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8. 16C 전성기 르네상스의 미술 대변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vinci 1452-1519)는 중부의 토스카나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거기에 있는 외가에서 어린 생애 대부분을 지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데생에 소질을 보여 아버지인 세르 피에로는 피렌체의 조각가이며 회가이었던 안드레아 텔 베로키오 (Andrea del Verrocchio)가 경영하는 유수한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게 한다.
당시 미술가로 베로키오의 명성은 대단히 유명하였는데, 특히 베네치아 있는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의 청동기마상』은 그가 만든 작품 중 높은 수준의 청동제작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의 청동기마상』에서 말의 움직임(동작)을 나타난 작품 솜씨는 (말의) 해부학의 연구를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물이며, 또한 콜레오니 얼굴 및 목의 근육에서 나타나는 명확하고 뛰어난 솜씨의 발굴은 그가 관찰력이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이에 훗날 레오나르도의 비밀노트에서 드러난 움직이는 말(의 다리)에 대한 묘사나, 인체해부도와 같은 연구 성과들에서 나타난 과학적 관찰력은 그에게 배웠음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러한 걸작들이 탄생하는 이 공방에서 레오나르도는 주물공작과 금속공예의 비법을 전수받았을 것이고, 또한 나체 모델이나 옷을 입은 모델을 습작도 해보면서, 본격적인 미술의 창작하는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여기서 갖추었을 것이다.
최근에 그가 남긴 많은 스케치북과 노트북이 하나하나 발견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거기에 쓰어진 인체의 손, 발 등 소묘를 비롯하여, 각종 동식물의 해부도의 기록물도 포함한 엄청난 양의 소묘와 자세히 기록된 내용물을 보면 다방향의 활동한 레오나르도의 노력과 천재성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그가 읽은 책에서 발췌한 글도 있고, 쓰려고 했던 글의 초고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문제의 발생 시, 그 분야의 권위자들 말과 글에 의존하여 해결하기보다는 스스로 실험을 해보는 것을 좋아했다. 30구가 넘은 시체를 해부하여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도 하였으며, 조류와 곤충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동/ 식물의 구조와 같은 연구도 마찬가지 이였을 것이다, 거기에 그는 공학에도 관심을 두었는데, 이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물체의 기구와 공성무기와 같은 것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공학연구의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당시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 서로 다투어 레오나르도를 초빙하여, 자기 밑에 두려고 하였다.
물론 그의 노트에는 그것을 온존한 자기만의 비밀유지를 위해, 거울문자(좌/우로 뒤집은 문자)도 쓰기도 하고, 여러 나라의 글을 혼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연에 대한 탐구는 그의 미술에 필요한 가시적이고 생산적인 지식의 도태가 되었음을 물론이다.
정식으로 회가로의 등록은 1472년경에 했지만, 그는 아직 스승 베로키오 밑에서 고용된 수석회가로 일한 것 같다. 그는 베로키오의 1472-75년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그림의 왼편에 있는 한명의 천사상을 그려 넣는데, 이를 본 스승인 베로키오가 놀라며, 다시는 회화에는 손을 때고, 조각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그가 그린 천사얼굴의 세밀한 묘사와 그 아름다움은 이 작품의 그림에서 인물상 중 가장 뛰어난 인물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머문 시절에 나온, 또 다른 그의 초기작인 『수태고지 (1472년경) 』을 완성시킨다. 본시 이 작품의 그림은 피렌체 근교인 몬테오리베토의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지금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으며, 또 하나 같은 소재로 그린 크기만 다른, 파리에 있는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1480년경 그린 수태고지(파리의 것은 우피치의 그것보다 화면크기나 그림규모가 작다,)의 전작으로 보는 작품이다. 아마 후대의 것은 후대에 같은 소재 주문을 받아서,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며 그린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한때는 베로키오 밑에서 함께 공부한 로렌초 디 크레디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으나, 현재는 레오나드로의 제작이 틀림없는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이는 화면의 원근처리(遠近處理), 붓놀림, 적갈색을 주조(主調)로 하는 색체의 조화 등으로 미루어 분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다는 판단이 내려져 있다.
