상에서 시보나콜라의 영향력을 짐작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대규모 프랑스침공이 있었고, 사보나콜라의 신정정치가 시작하던 1494년도에 피렌체를 빠져 나와, 볼로냐를 거쳐 베네치아로 향한다. 무엇보다 그의 신분이 메디치식솔로 있었던 전력 때문에, 그의 신변이 안전 보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는 그의 예술이 통하지 않았다. 망명객으로 온 그에게 베네치아의 엄격한 길드제도의 통제 때문에 진입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시 대학의 도시인 볼로냐로 떠나 거기서 1년 정도 머물렀다. 이 때, 미켈란젤로는 대학의 교수나 인문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단테나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 당대의 최고 작품을 읽고 토론하기도 하였고, 소네트를 포함한 문학창작활동도 하였다. 이런 것은 이 시기에 조각이나 미술작품의 주문이 많지 않아서 문학창작활동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볼로냐 정착시기 무렵 제작된 그의 작품은 알도브란디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성 페트로니우스, 성 프로쿨루스, 빛을 나르는 천사등이 있다.

1495년도 11월에 피렌체로 다시 돌아와 이듬해 6월 무렵 로마로 갈 때까지 머물려 있었는데, 피렌체로 다시 불려 들인 사람인 로렌초데 메디치의 친척인 로렌초디 피에로 프란체스코로 메디치추방이후 함께 피렌체를 떠났다가, 시보나콜라의 지지자로 변모하여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인물이었으며, 시보나콜라의 설교에 감명 받아, 이름을 평민이라는 뜻의 지닌 포폴라노로 바꾸었다. 14966월 무렵에 그는 피렌체 제 1기시기를 마감하고, 갑자기 로마로 떠났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제작한 작은 대리석 조각상인 잠든 규피드때문이다. 이 작품은 현재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윤곽을 알 수 없지만, 그리스 신화 주인공인 부속 조각으로 당시 피렌체에서는 부각되지 못한 작품이다. 아마, 시대적으로 시보나콜라의 종교적 성향으로 이단 취급을 받는 물품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후원자인 로렌초 포폴라노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해당 되는 이 조각품을 그리스 로마 고대의 조각품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는 로마에서 판매하는 것이 좋겠다며 조언하였다, 로마에 판매 거래과정에서 미술품 중간 거래상인 발다사레 델 말라네세(Baldassarra del Milanese)는 이 작품을 고대 골동품이라고 속이고, 교황 식스투스4세의 조카인 라파엘레 리아리오 Raffaele Riario(1460~1521)추기경에게 거액을 받고 판매되었다. 200듀카트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잠든 큐비드를 구매한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작품이 고대 골동품이 아니라, 피렌체의 젊은 조각가의 작품임을 알게 되어, 그는 수하에 있던 은행가 야고포 갈리(Jacopo Galli)에게 하여금 중간거래상으로부터 작품 대금을 회수하도록 하고, 피렌체를 사람을 보내 그 작품을 조각한 사람을 로마로 데려 올 것을 지시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싼값으로 넘긴 이 작품이 로마의 주기경에게 비싼 값에 팔렸음을 알게 된 사실에 격분하였고 ,로마에 가 가당치도 않은 가격을 팔린 이 작품을 회수하고 싶었다. 로마로 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가 살아 있을 때 써준 소개장을 추기경 라파엘레 리아리오에게 주며 자신을 소개했다, 추기경 라파엘레 리아리오는 당시 교황청의 부고문vice-chancellor of the Curia으로 교황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으며 재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새로운 후원자로 자청했다.

 

이리하여 로마에서 뜻밖에 후원자를 얻게 되고. 또한 그는 천재조각가라 불리는 명성을 얻는 작품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 작품들이 에로스 Eros,바쿠스 Bacchus이었다. 에로스는 현존하지 않고 바쿠스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갈리의 정원에 로마 고대 조각과 유물들과 함께 장식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지난 8년 동안 대여섯 점밖에 제작하지 않았고 그것들 모두 부조 형식들과 작은 것들이었으므로 바쿠스는 조각다운 작품으로는 최초로 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20살을 조금 넘긴 그에게는 패기와 더불어 대리석을 다룰 수 있는 기술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의 작품 바쿠스 크기는, 높이 184cm. 받침대를 포함하면 203cm.로 당시 실재 사람의 몸집보다 크게 조각했다. 그리스 신화의 술과 풍요의 신 디오니소스를 묘사한 작품에서 술 마시고 있으며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모습을 한 바쿠스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중성처럼 보이며, 현재 이 조각의 모습은 성기가 잘려나갔는지, 일부러 생략했는지 성기가 없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아마 후대의 교황청의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으로 하는 성기제거령에 따른 것이 아닌가 싶다.

미켈란젤로는 술 취한 바쿠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위해, 바쿠스의 머리에 포도송이를 감아서 마치 포도가 거기에서 자라는 것처럼 묘사했으며, 바쿠스는 너무 마신 포도주의 기운으로 눈에 초점이 잃어버리고, 입은 반쯤 벌린 모양새로 조각 했다.

조각상 바쿠스가 든 술잔과 대각선으로 연결되는, 바쿠스 조각상 밑에는 반인반수이자 호색가로 염소의 발을 한 사티로스가 주인의 포도를 훔쳐 먹고 있다. 술잔과 사티로스의 조각상은 이 작품의 전체조각상에서 작품의 균형을 잡아주는 상호 보완자의 역할을 한다. 선의 부드러움과 대리석 거친 표면의 굳셈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바쿠스22살의 미켈란젤로에게는 야심을 갖고 제작한 작품으로 대리석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함을 시위하기에 충분했다. 고대의 영웅화하고 이상화하는 형식을 살려낸 당대의 감각으로 보면 새로운 영감에 의한 고전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후대에 의해 피렌체의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수집가로 명성이 높았던 은행가 야고포 갈리와의 친분은 미켈란젤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로마에 있던 갈리의 정원은 고대 예술품의 진열장이라 불리고 있을 만큼, 다양한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전시장으로 유명했다. 당시 20대 초반 무렵인 젊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앞으로 조각을 만들 때, 그것을 참고로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과 지원의 바탕으로 로마에서, 장 드 빌레르 추기경의 장례 미사 기념비로 산디오니시오 추기경과 계약으로 만들어진 20대 중반에 접어든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피에타의 조각으로 15C가 끝나는 시점인 1499년에 완성하였으니, 이 작품으로 인하여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원래 피에타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은 중세에 북방(독일지역이나 이 이북의 예술)에서 유래한 것인데, 가톨릭의 여러 의미를 나타나기에 적합하여 10C경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나, 14세기 초반 특히 독일 미술에서 발전하여 북유럽지방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조각상이 제작될 당시만 해도 이런 주제를 가진 예술작품들은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지역이나, 프랑스에서 유행을 했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표현은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매우 독창적이다. 미켈란젤로가 완성한피에타의 조각예술의 관점은 여성의 무릎위에 성인남성이 누워 있는 어색한 형태를 거대한 하나의 단독 군상으로써 표현, 조각한 것이다. 그는 현명하게 예수와 성모상의 자세를 조정하였다. 또한 성모의 손동작이 하여금 슬픔을 표현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나게 하였다, 동시에 크기의 불균형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두 인물상을 연결시켰다. 군상은 마무리가 매우 완벽하여 이 작품에서 부드러운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의 피라미드식 구도와 이러한 상세한 인물묘사를 통해, 장엄함과 고통, 위대한 순종 등을 동시에 나타나기에 충분하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성숙하고 위엄이 있는 이 작품에는 힘(성모)과 파토스(예수 그리스도), 고귀함과 부드러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인식과 이를 상쇄하는 인간의 인내가 서로간 결합되어 있는 바, 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여러 감정을 느끼게 한다. 또한 어떻게 보면 종교적 작품으로는 경외, 감사, 슬픔, 기도를 불러일으키는 이상적인 작품이고, 조각의 미적요소로 보아서, 육체와 그 육체를 감싼 옷감의 표현이 그 당시로 써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놀라운 작품인지라, 완성품을 당시에 첨으로 접하였을 때는 지식층과 일반층, 모두에게 경외와 놀라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피에타의 예술작품에서 보는 또 하나의 예술에 대한 美的(미적)인 관점은 성모의 (슬픈)미소에 있다. 가톨릭의 입지에서 피에타를 주제로 그린 작품이거나 조각품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막 내린 죽은 예수그리스도를 부여안거나, 무릎 또는 바닥에 누운 자세를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고, 오열하며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다수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덤덤한 표정으로 이런 것을 반기고 있는 듯 한 옅은 미소를 짓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성모의 얼굴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반쪽 얼굴은 분명히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데 반면, 한쪽은 환희를 느끼고 있는 듯, 미소 짓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는 피에타라는 주제에 미켈란젤로의 표현하는 양식에 대한 기발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 , 슬픈 표정을 한 한쪽은 지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듯이 자식의 죽음을 슬픔과 고통을 반영하고 있는데 반면,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다른 한쪽 모습은 (하나님)의 뜻대로 나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대한 미소라 할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는 성령의 이름으로 낳은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낳고. 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세상에 널리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자기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모든 세상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모마리아의 임무를 다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구상의 착안을 어릴 적에 죽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며, 그리 많은 정을 주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를 상상하면서 모정의 그리움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켈란젤로 작품피에타의 성모얼굴 표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 주제를 담긴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과는 달리 냉담한 표정을 기본적으로 담고 있다고 본다. 또한 미켈란젤로의 많은 성모관련 작품들은 성모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멀리 바라보는 듯, 한 느낌을 받거나, 냉철한 표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 발견된다고 한다.

 

완성직후 그 시대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이것을 조각한 조각가가 누굴까 하며 궁금해 하자,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중앙에 위치한 띠의 주름에 피렌체사람 미켈란젤로라 새겨 넣었으나 곧 이름을 새겨 넣은 일을 후회한다. 이리하여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이름을 새겨 넣은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예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나타난 형태는 후대에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에 도입되었으며 계속해서 스페인, 플랑드르, 프랑스 등 어려나라로 퍼져나갔다. 미술 주제로서 피에타는 프랑스에서 가장 섬세하고 마음을 꿰뚫는 표현을 보여주며, 스페인에서는 가장 심오한 감정표현으로 나타났다. 대체로 종교미술은 17세기 이후 쇠퇴했으나, 피에타의 형식은 그 특별한 감정적 호소력으로 인해 19세기까지 생생한 주제로 계속 다루어진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장 드 빌레르 추기경의 장례 미사 기념비로 제작되었지만, 18세기에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입구 오른쪽에 있는 경당으로 위치가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1972년 이곳에 들어온 정신병에 걸린 예술가가, 망치로 피에타상을 훼손시킨 사건이 벌어져, 복원 후, 방탄유리로 덮게 씌어졌다.

 

바쿠스,피에타로 미켈란젤로는 예술성을 인정받게 될 무렵, 피렌체에서는 점점 광신적으로 변해가던 사보나콜라가 화형으로 생을 마감하고, 공화국 형태인 연립정권이 자리하였다, 새로운 도시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피렌체 내부에서는 기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도시 르네상스의 피렌체로 돌아갔으며, 이에 피렌체를 떠났던 많은 예술가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에, 미켈란젤로는 15015월경에 돌아왔으며, 또 하나 르네상스 3대 거장인 라파엘로는 1504년에 피렌체에 입성한다. 이로써 르네상스의 최고 예술가들이 피렌체의 도시라는 한 곳에 모인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렌체 제 2기는 돌아온 15015월경부터 로마교황청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영묘작업의 주문하고, 이 과정에서 1508년 무렵 바티칸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경당의 천정화를 시작하게 되는 과정의 전에 있던 1506년경까지다,

15015월경에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오자, 당시 피에트로 소데리니가 이끈 피렌체 공화국연립형태정부는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 하나를 그에게 맡기고 협상하였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정부로부터 (완성 시까지 조각하는 기간에) 매달 금화 6플로린을 받는 월급형태로 지급을 받기로 하고, 1501년부터 조각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미켈란젤로 최고의 조각 작품인다비드(다윗)이다. 이 작품은 1504년경에 완성되어 약간 긴 기간의 논의 끝에 시뇨리라 광장에 접한 베키오 궁전 앞에 있는 광장에 1875년까지 전시되었다, 그 후, 미술품의 보존과 복원작업 필요성에 의해 1873년부터 옮겨지기 시작한 다비드와 그 베키오 궁전 앞에 전시되었던 조각상들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광장에는 모조품이 자리하고 있다.

미켈란젤로 최고의 조각 작품인다비드를 탄생시킨 대리석원석은 그 주인을 만날 오랜 기간을 견디어 내었는데, 완벽하게 흠이 없고, 다른 색깔이 전혀 섞이지 않는 이 흰 대리석의 가치를 알아본 피렌체인들에 의해 두오모의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많은 조각예술품이 흰색 대리석을 이용하여 사용되었음으로 당시 예술시대를 지향하는 예술가나 조각가들은 이 대리석을 탐내곤 하였으나, 실패의 두려움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한 때, 이 대리석원석은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Agostino di Duccio. 1418 ~ 1481), 안토리오 로셀리노(Antonio Rossellino 1427, ~ 1479)등에 의해 작품을 구상된 바 있고, 또한 실행하고자 대면했지만, 실패의 두려움으로 모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 대리석원석은 조각으로 불가능하면 산타마리아 델 파오레 델 성당의 버팀벽으로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다행히 미켈란젤로를 만나,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탄생되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정부와의 계약하기 이전에 밀랍으로 만든 작은 모형을 만들어 조각의 구도를 보임으로써 그가 작품의 적임자라는 것을 어필한 바 있다. 여기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경쟁 구도를 의식한 바도 있을 것이다. 피렌체정부는 회화를 우선시 하는 예술의 가치를 가진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조각을 회화의 예술가치의 동일선, 또는 약간 우의에서 생각하는 미켈란젤로의 열정에 우선 가치를 두었고,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에 대한 결과는 대성공으로 인류의 최고의 조각품이자, 최고의 걸작인 예술품이 나올 수 있었다.

이에 다비드를 만들 조각대리석상을 얻은 미켈란젤로의 승리감이 얼마나 컸는지는 다비드 스케치에 적힌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윗은 돌팔매로 나는 활로 -미켈란젤로-”.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영웅적 승리를 가져다주었듯이, 미켈란젤로는 이 다비드상으로 인해 당시 르네상스를 지배할 거장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문구이다. 그는 이 숭고한 걸작을 4년 후인 1504년경에 완성했다.

 

미켈란젤로의다비드는 작품의 내용상으로 골리앗과 대결을 앞두고 준비하는 다윗을 모습으로 마치 (골리앗의 모욕적인 말을 들은 듯) 크게 분노하며 전장으로 떠나 싸울 태세를 갗추고 있는 다윗을 모습을 그리고 있는 가톨릭의 주 내용을 상징한다. 그러나 표면상 보여주는 미적요소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공감하고 있는데, 다비드 신체의 긴장된 핏줄과 근육의 묘사로 보아, 골리앗을 공격하기 직전의 긴장상태를 포착하고, 벌거벗은 남성(인체)의 나체에 대한 미를 잘 보이는 고대 그리스의 건강한 신체미가 미적요소의 이상으로 기독교적 맥락에서 재해석되어 나타나는 신플라톤주의 이상향을 나타나는 바다.

 

이 조각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 높이 5.17m 거대한 다비드상은 호리호리한 몸집의 모습을 가진 특징은 성인 남성의 인체의 비율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실제 인체비율보다 크게 나타난 손과 머리의 비율대비에서 보듯. 인체보다 높은 또한 멀리 바라보는 광장의 위치한 곳에 세울 착안된 원근법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호리호리한 모습은 작품의 주제 성격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여기서 보이는 다윗의 모습은 호리한 몸집을 가진 소년 연령기이기에 그러하다,

 

또한 주름에 깊게 벤 이마와 얼굴 표정과 몸으로 말해주는 긴장한 표정은 고대 미술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 높은 묘사는 미켈란젤로만의 극적상황에 대한 표현수준이 상당하였음을 말해 준다. 몸의 전체, 특히 '토르소'의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고. 노기 띤 얼굴은 무섭게 긴장되어 있다. 그의 양미간은 찌푸려지고 눈은 충혈 되어 있으며, 코밑 언저리의 근육은 실룩거려 올라가고, 입술에는 흥분된 듯 피가 몰려 있다. 그의 몸 오른편은 힘줄이 튀어나온 긴 팔이 방어하고 있고, 크고 힘찬 손안에는 골리앗의 이마에 이내 날아갈 돌이 쥐어져 있다.

 

이전의 다비드상에서의 과감히 골리앗의 머리와 소년의 칼이 생략한 이 거대한 작품은 벌거벗은 남성의 힘을 두려움을 갖게 할 정도로 표현하였으며, 그 넘치는 에너지와 기술을 표하였다. 이를 본 동시대인들은 그 이전의 도나텔로와 베로키오의 다비드조각상은 이제 시시할 정도로 오직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열광하였음이다.

 

미켈란젤로의 동시대인들은 이 상을 가르쳐 일 기간테(li gigante = 거인)“이라고 했다. 이 조각품으로 인해 미켈란젤로 자신도 당시 이탈리아 미술계의 거인 혹은 거장이 되었다.

 

1504다비드의 조각상이 완성되자, 곧 위원회를 소집하여 피렌체내 어디다 세울 것인가 놓고. 위치선정을 위한 논의가 예술가 및 정치가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여기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필리피노 리피,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같은 당대의 예술 거장들도 총집결해서 논의하였다. 서로 간 주장이 엇갈린 오랜 논의 끝에 미켈란젤로의 의견을 받아들어져 시뇨리아 광장과 접한 베키오 궁전 앞에 전시하기로 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조각상은 새로운 인간상을 상징하는 조각으로 따로 전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베키오 궁전을 지키고 서서 우피치 미술관 쪽, 그러니까 아르노강이 피렌체시 중앙을 관통하고 흘러가는 방향으로 향해 미간을 찌푸린다. 다비드는 당시 피렌체 공화국, 즉 메디치를 축출하고, 외세(특히 프랑스)를 맞서고 있는 현실에서, 시민의 자유를 지켜내겠다는 공화국의 이념이 깃든 미켈란젤로와 당시 피렌체 인(정치지도자)의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조각상은 피렌체의 이 노천광장에 1875년까지 전시되었으나, 그 후 작품보존의 필요성에 의해 현재국립박물관인 피렌체의 갈레리아 델 아카데미아(Galleria dell Accademia)에 옮겨져 전시되어 있으며, 실물의 놓인 옛 자리에 실물과 똑같은 크기의 모조품이 세워져 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거대한 원본작품을 바라보자면, 5-7미터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높은 곳을 바라보는 양 낮은 상태로 하여 볼 것을 주문하는데, 원래 인체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또한 멀리 바라보는 광장의 위치한 곳에 세울 원근의 착안한 작품이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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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를 완성한 해인 1504년에 그는 곧바로 피렌체 정부로부터 베키오 궁전의 500인 대회의장 한쪽 벽면에 장식할 벽화 카시나의 전투제작 의뢰 받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1440년 발발한 앙가리아 전투의 전투 장면을 그리도록 하였고, 그 반대편면에 미켈란젤로에게 1364년에 피샤로부터 거둔 승리인 카사나 전투의 전투 장면을 그려 달라고 하였다. 당시 피렌체의 소데리니가 이끄는 공화국정부는 장기화되고 있던 피샤와의 전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빠진 상황이었다. 이 두 작품은 피샤와의 전쟁에 대한 항쟁의지를 위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긴 작품이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용병을 고용하여 파샤와의 전쟁이 10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과정에서 피렌체공화국의 제정문제와 의원들이 부담해야 될 세금이 엄청나게 늘자, 피렌체 시의원들은 당시 행정수반 피에로 소데리니와 마케아벨리가 이끄는 정부 주장대로 정규군 창설을 허용했다. 이런 입지에서 피렌체의 정규군이 (승리로 이끈) 전쟁의 중요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막상 해보니 오히려 패배했다. 행정수반 피에로 소데리니와 마케아벨리가 이끄는 정부는 이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들은 친분이 있던 미켈란젤로에게 정규군이 패배하게 된 경위를 시의원들에게 설명해줄 그림 작품을 주문하였는데, 이런 경로로 탄생하게 되는 이 작품이 카시나 전투이다.