또한 화면 전체를 레오나르도의 필지로 보는 문제는 2차대전이전만 해도 그를 의문시하는 이도 있었지만, 현재는 화면 전체를 레오나르도로 귀착시키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다.
하늘에서 내려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聖靈)에 의해 아기(예수그리스도)를 베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천사의 모습은 그 직전까지의 움직임에서 정지 상태로 옮겨간 상태로 막 날개를 접고 있는 시점을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그림에서 오른쪽의 어깨에 맨 리본이 공기(바람)의 동요로 나부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날개의 미세한 움직임을 표현한 시각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조류)를 유심히 관찰하여, 기록한 노트의 드로잉에서 나온 것임으로, 그의 (비밀)노트에서 그림의 형태까지 의존하였던 점은 그의 뛰어난 관찰력에 시사한 바는 크다.
이와 비하면 마리아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딱딱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성모의 옷에 나타나 보이는 옷 주름의 드로잉은, 실제 의복을 입은 것을 관찰한 것이 분명하다.
15C에 있어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방식은 혁신적인 전진이었다. 대부분 회가의 상상력이나, 그림솜씨에 의존하였던 옷의주름과 같은 그림이 이제 관찰하여 기록한 드로밍에 의한 체계적인 그리고 그 완성도가 높은 것을 차용하는 것을 작품의 토대로 삼았다.
이 그림의 표현은 사실주의에 대한 그의 열정과 자연의 외관에 대한 지적인 관찰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이후.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각과 특성들은 이를 주된 특성으로 삼고 있다.
또한 그는 초기에 늘 새로운 유채기법과 같은 회화기법 등을 사용하여, 실험 하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회화 작품 중 어려점이 손상된 것은 이와 같은 기법을 실험한 결과(실험용)이다.
그는 이후 1483년경 무렵에 밀라노로 떠날 때까지, 젊은 시절의 인생을 피렌체에서 머물며 보냈으며, 예술가로써 계속하여 예술작품을 창조해 나갔었는데, 그의 예술의 일생 기준으로 하자면, 이 시기를「레오나르도의 피렌체 예술 1기」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레오나르도의 예술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왕들의 경배』와 초상화인『지네브라 데 벤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왕들의 경배』 또는 『동방박사의 경배』라 부르는 이 작품의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초기 작품 중 대작으로 뽑힌다. 원래 1481년 피렌체의 근교에 있는 스코패토의 산 도나토 성당-수도원에서 의뢰한 작품으로 세로 246cm 가로 243cm로 비교적 큰 그림이며, 나무 목판 의 매끈하게 만든 패널 위에 그렸다.
1481년 이후로 대금지불이 중단된 기록을 말해주듯, 이 작품은 미완성된 작인데, 아마도 레오나르도가 1483년경 이미 밀라노에 정착되어 있는 사실로 봐서, 아마 1482년경 이후로 이 작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중단하고, 급하게 밀라노 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작품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세심한 갈색 밑층에서 나타난 자세한 인물 묘사와 그 풍부한 감성은 15C 후반부의 4/4분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대표작으로 꼽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이 작품의 전체 구도는 이 그림에서의 깊이를 효과적으로 연출하는 동시에 관람자의 시선을 화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인도하는 피라미드형 구도로 되어 있으며, 성모마리아와 아기인 예수그리스도의 성모자 군상을 중앙에 넣고 주변에 밀집한 군중을 묘사하는 문제와 성모자인 중앙의 중심인물이 압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해결하기위해 그림에서 보는 성모와 아기예수의 주된 처리와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차적인 처리는 미술거장다운 구성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어 있으나,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인물들의 갖가지 자세와 표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심오한 놀라움과 기쁨을 나타난다.
『왕들의 경배』의 작품은 주변의 인물군상에서 보듯, 레오나르도가 면밀히 관찰된 몸짓과 얼굴표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평온한 분위기의 중심 군상을 둘러싼 음영(陰影)효과, 그리고 그림 배경의- 황폐화된 건축물에 자리한 유령 같은 인물 사이들 사이로 뒤섞어 밀려드는 노인, 청년, 말, 기수 등에서 환상적인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의 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르네상스 미술의 원류를 인식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그러하다. 마사초의 ⌜파사 성모 Pisa Madonna⌟나 ⌜성 삼위일체⌟등과 같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의 모든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피렌체 미술, 더 나아가 이탈리아 미술 아니 유럽 미술이 궁극적인 변화에 대한 결정짓는 진로가 이 작품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미완성의 작품이지만, 주제와 무관한 세부적 요소가 본래 제기 되었던 형식적인 해결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이 (서양)미술사의 사건에서 또 하나 커다란 획을 짓게 되는 바다.
이 작품 그림은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근 이 작품의 지지대인 나무패널을 수복하려는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피렌체 수복연구소 지휘 하 한참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기관의 관계자 말로는 복구완료의 시점은 2015년말로 예정되어 있다.
「레오나르도의 피렌체 예술 1기」라고 표현된 시기의 레오나르도의 예술작품 중 대표작이자, 인물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 작품으로 내건다고 하면, 초상화인『지네브라 데 벤치』를 뽑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그림 속 주인공 여인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인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로 지네브라 데 벤치이다. 그녀는 1474년에 메디치가문의 측근이자, 정계에서 활약한 루이지 니콜리나와 결혼하여 출가하였는데,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었고, 시를 직접 지어 낼 정도로 교양 있는 여인으로 피렌체 전체뿐만 아니라, 로마교황청까지도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미모가 소문이 나있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지네브라의 초상을 그린 것은 문헌 기록에서 사실로 확인되지만, 그 그림이 이 작품의 그림인 것인지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화법이 그 당시 레오나르도가 그녀의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 시점인 1470년대 중엽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고, 이 그림에서 그녀의 뒤에 나오는 그림 화면의 배경이 된 침엽수인 노간주나무가지(ginepra)가 이탈리아어로 ginepràio(지네브로 : 덤풀, 노가주 나무의 덤불)로 불리었는데. 이 말이 토스카나의 지역 방언으로 여성을 뜻하는(명사인) ginevra (지네브라) 가 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이 작품 그림에 나오는 여성이 지네브라의 초상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는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지네브라 데 벤치의 창백한 얼굴은 명암법(明暗法)으로 어두운 색으로 표현된 배경의 침엽수의 앞에서 더 밝게 비친다. 이 그림의 배경을 자세히 표현 하자면, 지네브라의 머리 위쪽부터 뒷면은 화관처럼 노간주나무 가지로 하여금 드리워져 있다. 또한 노간주나무 가지와 이를 둘러싼 월계수와 종려나무 가지가 아름다운 화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작품의 그림 화면의 보존 상태는 좋아 보인다는 평이지만, 그림의 밑 부분이 20cm 가량 잘라나란 것으로 분석이 되고 있다. 잘라나간 아랫부분 그림에는 분명히 손이 묘사되어 있을 것인데, 후에 나올 『모나리자』를 예건하는 여성 반신상의 초상을 이미 전개한 것이다.
이 작품은 후대에 리히텐슈타인 공국(公國)이 대대로 물려 내려왔으나, 1967년 워싱턴 국립회화관이 약 5백5십만달러로 비밀리 입수하여 세계적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이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지배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 밑에서 일했는바 왜 피렌체를 떠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피렌체가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했고, 당시 피렌체의 예술은 “유럽의 진주”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극치로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예술과 무관하게 다른 일도 하고 싶어서 일까? 그가 보낸 서신내용이 들어있는 그의 비밀노트엔 군사기술전문가 능력을 주로 내세우고 있고, 말미엔 건축 및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회화에 관하여는 그 누구보다 더 잘 그릴 수 있다” 고 회가로서 경력은 빠진 체 간단히 적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실재로 서신에 담겨 보내졌는지는 그 외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1483년경 무렵에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있었음을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밀라노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되어, 1483년 4월에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장식할 제단화를 의뢰받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이 통칭 『암굴의 성모 Virgin of the Rocks』라고 부르는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암굴의 성모』, 혹은 『동굴의 성모』 라 부르는데, 그 배경이 약간 어두운 느낌이 드는 동굴 안이기 때문이다. 동굴(바위굴)안의 엄숙한 분위기에서 정중앙에 위치하는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합창하는 양으로 그러진 아기 요한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려 넣고, 그 아기 요한에게 축복을 내리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위로 왼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 뒤로 천사 가브리엘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성스러운 인물들은 중앙의 성모마리아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피라미드구조로 삼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 동굴의 밖 풍경이 보인다. 밝은 빛과 푸른 하늘아래 산봉우리들의 풍경들이 나타난다.