 

지금은 사라진 채 없는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는 벽면에 그리기전의 스케치 그림들을 통해 전개 내용과 방향을 알 수 있다. 스케치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투장면이 아니라, 전투 직전의 준비과정이거나. 전투랑 상관없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다. 이 그림은 군인들이 뭏가에서 몸을 씻거나, 물가에 몸을 담기는 모습들을 그려져 있는데, 소데리니는 이 그림을 통하여 피샤와의 전쟁에서 정규군이 패배한 경위는 경험부족이 아니라.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가리아 전투와 미켈란젤로의카사나 전투는 알다시피 미완성작품으로써 지금은 시청사 벽면에 당시 그림의 혼적마저 없다. 레오나르도의 경우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6개월 후에.암굴의 성모의 완성하지 못하여 선금문제로 인한 것 때문에, 밀라노 법원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는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부름에 로마로 돌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만 두게 된다.

현재 시청사의 벽면 그림 중 레오나르도가 그렸던 한쪽면실의 그림은 후대에 레오나드로가 남긴 스케치와 노트 등에 남긴 그림들을 연구하여, 루벤스 등 후대 (바로크)미술가들에 의하여 완성된 작품이다. 반면 미켈란젤로가 그렸던 다른 반대쪽면, 현재 500인 대회의당 벽면의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조르조 비사리의 매너리즘 스타일의 작품들이 양쪽 벽면을 모두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 회의장안에는 다수의 조각품들이 있는데, 그 중 조각품의 하나가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승리라는 작품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제 2의 피렌체시기에 남긴 또 다른 중요작품은 당시 피렌체의 유력가문들 위해 제작된도니톤도,피터톤도등이 있다.

 

도니톤토는 주문자인 피렌체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놀로 도니(Agnolo Doni)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아놀로 도니와 그 아내 막달레나 스토로치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주문/ 제작한 이 작품의 그림자체는 마리아와 요셉, 아기예수를 그린 그림이기에 성가족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유일하게 템페라로 그린 이젤화로 원형으로 된 툰도속에 성가족의 생활을 묘사했다. 구도상으로 이전시대나 동시대의 다른 회가들 특히 레오나르도의 같은 주제인 성가족 그림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뚜렷하게 구별되고 있다. 무엇보다 뒤에 우뚝 솟은 성 요셉의 위치와 역할 상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히 대조된다. 전통적 구성에서는 요셉이 주변에 있는 인물상이라, 이런 중심적 위치와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바닥에 앉은 성모마리아가 중심이 되어 몸을 뒤로 젖히고, 이에 요셉이 받들고 있는 아기인 그리스도 예수를 안으려는 모습에서 주요 인물 세 사람이 보다 밀접한관계인 (가족)구성원이 성립되어 진다.

미켈란젤로는 이와 같은 군상의 구성체를 통하여 인체의 움직임, , 젖히거나, 굽히거나, 또는 기대는 포즈는 그의 조각 작품에서 즐기는 기본 포름의 경향으로, 마치 조각상 같은 그림을 그려냈다. 작품의 그림주제로 성가족인 채색된 대리석의 군상이 중앙에 자리하고, 주변엔 나신의 젊은 남성의 군상이 배경으로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 명암법등 다른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과장되게 밝은 색체를 이용하여 인물(성가족) 심리적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성가족의 밝은 색체의 옷과 대조되는 주변의 인물들의 나체의 모습은 모세의 십계 이전의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을 반영하는 가톨릭의 성경 내용을 근거로 한다. 미켈란젤로는 주변사람(남성)들의 모습을 마치 나체 전신 조각상에 나오는 어려 포즈의 군상처럼 그러넣는다,

현재 이 작품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피티톤도도 역시 미켈란젤로 피렌체 제 2기에 만든 작품으로써 주문자인 바르톨롬메오 피티 (Bartolommeo Pitti)이름을 땄다. 원형의 부조로 만든 이 작품은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미완성인 채 남아있는 작품이다, 아니 일부러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피티톤도는 미완성의 요소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그 요소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듯이 보인다. 이런 것은 왼쪽 성모가 앉은 뒤쪽을 평행으로 조각칼(그라디나라는 갈고리 모양의 끌) 자국을 낸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하면 표면은 거칠지만, 긁어낸 표면 사이의 일직선의 무늬가 생긴다. 이렇게 보아서 의도적으로 미완성의 요소를 작품의 미적 구성요소로 사용했음을 알게 해준다.

 

피티톤도의 작품은 앉아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세례 요한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며 경건함을 강조되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 원형의 대리석표면에 성모가 크게 부각되고, 요한은 성모의 오른쪽 어깨 뒤로 겨우 보일 정도로 작게 표현된다. 그러한 성모는 눈을 마주하지 않은 채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요한은 뒤에서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성모의 얼굴은 로마 바티칸에 있는피에타브뤼허 성모에서와 같이 사랑스럽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품처럼 등장하는 성모의 눈길은 아기예수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상태로 조각하였다. 아기 예수는 성모의 무릎 위에 펼쳐진 성서에 오른팔을 얹고, 머리를 살며시 기대며 미소 짓는다. 이렇게 보면 부조의 깊이는 얕지만. 성모의 표정과 행동을 보아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신비스런 성모의 삼차원적 모습은 더욱 두드러진다.

현재 이 작품은 피렌체의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시하고 있다.

1505년 후반기쯤 미켈란젤로는 로마 교황청의 강력한 부름에 로마로 돌아갔다. 그 당시 교황은 율리우스 2세로 후대에 르네상스 교황이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대내/외적으로 매우 많은 일을 처리하였으며, 예술분야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쏟은 교황이었다.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중부유럽의) 가톨릭교 세계의 대왕에 상응하는 자기 자신의 영묘를 세우는 계획을 실현하려고 말했고, 미켈란젤로는 그의 강력한 입지에서 감흥을 받아, 직접 카라라에 있는 대리석 채석장으로 가 영묘를 세우고, 장식할 대리석 석재들을 선별하였는데, 반년 가까운 기간을 보냈으니, 미켈란젤로에게 영묘를 세우는 대리석의 형상조각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겠다. 직접 선별한 대리석 석재를 가지고, 로마로 돌아와 작업을 착수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작업을 시작한 얼마 되지 않는 시점에서 이 사업에 대한 교황의 관심과 열정이 상당히 식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오늘날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교황의 태도가 달라진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영묘를 세우는 계획과 또 다른 귀중한 다른 계획인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려는 계획 사이에 서로간 충돌하였기에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의 영묘는 원래 엣 성당의 건물에 안치할 계획이었으나, 그것을 헐고 나면 그의 영묘는 어디다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영묘 작업에 매진했던 미켈란젤로로써는 교황청 결정에 대한 실망과 로마에 거주하는 예술가 집단에서 자신의 실력에 시기하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견디지 못하고, 로마를 갑자기 떠나 피렌체로 갔다. 그는 편지를 보내 나를 필요로 한다면 교황이 직접 찾아오라고 무례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교황()의 태도이다. 이러한 내막을 알게 된 교황()은 화를 낸 것이 아니라, 피렌체 시장에 사람을 보내 시장에게 정식으로 계약을 추진할 것을 내비치고 있다. , 미켈란젤로에게 로마로 돌아 올 것을 정중하게 설득하는 계약협정이었다, 피렌체 시-로마교황청이 이 사건과 관련해서 미켈란젤로의 거취나 계획이 국가들의 미묘한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사실에서 일치를 보이는 것과 같다. 은신처를 마련해 준 피렌체(시민) 입지에서는 교황의 노여움에 파문장과 같은 어떤 정치적인 행동이나, 군사 행동으로 이어지기 않을까 불안을 떨고 있었다.

피렌체 시장은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율리우스2세에게 돌아가 봉사할 것을 설득하며, 추천장을 써 주면서 로마로 돌아간다면 그에게 전 세계에 비교할 만 한 없을 정도로 작품을 낼 엄청난 기회를 제공할 것을 외교 문서를 들면서 진실을 약속하였다.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돌아오자, 교황청은 그에게 다른 주문을 맡겼다. 전임교황인 식스투스 4세때 지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예배당의 양측벽면 벽화는 보티첼리. 기톨란다요와 같은 그의 선배격인 전시대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으로 되어 있으냐 천장만큼은 비워 둔 채로 그대로 있어, 교황은 그에게 이런 천장벽면에 그림을 그려 달라는 제안 한 것이다. 프레스코을 작업해 본적이 없는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교황의 완강한 간청으로 인해 할 수 없이 작업을 시작했다. 12사도를 그려 넣는 간단한 설계에 착수하고, 피렌체에서 때론 그림을 그리는 것을 도와줄 조수를 고용했으나, 그는 갑자기 예배당안에 혼자 틀어박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채 그의 머릿속의 세계에서 깜짝 놀랄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과정에서 어려번의 짧은 휴식기와 한번의 긴 휴식기를 걸친 전장 4년의 기간 동안 혼자서 외로운 작업을 했던 그는 이 작업을 끝내 완성하였다. 그는 종일 천장을 바라보면서 작업하느라, 목뼈가 변형이 오고, 눈이 흐려지는 신체적인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 전체를 미켈란젤로가 혼자 작업할 수 있는 정도로 보는 것은 아마도 천장화 전체 그림의 양을 봐서도 무리가 있다. 미켈란젤로에게 고용된 조수와 함께 그의 아틀리에를 꾸려 함께 그린 것으로 보고 있으며, 직접 혼자 그린 것은 전제구성과 주요인물의 세밀 묘사에 집중한 것을 보는 시각이 옳다.

사실 1510년 후반기경에 천장화 대부분(천장화의 앞에 있는 부분과 약간의 뒷부분의 채색과 일부의 세밀 묘사만 남기고)이 완성되었으나, 당시 교황이 불로냐에 체류하면서, 제대로 자금지원을 하지 않아, 장기간 중단되었다, 이렇게 한 번의 긴 휴식기를 갖게 된 이유는 미켈란젤로의 개인 건강문제 등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보다는 제정(자금)의 문제로 안다. 작업의 중단된 시기인 1511815일에 공식 제막식이 거행되었고, 최종 제막식은 15121031일에 있었다.