레오나르도는 피라미드구조로 삼각 형태틀 다시 택하여, 중앙의 성모마리아를 정점으로 삼고, 등장인물들의 안정적으로 배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물이 자리한 신비한 배경은 이 당시 기존의 (스푸마토)수법을 자신이 독자적으로 연구/ 개발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는 특유의 스푸마토의 기법을 써서 동굴안/ 밖의 비경의 자연 풍경을 그렸는데, 이는 성가족에 대한 무한한 여운을 남기고 있으며, 그림의 분위기가 환상적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모든 인물이 완벽한 배경 속에 녹아있고, 데생 또한 머리카락 한 올에서 옷 주름 처리까지 그의 과학적 사실주의를 철저히 반영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신비스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정신이 깃들어져, 동굴안이라는 그동안 회화에서 다투지 않았던 장면의 설정하게 된 이유다.
이것들을 종합해서. 이 작품 그림을 보는 포인트를 더 표현하자면, 현실의 육체속에 느끼며 살아가면서도, 그 육체를 지탱하고자 하는 불멸의 영혼(정신세계) 신비를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르네상스의 정신을 표현하고자했던 레오나르도 세계관이 이 작품을 통하여 예술로 승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겉보기에 똑같은 그림이 런던(네셔널 갤러리)과 파리(루브르)에 있다, 학자들은 어느 것이 레오나르도가 그린 작품 진작이냐는 놓고, 오랫동안 논쟁을 했었다. 15C 대부분 회가들에게 상당히 비슷한 두 점의 작품이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레오나르도는 완성작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동일한 2점을 그렸다는 게 의심스럽다.
이 작품에 관련된 문헌자료는 1483-1506년 사이에 나온 사료에 찾을 수 있는데, 대부분 한 점의 작품만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하듯, 영국 런던에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문헌자료의 발굴과 함께 작품을 자세히 들어다보는 최신 장비를 통한 연구, 레오나르도 작품만 취급한 전문가들을 연구 등에 의한 결과, 파리(루브르) 것이 원작이고, 나중에 런던 작품을 그렸다는 결론을 맺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하자면 레오나르도는 1483년 4월에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장식할 제단화를 의뢰받아 이 그림을 그렸는데, (완성단계에서) 주문자와 어떤 불화로 인해 성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가면서 이 그림도 가지고 가 프랑스왕실 소유가 되었다. 이것이 파리에 있는 루브르미술관(박물관)에 있는 것이고, 현재에 있는 런던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나중에 산 프란체스코 성당측(주문자측)과 화해를 하면서, 새로 같은 주제로 그렸다는 주장이다 이때는 레오나르도는 밑그림과 세밀한 주요 묘사등에만 주력했고, 나머지는 제자 한명에게 맡겨 대부분 그려내 1508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새로운 문헌자료로 판명되었다. 이 작품은 18C말경 밀라노의 성당에서 반출되어, 몇 과정을 거쳐, 1880년에 9천파운드로 런던 국립회화관(네셔널 갤러리)으로 들어갔다.
파리에 있는 것과 런던에 있는 것 작품 둘 다, 종교적 환영(歡迎)이 있는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엄숙함을 자해난다. 양자의 다른 요소라면 그림을 정말 자세히 본 사람일 것이다. 루브르에 있는 작품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천사 가브라엘이 오른손을 내밀어 어린 예수에 합창하고 있는 어린 요한을 가리키고 있는 데 반하여 런던 작품은 이를 생략하고 있다는 점, 루브르에 있는 이 작품의 소장품이 생략되어져 있는 두광(頭光)이 천사 가브라엘 제외한 인물들의 머리 뒤에 그려져 있다는 점, 루브르에 없는 아기요한이 어깨에 십자가를 메고 있다는 점 3가지이다,
런던작품을 그릴 당시에 머리에 있는 두광과 요한의 십자가는 그릴 때 추가해 넣고, 사람들이 관심이 없고, 그림에도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천사의 손가락은 뺀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의 밀라노 정착시기에 또 위대한 작품은 두말 할 것 없이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성당)에 있는 식당 한쪽면의 벽에 있는 벽화인 『최후의 만찬』이다.
사실 2차 대전인한 비행기 폭격으로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옛 모습으로 복원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성당)은 건축 자체만으로도 예술성이 높다. 건축양식자체와 내부, 장식 등도 독특함으로 중세고딕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양식을 잘 표현해주는 건축물이라 하겠다, 15C 후반에 세워진 건축물은 건축양식자체는 고딕 양식으로 안으로 들어가 보면 높은 아치를 자랑하고 있다. 정확히 1463년부터 기니포르테 솔라리(Guiniforte Solari) 가 도미니쿠스회의 원조를 받아 짓기 시작된 성당과 수도원 내부의 그 벽사이로 그려져 있는 많은 문양과 아름다운 벽화그림들은 그 당시 예술 작품들의 수준이 높은지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1469년에 일단 완공이 되었으나. 그 후 밀라노 지배자가 된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은 1463년에 이 수도원(성당)을 가족들의 묘지(가족예배당)으로 쓰기 위해 자신의 토지 일부를 도미니크 수도원에 기증하였고, 이어 자금을 들어 수도원(성당)의 확장을 하기 위해 건물 일부분인 사제관과 기존의 애프스 등을 철거하고, 건축가 브라만데에게 증축을 맡겼다. 브라만데는 성당을 구조적으로 확장하고, 대규모 애프스와 기둥으로 둘러싸인 북 형태의 돔을 세우는 한편, 이와 함께 식당, 회랑 등 내/외관을 중축한다.
이 진행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커다란 사각형 건물의 남북에는 반원형 벽감을 덧붙였으며, 위쪽에는 북통을 얹고, 그 위에 커다란 둥근 천장을 씌웠으며, 북통 바깥을 건축의 수평을 잡을 수 있는 콜로네이드로 에워쌌다. 그리고 이 커다란 사각형 동쪽에 잇대어 조금 작은 네모꼴 구조를 배치했다. 이 네모꼴 구조는 반원형 후진이 있는 성당의 성소가 되었다. 브라만테는 그 옆에 아치로 된 회랑을 설치했는데, 이 1층짜리 회랑은 건물 전체의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나아가 브라만테는 수도사들이 한꺼번에 모여 식사하는 대규모식당 개축 작업도 진행되어 현재 그곳이 한쪽면의 벽에 있는 레오나르도의 벽화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는 곳 이 되겠다.
고딕양식에서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 건축으로 발전해 가는 현장을 함께 볼 수 있는 건축물로 평가받는데. 이런 예시는 수도원(성당)내부에 있는 성소 옆의 브라만데가 만든 아치가 있는 (대)회랑과 솔라리의 (소)회랑이 이어져 있음으로 이를 서로 비교, 참고로 하면, 건축의 양식의 차이를 금방 찾을 수 있다.
다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작품 이야기로 돌아와서, 『최후의 만찬』 작품의 내면을 먼저 살피자. 성경 이야기 즉 신약 마태복음 26장 21-22절 내용이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의 작품 주 내용으로 삼고 있는바, 예수그리스도가 말하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 뒤에 나오는 12명의사도들의 나오는 반응을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에서 포착하여 그림을 그렸다.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에 놀라 경악했으며, 이 순간 만찬분위기는 갑자기 웅성하기에 이르렀고, 잠시 후에 슬픔과 분노에 대한 인간의 감정을 나타난 것을 포착하였다. 그 뒤, 슬픈 사도들 모두가 “주여, 나 니이까?” 말하는 장면까지가 이 그림 장면에서 나오는 것들로 현장의 분위기와 사도들의 감정표현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레오나르도의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레오나르도의 이 장면의 그림은 앞서 나타난 중세 및 조토 이후의 『최후의 만찬』주제의 작품과는 인물의 배치도나 표정 등에서 보이는 것부터 매우 다른 요소가 들어있다.