시스티나 예배당 안으로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주는 인상부터가 몸에 강렬하고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예배당은 얕은 궁륭 천장을 가진 듯, 대단히 크고 높은 강당처럼 생겼다. 벽에는 미켈란젤로의 선배격 예술가들이 그린 전통적 수법으로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하였으나, 그 위를 천천히 바라보면, 그 이야기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예술이,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마치 신들의 대화 속에 있는 것처럼 펼쳐진다. 미켈란젤로는 예배당 양쪽 벽의 5개의 창()이 있는 틀의 공간에서 시작되는 궁륭천장에 유태인들에게 메시아 출현을 예언하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그 사이 사이에 이교도들에게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것으로 알려지는 무녀들을 크게 그러넣었다. 예언자들과 무녀들 홀로 깊은 사색하거나, 또는 서로 토의하거나, ()을 쓰거나, 그들의 내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 하는 형상들 모습이 있는 초인간적인 남녀의 상으로 표현하였다. 시스티나 예배당 미켈란젤로의 천장벽화에 나오는 그 인물의 수는 예언자가 7, 무녀가 15명으로 되어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고대국가의 사제와 무녀는 신탁(神託)의 예언자로 권위를 가진 지성인으로 알려지는데. 신비한 신령으로 다스리는 지성의 모습으로 이 그림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등신대보다 더 큰 이들의 인물상들이 열 지어 있는 사이의 천장꼭대기에는 천지창조와 노아의 홍수를 비롯한 구약의 첫 장부분에 장식될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천장벽면에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림과 그림의 작은 공간 사이에도 많은 인물상의 그림으로 채워 빈 공간이 없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하나의 작품으로 잇게 하는 완벽한 작품이었다.

이 천장화 그림의 내용 방향의 순서는 제단방향으로부터 문 방향으로 읽어야 하나, 실제 제작 방향은 반대로 시작한 것 즉, 문에서부터 착수한 것임을 알려져 있다. 제단방향으로부터 제단근처의 세 점은 우주와 하늘 창조의 모습을 보여주며, 중앙에는 인간의 창조인 아담과 화와의 창조 그리고 인간의 타락과 낙원의 추방이야기가 전개되어 있으며, 뒤이어 노아의 방주이야기를 비롯한 노아의 세 일화가 전개되는데, 그 마지막이 예배당입구 근처에 있는 죄 짖는(만취한) 노아이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중앙 부분에서 전개되는 방대한 이야기는 가사의 건축적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다. 양측면의 가장자리 부분은 코니스(cornice)를 그려 그림공간을 마련했고, 천장을 가로지르는 리브(rib) 5쌍으로 각 장면을 구획 하였다. 리브와 코러스의 결합부분에 그려진 대좌에는 벌거벗은 젊은이들 앉은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인간의 나체(이그누디 ignndi)에 대한 의미는 신플라톤주의 이상형 인간을 나타난 것일지도 있지만, 현재도 애매모호한 채. 정확한 의미는 밝혀 않고 있다.

 

천장화의 그림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부분은 아마도 천장의 정중앙 가운데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의 창조와 원죄 그리고 낙원의 추방 이야기 중 첫 번째에 해당되는아담의 창조부분일 것이다. 이 천장화 작품 중 아담의 창조그림에서 보듯, 왼편의 생기와 힘없이 앉아 있는 아담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빚어진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벌거벗은 아담이 인상적이면서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 오른편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생기를 기다리며, 한손을 겨우 들어 올리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작품에서 (오른편의 있는) 강력하고 위엄이 존재하는 하나님은 생명의 불꽃을 불어 넣기 위해 (아담의 손을 향해) 돌진한다. 작품의 인물과 인물사이 즉, 아담과 하나님의 배경에는 주의를 끌만한 것이 전혀 없어, 그 손의 손가락과 손가락의 (작은) 틈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이런 것은 평면에서 볼 때 뿐 만아니라, 실제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중앙 부분을 맨눈으로 올려 봐도 볼 수 있다.

주변의 색체 또한 밝은 면을 가진 색체를 피하고, 하늘과 땅조차 파란색계통과 녹색/ 갈색의 얼룩처럼 단순히 함으로써 인물들의 돋보이게 한다, 특히 하나님의 밝은 옷과 아담의 살굿빛 몸의 조각적으로 입체감을 살려 견고하게 보이며, 또한 짙은 윤곽선을 명확하게 그려서 눈에 띄게 함으로써 입체감의 배가 되도록 하였는데, 이는 당시대 미술기법의 윤곽선보다, 섬세한 명암조절을 이용한 암시적 묘사기법과는 정반대로 한 것이어서 이런 색체의 선택과 인물묘사는 미켈란젤로의 탁월함을 말해준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벽화를 그릴 때, 미켈란젤로는 신속한 작업을 요하는 부온 프레스코(buan fresco)를 선호하였고, 한편으로 스케치와 카툰(cartoon)을 사용하는 전통적 방식을 구사했다. 그는 현란한 붓질에도 불구하고, 그의 묘사기법은 통제된 윤곽선과 모델링에 의존하였으며, 다양한 환영적 기법을 통해, 우리가 마치 천장을 창을 통해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듯, 한 효과를 창출하였다. 여기에 (과거 회화기법에서 화려한 무늬에 사용된) 금박사용을 최대한 절제한 대신, 테두리를 형성하는 가상의 건축물기법과, 올려다보는 시점에 맞게 구성된 단축법, 누드인물의 해부학적 세부, 동일색조 등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환영적 효과를 더한다.

당시의 가톨릭의 입지에서 위기론에 반영된 그림이 있다면, 천장화의 끝부분인 노아 이야기의 두 번째로 위치한노아의 방주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당시 교황과 가톨릭교회 내부의 성직자들에 의한 만연한 폐습과, 면죄부 발행의 비판을 지적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기 전부터 후스, 사보나롤라 등 종교개혁자들의 활동으로 성직매매 및 성직자리 놓고 벌인 암투, 일부성직자들의 (비밀)혼인 관계 등 가톨릭의 조직 내부의 부패와 부조리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중세성립이후 유럽의 사회 내부에서 그동안 유지되어오던 가톨릭의 사회/종교적 위상과 영향력이 크게 흔들리고, 사회내부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등 로마교황청과 가톨릭교의 위기의 시기였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작품 노아의 방주이야기은 가톨릭의 위기상황과 로마교황청의 바람을 다름 아님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이야기를 통해 알기 쉽도록, 표현하여 그렸다. 사회변혁의 현장(대홍수)과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의 믿음과 보호(노아의 방주)를 나타나는 두 가지 내용을 함께 든 내용이 들어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그림에서 보듯, 대홍수속 인간세상은 혼란스럽고 높은 곳으로 피난 가지만, 노아의 방주 속의 하나님을 믿은 노아의 가족은 편안하고 보호받듯이, 사회의 변혁(종교 개혁)에 맞서, 진실의 믿음은 오직 가톨릭 하나뿐임을 세상에 알려는 메시지이다.

이러한 목적의 메시지가 든 노아의 이야기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작품 중 가장 먼저 작업한 작품(그림)이었기에 대규모 프레스코화의 작업이 첫 시도인 미켈란젤로로써는 아무래도 조수의 협조를 받았는데, 이 천장화 중노아의 이야기3부작은 조수의 협조를 가장 많이 받은 부분인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이 그림의 전체구도와 밑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완성시켰으나. 다만 그가 끝까지 완성해 나간 부분은 노아의 방주 부분을 중심으로 중앙부의 그림에 한정된 것으로 추정되어 잔다. 노아의 방주이야기에서 오른쪽의 인물들은 그의 조수로 이 작품의 그림과정에 참여했던 프란체스코 그라나치(1469/70-1543)가 마무리과정을 맡아 인물들의 그림을 끝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도 많은 조수와 그의 아틀리에가 화면의 부수적인 부분을 맡아, 미켈란젤로를 도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예술성 및 작품의 완성도 평가와는 별개로,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기를 인체 해부학적인요소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주장이 좀 거창한 것들이 많다, 미켈란젤로가 인체 해부 시도는 몇 번 있었지만, 그것은 인체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예술적 가치에서 해본 것들이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깊게 인체 해부학 연구를 한 것도 아니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가진 인체의 해부학 지식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과 같은 당시 ()학자 등 당대의 지식인과의 만남 및 의견 교류에서 충분히 양을 얻을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체 해부학적요소가 들어 있다 해도,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에 나타난 예술의 본질적 가치, 예를 들면 아름다움의 배경이나 인물묘사의 정확성, 당시 시대상을 표현한 요소 등 예술적 가치는 변함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맡지 않기 위해 그토록 기피하고 도망쳤던 시스티나 예배당의 공간을 이제 그에 의해 세기의 위대한 작품으로 재탄생하였으며, 그에게도 천재의 수준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올라간 초인이라고 불려도 아무 꺼릴 적도 없는 예술의 명장(明匠)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으며. 또한 이로 인해 (당대의)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도 상승하게 되었다.

 

그 후 넓은 바티칸 안에서 작은 예배당의 공간은 굉장히 중요한 장소가 되었고, 현재도 신임 교황의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여는 장소로써 뿐만 아니라, 19C초엽까지도 유럽의 각지 귀족집안들이 교황을 만나기 위해서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가야 만날 수 있는 교황의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며, 그 곳에서 교황과 그 밑에 있는 추기경이하 사람들이 가톨릭의 모든 의례와 행사가 거기로부터 시작하여 치러지는 등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장소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512년 시스티나 예배당의 작품이 완성하자마자, 이전의 율리우스 2세 영묘건립을 계속하기위해 대리석 조각에 집중하였다. 이 전체 프로젝트는 1505년경 시작하여 40년이나 걸렸으며. 율리우스 2세의 영묘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처음 ()성 베드로 바실리카성당에 안치되기로 했던 처음 계약과는 달리 어려 차례의 절차과정을 걸쳐 로마의 빈콜리의 산 피에트로 성당에 설치되었다. 현재 로마에 있는 빈콜리의 산 피에트로 성당의 율리우스 2세 영묘에서 보이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은모세상을 중심으로 밑의 부분 조각상 3점이다. 그 중에서 구약에 나오는 인물인모세상은 대리석을 다듬는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구약의 중심인물이며 입법자이자, 판관으로써의 근엄한 분위기를 갖는 모세를 어찌 보면 신과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인상을 준다.

모세상의 자세로 보아 많은 학자들이 말하기를 모세가 자신이 십계명을 얻고 산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현상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던져 깨뜨리는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모세상 아래 드러나 보이는 모세의 왼발은 자리를 박차고 막 일어나려 하는 자세를 재현한 것으로 이러한 논지를 펼친 학자들에게 유력한 징표가 된다.

모세의 양 쪽으로 옆에 있는 두 점의 조각상중 모세의 오른편상은 성 리아로써 활동적인 삶을 의미하고, 반대편에 있는 모세의 왼편 상은 성 라켈로 관조적인 삶을 의미한다,

 

그는 대외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율리우스 2세 영묘를 마치 고대 로마의 유적에서 보았던 수많은 포로들의 조각상으로 장식하고자 했다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에 있는 이 묘소를 위해 제작한아틀라스 노예 Atlas Slave)작품의 현상은 미완성의 작품이다. 작품의 몸통과 다리등 일부 형상만 남고, 나머지 부분의 대리석도 크기에 따라 절단되었으나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또한 이 묘소의 조각품의 일부로 알려진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시되고 있는죽어가는 노예도 그 형상이 완전하고 장엄하기는 하지만 지주(支柱)가 되는 뒷부분과 바닥은 대강으로 작업한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것들이다.

 

죽어가는 노예는 한 생명이 막 꺼지려 하고 있고,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은 순간을 선택하여 나타났다.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한 생명이 마지막 순간에 체념 속에 쓰러지는 몸짓으로 비극의 카다르시스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나고 있다. 그 조각상의 사진으로 보아도 때로는 용틀임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그것이 마침내 쓰러지는 순간,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미켈란젤로가 노리던 효과가 아니었나 싶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의 인체조각을 할 때, 아무리 격렬한 장면으로써, 막 뒤 틀닌 몸짓을 하고 있음에도 전체적 윤곽들은 언제나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나온 듯, 확고하며 단순하고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일찍이 다비드상에서 보이는 불균형적인 인체 비율과 상관없이 매우 안정적인 자세로 남성미의 위용을 나타나는 현상과 같다. 다만 다비드의 상에서 보이는 남성미의 위용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노예의 작품의 시선에서 보듯, 몸의 형태가 부자유스럽거나. 인간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담아져 있는 점이다. 그런 인간상이 담아진 상태는 미켈란젤로의 후기 조각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서서히 미켈란젤로가 예술표현성에서 있어서, 인간의 내면에 대한 인식이 서사적이며 비극적으로 옮기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완성하고, 율리우스 2세 영묘를 위한 조각을 재할 무렵 시점인 1513년에 새 교황 레오 10세가 선출되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로렌초 데 메디치의 두 번째 아들인 조반니 데 메디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린 시절을 함께 같은 교육을 받으며 지내온 친밀하고 막역한 사이였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아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오르며, 그로써는 새로운 시대가 기대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교황 레오10세도 그를 잘 알고 있으며 그의 대한 예술성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그를 피렌체로 다시 돌려보내었다. 미켈란젤로에게 피렌체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가족성당인 산 로렌초 성당의 전면 파사드 건축과 장식을 꾸며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미켈란젤로는 이를 받아 들린다. 따라서 피렌체로 다시금 돌아오고 그의 피렌체 정착 3기가 시작된다. 산 로렌초 성당의 전면 파사드 건축과 그 장식을 위한 조각품을 만들 준비를 위해, 율리우스 2세 영묘 제작의 계획시기에 찾았던 카라라의 채석장을 다시 찾아, 좋은 대리석돌을 고르기도 했다.

하지만 1520년 레오 10세는 산 로렌초 성당의 계획을 갑작스럽게 취소(연기)하는데, 이는 아마도 제정문제로 인하여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해 4, 로마에서 라파엘로가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운명하였고, 6월에는 교황이 마르틴 루터를 파문하는 칙서를 내림으로써 프로테스탄트(protestantism)의 종교개혁이 본격화되는 등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정치/경제/ 사회내부적인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산 로렌초 성당의 정면 파사드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같은 성당에 딸려있는 메디치영묘인 신성구실의 건축과 실내 장식을 맡겨졌는데, 이것도 역시 상당히 많은 공을 들어야 했다. 신성구실은 브루넬레스코가 건축한 대칭과 구성구실로 된 방으로써, 메디치에 속한 지도자()의 영묘를 모시기 위한 건축물이다. 교황 레오 10세는 자신의 아버지인 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와 피치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19세인 젊은 나이에 암살되어 죽은 숙부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영묘를 여기로 옮겨 모실 계획이었고, 또한 1516년에 로렌초의 셋째 아들이자, 교황 레오10세의 친동생인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가 사망하였고, 1519년에는 피에로의 아들이자 우르비노 공작이었던 또 다른 로렌초가 임종하자, 이들 유해도 같은 건물에 안치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피렌체는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의 통치하 있었다. 그는 일찍이 1478년 피치의음모 사건으로 살해당한 줄리아노의 유복자였다. , “위대한 자로렌초의 조카이자, 교황 레오 10세에게는 사촌 동생이 되는 된다, 레오 10세 사후 이후 하드리아노 6세가 제위 2(1523)만에 죽자, 그가 교황에 오르는데. 클레멘스 7세이었다.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는 종교 개혁기에 매우 바쁜 교황청과 교황 레오 10세를 대신하여 미켈란젤로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메디치영묘 역시 유사한 환경에 처한 그의 작품처럼 모두 완성되지는 못했다.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와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 두 사람의 영묘만이 미켈란젤로에 의해 천천히 진행되어 작품이 완성되었을 뿐이다,

 

산 로렌초 성당건물과 둘러싼 구성구실을 비롯한 건축물들은 모두 미켈란젤로의 예술선배격인 브루넬레스코가 만든 작품이다, 1520년부터 미켈란젤로가 새로이 손댄 부분은 신성구실 건물과 메디치 영묘 내부조각들과 주위환경들. 그리고 메디치 도서관(로렌티안 도서관)의 건축이었다. 산 로렌초 성당의 건물구성()안에 위치한 (브루넬레스코가 제작/건축한)구성구실과 (미켈란젤로가 제작/건축한) 신성구실은 본 성당과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고 있고, 현재 내부 공간의 공개하는 관람 시간마저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켈란젤로가 새로이 손댄 부분인 젊은 나이에 죽은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와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 두 사람의 메디치의 영묘가 모셔 있는 신성구실 건물과 메디치영묘 내부조각들을 마련하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생명의 유한함. 그리고 가톨릭에서 말한 자연(인생)의 섭리적 순환 과정을 간결한 르네상스식 건물양식으로 표현하였다. 미켈란젤로는 두 사람의 메디치의 영묘가 놓아질 비교적 좁은 공간에 수직이 강화된 영묘를 설계하였고, 실내에 있는 영묘를 양 끝으로 몰아감으로써 영묘의 무덤과 장식한 조각이 있는 실내를 고요하고 정숙한 수도원에 있는 내부처럼 만들었으며, 짙은 회색의 대리석으로 건물의 내부 골격 처리와 화사한 하얀색의 벽면으로 하여금 건물의 엄숙함을 더했다. 이 두 사람의 영묘는 양쪽 벽에 마주보는 형태로 대칭적인 기념물로 장식한 채 되어있다.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의 영묘 조각은 관조적인 삶을 상징한다. 27세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은 로렌초 공작은 살아 있을 때, “사려 깊은 이라는 별명(애칭)으로 부를 만큼,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성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런 인간성의 특성을 가진 그를 추모하고자, 미켈란젤로는 깊은 생각을 빠져 있는 이상적인 로마 장군(조각상)을 모습으로 그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 석관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누어있는 남녀의 입체상을 조각하였는데 각각 새 벽과 황혼이란 이름을 지닌다.

 

그 맞은편에 있는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의 영묘는 로렌초의 영묘와는 반대로 활동적인 삶을 상징하고 있다. 지휘봉을 손에 든 채,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무엇인가 결정을 내리는 로마의 지휘관(장군)으로 묘사된 그는 1478피치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19세인 젊은 나이에 암살되어 죽기 전까지 마상 게임 등 메사에 활동적인 삶을 즐겨했다고 한다. 줄리아노 영묘의 석관위에 장식된 남녀는 각자 낮과 밤을 상징하며, 고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지혜의 신인 미네르바(아테네)을 상징하는 부엉이가 여성조각상()의 발아래에 조각 되어있고,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노인의 얼굴이 미완성으로 남은 여성()을 팔 아래에 놓여 있다.

이처럼 완성한 다음, 무덤을 구성하는 저명한 가족 구성원들의 실제 얼굴과 조각상과의 비친 이미지 차이에 대한 어느 감상자의 질문에, 미켈란젤로는 다음과 같이 일축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후에 어떤 사람이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미켈란젤로의 산 로렌초 성당(예배당)의 메디치 영묘 작업은 1521년 교황 레오10세가 서거하자, 영묘 조성작업은 중단되었으나, 1523년 하드리아노 6세가 임종하고 다시금 메디치 가문에서 교황인 클레멘스 7세가 오르자, 미켈란젤로는 다시 산 로렌초 성당 영묘작업에 복귀해 열성적으로 하는데, 클레멘스 7세는 바로 메디치 영묘 제작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 하고 계약하였던 줄리오 추기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새롭게 조성된 것이 메디치영묘와 인접해 있는 곳에 따로 조성하여 건축된 일명 메디치 도서관으로 불러지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건축이 추가로 맡겨진다, 1524년에 시작된 이 건축 공사는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품처럼 미완 성으로 남았지만, 도서관의 곳곳에는 미켈란젤로의 설계안을 바탕으로 한 공사가 후대에 그대로 진행되어 그의 고전주의 건축의 면면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으로 불러지는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입구에 조성된 계단은 이 건축에 백미로써 꼽힌다. 이 도서관 계단과 그 주변의 문양들은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따라, 바르톨롬메오 암만나티(Barrolommeo Ammannati 1511-1592) 1560년경에 완성한 곳이다. 2층에 있는 이 도서관의 서재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할 이 계단은 미켈란젤로의 인문주의적 사고력과 르네상스 문화가 깃든 요구에 따른 계산력이 깃들어 있다. 이 계단의 통로와 관문은 그 당시 문화의 통로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메디치(어린) 자녀들을 위한 예술적 격려라고 할 수 있겠다. 높은 계단에 진입하기 전 하단의 둥근 계단 3개가 펄치고 있고, 그 위로 한 계단씩 점자 직선으로 퍼지면서 12개 계단을 올라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건물의 계단은 다소 어둡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회색의 대리석으로 위의 (밝은) 조명의 빛을 나는 건물과 대조로 이룬다. 이런 것 때문에 도서관(입구)로 올라가면서 점차 밝아지는 느낌을 받는데, 도서관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두움에서 밝은 세계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계단이 미켈란젤로의 진리의 세계관이 합죽되어 있고,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점인) 르네상스의 정신이 들어있다고 생각을 하면 이 이치는 금방 알 수 있다.

 

산 로렌초 성당(예배당)의 건물과 맞대고 있는 이 도서관은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창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곳이다. 이 건물 자체 곳곳에 남아 있는 미켈란젤로의 손길이 남아 있는 미술사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메디치가문의 업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그들이 모아 논 세계 각국의 희귀본을 소장한 곳이기도 하다,

이것들이 결국 르네상스의 자양분으로써 문명의 창을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곳이 세계 최초로 건립된 공공도서관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반문을 제기 할 수 없을 것이다. 메디치가문은 15C 중엽 무렵까지 희귀본과 그들이 필요한 장서나 문서 등을 산 마르고 수도원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보관하여 오다 그 규모가 늘어나자, 아예 독립된 도서관을 세워 메디치 도서관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시초가 된다.

미켈란젤로가 1524년에 산 로렌초 성당(예배당)의 메디치영묘와 인접해 있는 곳에 따로 조성하여 건축하기 시작한 뒤 미켈란젤로의 설계안을 도태로 16C중후반까지 계속 조성되어 지금과 같은 환경이 완성되었다.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서재는 미켈란젤로의 치밀한 설계에 따라 건축되어 있다. 소장되어 있는 각종 희귀문서, 폴리오(folio), 파피루스 사본 등이 항목별로 전시되어 있으며, 또한 각 항목에 따라 독립된 책상이 배치되어 있다. 도서관의 서재입구에서 양 측면을 본다면 밝은 光明(광명)을 가지고, 마치 다른 세계로 연결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길고 네모한 창이 쭉 나 있는데, 이런 光明(광명)은 어찌 본다면 창문처럼 보이지만 창문이 아니라, 차단된 벽을 위한 장식이라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 밖에 이 시기, 즉 피렌체 정착 제 3(1519-1534)의 미켈란젤로의 조각으로 유명한 것이 메디치 마돈나,다비드 아폴로가 존재한다.

그 중 메디치 마돈나는 메디치영묘 제작 시기(1521-34)에 함께 조성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으로써 이 역시 메디치영묘작업처럼 하다 만 미완성작품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50대의 작품으로 그의 후기조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후로 그는 완벽한 인체의 비례를 지키는 고전주의 조각을 하지 않는다. 메디치마돈나는 고전주의적 비례를 지키면서도, 조금 상/ 하로 좀 늘어지는 현상이 보이는데, 이는 르네상스의 말기 현상의 조각의 모습으로 변화중인 양상이다. 르네상스의 말기 조각은 인체의 비례 균형이 대부분 무시되고, /하로 쭉 늘어져있는 양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미켈란젤로는 그 흐름에서 선구자였고, 그 이후의 조각들은 흐름의 양식 변화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메디치 마돈나조각은 원래 계획대로라면 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의 영묘가 들어설 자리의 산 로렌초 성당의 신성구실의 한구석의 벽 3가지 조각 중에 가운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다비드 아폴로조각상은 1530년대 초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아마도 이것 역시 산 로렌초 성당의 신성구실 영묘작업에 쓰일 조각품 중 어느 한 작품 일 것이다. 이 작품의 다비드 아폴로라는 이름이 붙인 것은, 작품의 주인공에 대하여, 다비드라는 설과 아폴로라는 설, 두 가지가 팽팽히 대립되어,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는 까닭이다. 현재는 피렌체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무렵 유럽 근세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군대에 의한 로마함락과 대 약탈이다.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과 분쟁이 로마교황청이 적극적 개입으로 휘말러 가면서 발생했다. 메디치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면서, 이웃 강대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스페인의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왕가)사이의 아슬아슬한 외교정책을 계속해, 그 당시 서유럽에서 최대 영토로 가진 최고 강대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5세의 심기를 건들었다. 특히 이탈리아에 관련하는 정책은 프랑스에 편의를 도모하고 있음으로 카를5세의 분기를 더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15C 후반기부터 로마의 교황청령은 영토 확장을 통한 중북부의 주요도시들을 장악하고 있었음으로 이탈리아의 사실상 주인 노릇을 해온 것 사실이고, 피렌체 등 주요 도시는 메디치등의 주요 가문을 통하여 이탈리아의 중북부를 다스려 왔다. 또한 가톨릭의 종교적 영향력도 포함된다면, 그 당시 이탈리아 중북부는 교황청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황청이 다스리는 영토가 넓어지고, 세력권이 확장되자 교황()은 다시금 중세기와 같은 (신정 통치를 통한) 서유럽통치를 꿈을 꿨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유럽의국가들, 특히 강대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간의 세력 균형을 도모하고,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게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의 분기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어 대부분이 독일지역의 반 가톨릭지역(프로테스탄트교도가 많이 사는 지역)에서 모인 군사들로 하여금 스페인 함대에 태워, 로마를 기습 공격했다. 이는 철저한 계획으로 이루어졌으며. 로마 교황청과 유럽 어느 나라도 이와 같은 과감한 계획을 아무도 몰랐다 그 당시 로마는 정식 군인으로는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용병들로 구성된 교황청 내 수백 명의 친위경비대와 그 외 치안을 맡는 군대가 약간 있었을 뿐이다. 카얄 5세는 이걸 노렸음에 분명했다,

기습 공격을 당한 로마 교황청과 로마는 그야 말로 당황한 채 어쩔 수 몰랐다, 교황청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로마 시 성벽을 수비진으로 하여. 로마 시민으로 하여금 의용군을 구성하여 방위계획을 짰으나, 경험 많은 정규군으로 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에게 밀리는 건 당연했다. 성벽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신성로마제국군 총대장이 전사하여, 의용군에게 적군이 물려 갈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으나, 이는 오히려 신성로마제국군의 분기를 거슬렸다.

고대 이후 로마 제국이 형성된 도시이고. 중세가 시작되는 반달족의 서로마 침략(1차 로마 함락)이후, 침입을 받지 않은 유일한 도시었고. 중세이후, 신성지역으로써 로마 교황청이래 막대한 ()가 있는 도시였음으로, 로마에 대한 환상은 모든 유럽인에 마찬가지이었다.

거기에 카알 5세는 로마를 공격하는 병사들에게 관료지급을 하지 않고, 로마 함락시, 나오는 그 엄청난 황금을 대신 약탈하여 지급 할 것을 용인하여 대 약탈을 하게 된 주 요인으로서, 많은 재산피해와 인명피해가 나왔다. 여기에 로마를 공격하는 대부분 군사들이 독일지역의 반 가톨릭지역(프로테스탄트교도가 많이 사는 지역)에서 선출된 군사들인지라, 반가톨릭의 감정도 배제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군의 로마 대 약탈을 제공한 원인 요소이다.

교황청의 스위스용병으로 구성된 친위대의 결사적인 항쟁 덕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9개월 동안 한때 미켈란젤로도 설계/ 장식한 바 있는 현재 바티칸(교황청) 외곽의 로마안에 있는 요새인 산탄젤로성(대천사성)에 숨어 지내다, 추운겨울에 정원사로 위장하여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다시 돌아가서, 로마가 함락되고, 교황청이 신성로마제국군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렌체 내부에서 시민들이 다시 체제를 공화정으로 복귀하려는 반란이 일어났다. , 로마에서 초래한 메디치위기를 틈타, 피렌체에서도 메디치타도를 외치는 시민 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격동의 시기에 취한 미켈란젤로의 행동과 사고이다. 그는 10대 후반에 메디치가솔이 되었으며, 또한 두 명의 메디치의 교황으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음 에도 불구하고, 일단 공화파의 시민반란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는데, 이는 아마도 엣 정())과 그리고 예술과는 별개로 자기의 신념과 가치를 우선시 하는 미켈란젤로의 사고와 정치사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자신의 부오나르티 가문이 피렌체 공화국의 관료에 몸을 담긴 () 귀족의 출신임으로 그런 것이 복합된 작용으로 되지 않았나 싶다,

따라서 느리게 진척되던 메디치 가문의 영묘 작업과 메디치 도서관 공사가 중단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켈란젤로는 반란군 공화파의 관리로 피렌체 외곽이 성곽을 튼튼히 쌓아 건축하는 임무를 맡고, 또한 전쟁에 대비한 어려 가지 건축 계획을 수립한다.

어떻게 보면 이 시기 미켈란젤로에게나, 피렌체내 정치적 상황에게나 혼란스러운 시기이다. 그는 정치적 신념과 예술가 진로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다. 심지어 이웃국가인 프랑스로 망명할 계획도 세우고 그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베네치아에 가서 알아보기도 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망명하여 프랑수아 1세 궁정에서 편안하게 예술가로써 작품에만 집중하도록 하던 계획을 세웠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 프랑스 군대가 피렌체를 포위한 까닭에,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프랑스이주계획은 무산됨에 따라, 피렌체공화국의 지도부는 그를 배신자로 낙인 하였다.

미켈란젤로가 마음을 고쳐먹고,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전쟁이 격화되어 프랑스 군대가 피렌체를 포위하고, 공격했던 시기이었다. 15308월 이 전쟁은 피렌체의 시민군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군대를 가진 프랑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고,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한 메디치가문은 다시 피렌체에 입성한다. 이렇게 되자, 공화국관리로 지냈고 또한 프랑스로 이주 계획까지 세웠던 미켈란젤로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미켈란젤로는 다시 메디치가문에 도움을 요청한다. 로마에서 절제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호감을 얻기 위하여, 메디치영묘 작업과 메디치 도서관 건축 사업을 다시금 의욕적으로 재개했다, 미켈란젤로에게 1530년부터 1534년간 약 5년간 피렌체 3기 생활은 역사의 격동기 시대에 매우 혼란스런 상황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깊은 내면세계 (경험)을 느끼게 되며, 그 후 그가 제작되는 작품은 종교적인 세계에 진척하게 되는 바이다. 1534년부터 그의 작품은 후반기로 접어들며, 죽을 때까지 로마 생활을 하게 된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부름을 받고서 다시 로마로 간 시점은 가톨릭교회가 그야말로 가장 어려움에 처한 시기였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군대에 의해 로마의 약탈이어, 서유럽 곳곳에서 일어나는 프로테스탄교도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세력약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교황청이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교도에 대응하기 위한 내부적으로 거센 개혁 요구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약탈로 로마 산 피에트로 성당과 그 주변에 있는 수도원 및 성당 그리고 로마의 유명한 대성당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막대한 황금을 주고, 대관식까지 치러 주는 굴욕적인 일까지 치리고서야 완전히 자유가 되었다.더욱이 로마가 황폐화 되었고, 로마의 시민들과 귀족들이 너무 많은 인명/재산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교황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한, 피렌체의 공화파 반란에서 보듯, 이탈리아 네 도시국가들의 교황과 교황청의 신뢰도 끝없이 추락한 상태였다.

 

서유럽의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청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시점에 미켈란젤로는 교황클레멘스 7세으로부터 뜻밖에 제안을 받는다, 자신이 천장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정면 벽면에 당신이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것을 그려보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는 밑그림만을 본채 급작스럽게 선종하였다. 그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파울루스 3세는 그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교황청에서 성스러운 장면으로 장식 할 것을 주문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미완성된 율리우스 2세의 영묘 작업을 집중하기 위하여 거절하였으나, 파울루스 3세가 이것은 나의 30년 숙원 사업이다. 교황이 된 지금도 나의 숙원을 충족하지 하겠느냐!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편의에 대한 양보했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작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작품을 시작할 당시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는 고령의 속한 61세 나이에 이르렀다.

이 작업을 하기 전에 비밀유지를 위해 커튼을 치고, 철저한 보완 유지 속에서 비밀스럽게 계획적으로 짜인 상태에서 작업하였는데, 아마 이 작품의 진행을 아는 이도 로마교황청 내 미켈란젤로와 극소수만이 이 작업의 진행하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 입구 벽면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로부터 8년 후, 154212월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시스티나 벽면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내고. 이 작품의 그림을 공개하였다. 500명의 인물이 하나하나씩 정교하게 묘사된 그림으로 거대한 대형 종교화인 작품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후기 대표작으로 꼽히는최후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의 작품은 신약의 히브리서 제923절에 나오는 문장인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하나님의)심판을 받게 된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그림으로 중세 - 르네상스 - 근세까지도 계속 되어 나오는 성당이나 예배당의 천장에 장식되어 온 단골 그림이었지만. 이렇게 시스티나 벽면 그림처럼 이처럼 입구의 벽면에다, 충실히 내용으로 가득 찬 대형 그림은 드물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장면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그림의 제 1부는 맨 위에 나타나는 두 그룹의 천사들의 모습으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이 그림의 천사들은 날개가 없다, 그림에서 보듯, 하늘의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 위를 지나는 왼편에 있는 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 때의 십자가와 면류관을 들고 있고. 주로 순교자들 위를 지나는 오른편의 있는 천사들은 순교자들이 묶었던 이단(異端)의 신전(神殿) 기둥을 나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 아래 있는 제 2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늘에 있는 천국의 모습이다. 예수그리스도와 바로 왼편 옆에 있는 성모마리아를 중심으로 둘레에 모여 있는 인물들은 주로 12사도와 초기 가톨릭(전파과정에서) 신앙을 믿다 순교한 성자들이다. 이 그림에서는 그들은 각자 당시의 순교하는 과정에서 나온 형구 形具등 고문기구나, 상징하는 물품을 지니고 있다.

3부는 천국부분 바로 밑에 전개되는 가장 극적 광경인 연옥(煉獄)이다. 묵시록에 나오는 글문처럼, 그림 중앙에 있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죽은 자들을 깨게 하여 심판을 받도록 한다, 왼편을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람과 오른편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보듯 강렬하게 대조되는 몸짓이나 표정에서 극명한 차이를 말해준다.

4부는 맨 아래의 지옥이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나오는 아케론 강이 있고 그 옆으로 지옥의 왕인 루키페르가 온몸의 구렁이가 감싼 모습으로 서 있고, 죽음의 못으로 떠밀러지고 있는 악인들의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이 작품의 그림이 공개되자, 외부자체는 물론이거나, 교황청내부에서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데, 이 작품이 원래 한 천()의 한 올 없는 맨몸으로 나타난 누드 작품이었다. 또한 성인들의 모습들이 키스 장면도 포착되는 등 외설적인 장면도 연출되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의 수정요구를 하였지만, 25년 동안이나 원작 그대로 두었는데, 이 그림이 그 당시 교황과 교황청의 상황과 요구가 반영된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군에 의한 로마 함락과 로마 약탈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황청의 권위를 상징하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것들을 모셔진 많은 것들이 없어지거나, 많이 훼손되었다. 무엇보다 가톨릭의 서방교회를 나타나는 교황()을 상징하는 성인들의 유골이 없어졌다. 그리스도의 12제자 한명이자 서방 교회 창시자인 사도 베드로의 유골의 일부가 훼손되었고, 로마 시대에 순교당한 사도 바돌로매와 성 라우렌티우스, 성 카테리나의 유골이 송두리째 도난당했다. 가톨릭의 신앙을 위해 순교한 수많은 유골들을 모심으로써 세계 교회(종교)적 중심지로 서 있던 교황청의 신성함은 로마약탈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따라서 교황과 교황청은 순교자들을 그림의 작품으로써 재현하여 교황청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로마 약탈로 인한 수난을 극복하고자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교황청이 가장 신성한 자오인 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을 장식하는 그림에 유골이 사라진 순교자들의 형상을 그려 넣도록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전해 내려오는 옛 이야기를 통한 성인들의 순교 할 순간 당시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오른편 밑에 순교한 사도 바돌로매 형상은 고통스러워 보이며 인간의 살가죽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가톨릭 성인들에 대한 기록에 따르자면 그는 눈은 크고 코는 매끈했으며 수염은 무성하였다, 가톨릭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을 받아 고통스럽게 죽었다.” 고 적혀 았는 바를 미켈란젤로가 재현해낸 것이다, 탐스러운 수염이 무성한 얼굴 묘사는 물론 이와 벗겨진 자신의 살가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살가죽의 얼굴형상은 신앙적으로나 또는 예술 작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자신의 자화상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도 바돌로매 장면에서 오른편으로 눈길하다 보면, 날카로운 못이 박힌 바퀴 들고 있는 듯한, 성 카테리나의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은 녹색의 옷을 입고 있지만, 원래 작품은 여인의 가슴이 드러나는 반라 형상으로 그러 놓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동정녀이자 성녀인 카테리나를 외설스럽게 그려 넣었다고 해서, 당시 시절에는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미켈란젤로가 당시에 전해 내려온 성인들의 기록을 재현해 논 것에 불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성녀 카테리나는 쇠톱과 뾰족한 못이 박힌 바퀴에 깔려 죽는 형을 받았지만 그녀가 신성한 힘으로 바퀴를 파괴하자 로마 군인들이 가슴을 다 풀어 헤치고, 목을 베어 죽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전설로써 전해 내려오는 순교 장면을 선택하여 그림장면과 같이 그러넣었다는 것이다, 이와 내용을 모른다면 외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당시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은 유럽 각지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프로테스탄교(개신교)도의 세력 집단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주제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선호하였다. 이와 같은 기준에 미켈란젤로의최후의 심판작품이 어느 선까지는 부합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들이 종교적 격변기에도 원작 그대로 25년간 버티어 낼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유럽 각지에서 종교개혁의 요구가 거세어지고, 미켈란젤로에게 작품을 주문한 파울루스3세가 선종하자, 사정은 달라진다.

당시 신학자로 유명세였던 안드레아 질리오(Andrea Gilio)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수염 없는 예수와, 신화적인 카론의 배, 또한 그의 의견에 의하면 마치 투우장에서 구경하고 있는 듯한 성자들의 몸가짐, 그리고 묵시록에 나오는 천사들의 배열이 성서와는 반대로 그림의 네 모퉁이에 나누어 있지 않고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기와 여인의 젖가슴이 그려진 그림 등등을 들어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는 유럽의 종교개혁이 분위기가 잠잠해진 17C 초엽까지 지속되었는데,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완성하고, 후일에 생긴 일이지만, 베네치아에서 널리 회가로 이름을 일려진 베로네제(Paolo Veronese) 경우, 그의 작품레위가()의 만찬의 그림 내용에서 성서에 열거된 인물 이외에도 난장이, , 앵무새를 데리고 있는 바보 등과 같은 임의로 선택한 모티브를 묘사에 첨가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에 호출까지 했다. 종교회의의 규정은 신성한 교회 내에 나체가 있는 그림이나, 자극적이고 상스러우며 불결한 그림을 두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트렌토공의회 이후에 나온 종교 예술에 관한 모든 저작들, 특히 질리오 자신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화가의 오류에 대한 대화(1564)나 라파엘레 보르기니의 묵상(1584)은 교회 예술에서 나체그림을 일체 반대하고 있다. 특히 질리오의 주장에 의하면 설령 한 인물이 성경의 내용에 따라서 반드시 나체로 그려져야 할 경우에도, 적어도 요포(腰布)를 두르도록 권장하고 있다.

 

예술의 표현 자유나 사상표현이 종교나 정치이데올로기에 억압되어져 있는 그 당시 시대의 비관용적 정신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본보기로서는 아무래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완성 직후 어떤 취급을 받았던가 하는 사실을 들어야 할 것이다. 트렌토공의회 소집의 결과로 나타난 것들- , 인체 조각의 성기부분 잘라 낸다거나, 그림의 경우 무화과 잎파리로 인체의 국부를 가림으로 성적인 것을 숨기는 동시에 그것을 더욱 강조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로틱한 감정의 애매성은 매너리즘과 더불어 비로소 대두되었고, 이러한 애매성은 가장 솔직한 감정과 가장 역겨운 허식, 가장 엄격한 권위의식과 극단적인 개인주의, 가장 정숙한 표현과 가장 외설적인 형식 등의 극단적인 대립들을 그 내부에 지니고 있던 매너리즘문화의 분열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559년 바오로 4세는 미켈란젤로의 조수이자 제자였던,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에게 임금으로 60스쿠디(Scudi)를 지급하고, 이 벽화에서 특히 자극적으로 보이는 나상(裸像)을 덮어씌우게 하였다. 게다가 1566년 바오로 5세는 이 벽화에서 그의 비위에 거슬리는 몇몇 부분을 제거시켰다. 그의 뒤로 이은 클레멘스 8세는 이 벽화 전체를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으나, 이와 같은 그의 의도는 로마에 있는 성루가 아카데미의 탄원서로 간신히 만류되었다. 이와 논란은 한 세기가 넘도록 지속되었는바, 예술가들은 그때마다 자율성에 대한 침해로부터 보호하고자 싸워왔다.

 

미켈란젤로의최후의 심판이 작품으로써 외설논란으로 벗어나 예술성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16-17C 서유럽에서 종교 개혁과 종교전쟁의 시기가 끝나고. 개인이 종교의 자유가 지니고, 개인주의적이며 합리적인 근대 철학사상과 과학/기술로 발달로 더 이상 종교가 사상지배로이어질 수 없는 18C경 근대시대로 들어와서부터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그림들이 세기에 따라 간혈적으로 복원조치를 하였으나, 오랜 세월의 견디어 낸 그림이지라. 여기저기 갈라지고 있음으로 해서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대대적인 3차로 나누어 대대적 수술을 받은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최후의 심판이 복원하게 되었다. 거기에 조명 시설과 환기시설까지 새롭게 단정한 뒤, 이를 다시 공개되는 날,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몸으로 이뤄진 신학의 거룩한 성소이라고 해 다시금 외설논란에서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성을 높이 인정받는 계기가 되였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완성 직후에도 종교화 몇 점 더 그린다. 그의 후기 회화로는 바티칸 궁전 파올리나 예배당에 있는 벽화 바올의 개종베드로의 순교(1542~49)를 그렸다.

로마의 제2정착기 대표적인 조각으로는 최후의 심판이 거의 완성시기 무렵, 아니면 같은 시기에 조각한 그의 정치색이 나타난브루투스가 있다. 그는 교황의 부탁으로 로마로 오긴 하였으나, 사실상 메디치의 과두 정치에 반대하여 오게 된 사실상 망명에 가까운 도피 생활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하고 고대 로마공화정을 지키러했던 고대 로마 정치가인 브루투스 흉상을 조각함으로 그는 피렌체의 메디치에 의한 독재와 다름없는 정치체계에 항거한 샘이었다. 훗날 피렌체에서 메디치의 대공 코사모 1세가 그가 살아생전에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올 것을 어려 차례 간청하였지만, 그는 가지 않고 로마에서 임종한다. 다른 작품과는 달리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남겨진 미완성작품이다. 이는 조각품의 하단에 남겨진 라틴어로 된 문구가 뒷받침 해준다,

조각가는 대리석으로 브루투스를 조각하면서, 저질러진 범죄들을 떠올렸고, 그래서 미완성으로 남겨 놓기로 한다.”

 

미완성작으로 남아있는 브루투스는 고대 로마의 귀족의상인 토가의 망토를 걸쳤고, 오른쪽 어깨 위에 사람이 새겨진 브로치로 망토를 매듭을 지어 묶은 모습이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날카롭게 바라보는 모습으로 두터운 목의 근육이 돋보이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상을 새길 때. 조각술에 의해 돌의 질감을 머리카락, 얼굴, 망토를 각각 다르게 마무리했는데, 올을 짠 망토는 조각칼을 옆으로 해서 전체가 평행되게 함으로써 망토의 질감을 나타냈으며, 얼굴은 소묘하듯 다양한 방법으로 다듬었고, 머리카락은 대리석의 거친 면을 남겨두었다. 이와 같이 단단한 돌을 환영적인 인물상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돌을 거칠게 남겨놓은 것은 의도적인 기교에 의한 것인데, 보기에도 의도적으로 깎아 매끈하게 보이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더 나을 것이고, 또한 그 인물상에 보이는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남겨둔 것 같다. 현재 이 대리석 작품은 피렌체 시내에 있는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지고 있다.

 

70세 무렵 그는 교황청의 부탁으로 성 베드로 성당건축의 총지휘를 맡아, 200여년 걸린 건축과정에서 특히 지붕()틀 설계안파샤드 설계안으로 그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였다. 로마에 있는 고대 신전 판데온의 돔 내부와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성당의 돔 설계에 의거한 그의 지붕()틀 설계안은 이후 서양건축사에 있어 큰 영향력을 남기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후일에 지어지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회의사당과 영국 런던에 있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 양식은 그의 건축 설계에 대한 업적을 그대로 반영하는 바다.

노년에 이르려 그는 주문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의지에 의해 피에타 주제로 하는 세 개의 조각상을 제작하기에 이른다.피렌체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그리고 만년의 작품인 론다니니의 피에타그것이다, 이 조각상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형태를 가만히 보면, 고난에 잠긴 성모를 주제로 자신의 종교적 위치에서 일생을 돌아보는 듯하다. 미켈란젤로 후기의 피에타의 3가지 작품의 특성과 모양 형태만 보더라도 고전 형식의 부정과 육체나 물질의 공허함과 취약함에 대한 체념 등이 내포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의 인생이 성공적이고 경쟁이 없는 지존의 자리에 올라서야, 그는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부질없었던 정열과 야심으로 얼룩진 상처의 과거를 뉘우치면서 신앙에로 눈을 돌리게 된다.

 

어쩌면 그는 여유로움이 없이 항상 더 높이 오르고자 하는 욕망에 때문에 항상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 모른다. 주위의 경쟁자를 대범히 보지 못하는 경쟁심과 마음속으로 질투와 자신의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기에 당시 쌍벽을 겨루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평생 앙숙 관계에 있었으며, 그의 로마정착기에 함께 지내던 라파엘로, 브라만테와도 사이가 대단히 나빴다고 알려진다.

그의 일생은 대단한 재능 속에서도 자신의 분별없는 욕망이 만든 투쟁과 갈등의 편치 않은 삶이었다. 그의 불같은 성격은 변함이 없었고, 예술가로서 최고의 명예와 안정을 누리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피를 흘렸고, 영혼은 고독했으며, 항상 그의 생각은 어둡고. 슬픔에 잠겨 있었다. 예술에 있어 최고봉에 올라가며, 그 경쟁자들이 다 죽은 그의 인생 말기에 이르고서야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종교적인 신앙으로써, 과거의 얼룩진 상처들을 뉘우치면서 살았는지 모른다. 그의 후기의 조각과 회화, 그리고 그가 지은 시에서 표현한 종교적인 심리는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현재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에 있는 피렌체의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죽은 예수를 니고데모3명의 인물로 하여금 받치고 있는 풍경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자화상을 슬픈 니고데모의 얼굴에 넣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자신의 묻을 무덤에 장식될 성당에 안치 할 목적으로 작업을 하였지만. 제작 과정중에 결점이 있는 대리석에 좌절한 미켈란젤로가 조각상을 크게 훼손시켜 버렸다. 이 작품의 완성은 그 이후로 8년 뒤에 그의 조수였던 티리베오 칼가니 Tibeno Calgagni가 그의 허락 하 작업을 진행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또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막 십자가에 내리는 듯, 그리스도 옆구리를 껴안고 있으며. 유난히 힘들고, 불안정한 모습을 담긴 성모 마리아의 상을 조각한 팔레스티나의 피에타의 성모 모습은 마치 힘들고 불안정한 삶을 누린 그의 인생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미완성작품이나, 미켈란젤로의 말기의 심리적 파악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현재 그의 무덤 있는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다,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업은 론다니니의 피에타로 그의 임종 3일전까지 작업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도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미완성작품으로 남았다. 미켈란젤로는 이를 자신의 무덤위에 장식될 작품으로 생각했으며,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모자에 램프를 매단 체, 새벽까지 작업을 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565년 작품이 거의 완성될 무렵, 미켈란젤로는 무슨 생각인지, 이미 광택까지 다 끝난 대리석 조각에 다시 망치와 끝칠을 하여 다시 조각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1564년 그가 죽은 후, 이 새로운 형상이 드러냈다. 힘없이 서 있는 예수를 성모마리아가 뒤에서 맞대고 있는 거의 뭉개진 형상으로 그의 마지막 의지와 신념을 영적인 차원에서 정의를 부여하였다.

론다니니라는 이름은 이 작품이 로마의 궁전에 있던 것이기에 붙여진 것이긴 하지만, 이궁전이 반드시 지금의 교황청- 바티칸궁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며,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이 작품은 밀라노의 스포르체성에 소장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1564218일 로마에서 임종했다. 피렌체의 지배자 메디치의 대공 코사모 1세는 노령의 천재가 사망할 겨우 피렌체가 그의 매장 장소 이어야 한다고 로마의 실력자들에게 미리 통보하고 어려차례 협조를 구한다. 또 시신 운구와 함께 그의 화실에 있던 모든 물건들을 피렌체에 가져 갈 것을 알렸다. 그가 눈을 감자, 코사모 1세는 예술가인 조르조 비사리를 로마로 보내 시신을 운구하게 했고, 거장의 격에 맡게 웅대한 장례식을 준비하기 하였다

그의 시신 매장지는 그의 부친이 매장되어 있으며. 카사 부오나오티와 인접한 산타 크로체 성당으로 결정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1564312일에 시작되어 몇 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죽음에 애도하는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그의 장례식은 비사리가 설립한 피렌체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ademia dei Disegano)의 예술가들이 중심으로 특별위원회가 구성이 되어, 비사리, 브론지노, 암마나티 등 그 당시 이탈리아 각지에서 쟁쟁한 예술가들이 모두 참석하였다고 한다.

 

산타 크로체의 그의 무덤위에 있는 장엄한 묘비는 비사리가 직접 제작한 것들이다 위대한 거장에 알맞게 왕실에서나 사용될 법한 휘장이 성당의 천장으로부터 내려오고, 그의 흉상이 무덤위에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