중세 및 조토이후 동시대인조차 그려왔던 기존의 『최후의 만찬』들은 단순히 중심인물(예수 그리스도) 양옆으로 강건한 표정을 한 11명의 사도를 나란히 배치하고, 표정이 다른 유다만 따로 식탁 맞은편에 두는 식으로 그러왔던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작품 그림 안으로 들어와 보자. 이 작품은 (기존의 틀을 깨고) 처음으로 사도들의 군상이 대칭을 이룰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 미심쩍다는 듯 서로 돌아보는 세 명의 소그룹이 대조를 보이면서 균형을 이루고, 그리스도 말의 의미와 이로 인한 감정의 변화가 구성의 전반과 연결이 되는 바다.
또한 이러한 소그룹의 각자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은 각자 다른데, 이 말을 알아들은 사도는 격정의 감정을 쏟아내며, 어떤 사도는 놀라움으로 예수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며, 어떤 사도는 그들의 사랑과 죄가 없음을 호소하는 듯과 같고. 어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칭한 사람이 누구를 자칭하였는가를 심각하게 논의해 보는 것처럼 보이며, 또한 어떤 사도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방금 설명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예수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 여기서 요한 복음 13장에 나오는“(성미가 급한)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눈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예수 그리스도께) 어쭈어 보라. ” 대목이 추가되어 그림에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예수 그리스도 옆(우측)에 자리한 이가 요한이며, 그에게 다가온 성 베드로의 귓속말을 듣고 있으며, 베드로는 그의 자리에게 달러온 듯 심한 율동감을 느끼는 행동을 하며, 귓속말을 하고 있다. 속삭일 때 유다의 몸에 다은 듯 옆으로 미는 행동을 한다.
여기서 유다는 다른 사람과 분리 되지 않았지만, 고립되어 보인다. 죄 의식으로 인하여, 뒤로 물려나면서 그의 머리가 (돌린) 위치 때문에, 다른 인물과 달리 얼굴에 그늘이 지게 되었다. 그는 몸을 젖히며, 분노와 의심에 찬 모습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본다. 그의 모습은 이러한 갑작스런 소란 중에서도 조용히 앉아 있는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대조된다.
이 작품의 그림 구도(성)에는 (예수의 말이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든 것에 불구하고) 그림에는 혼란이 없다, 12명의 사도들은 각자 제스처와 움직임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는 3명의 사람씩 4개 무리로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고, 그 변화과정에 질서가 있다.
어떻게 본다면 레오나르도의 구성은 사실성과 도식화에 대한 결합차원에서 다른 선배격 대가들이나 동시대 살았던 예술가들과는 다른 차원을 갖는다고 본다. 그는 이전의 회화에서 보여주는 그토록 집착하였던 사실적묘사와 구성의 도식화에 대한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는 윤곽을 만족하기 위해 소묘의 정확성이나, 정밀한 관찰을 희생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도식화의 구성적 문제에 벗어나 인간의 행위와 반응에 대한 자유로운 예술(미술)을 우선시하는 그의 통찰력은 역시 대가로운 반응이었다.
이 모든 그의 생각은 미술가를 단순히 그림이나 조각을 하는 노동자(또는 평범한 장인)가 아니라, 사색적 철학을 갖춘 창조적 인간으로 보는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당시엔 이해하기 힘든 사고들이어서 물론 받아들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작품을 빨리 완성하자고 재촉하는 부수도원장을 향해 유다의 얼굴로의 모델제안의 이야기는 어쩌면 동시대인과 레오나르도가 보는 작품과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나온 비롯된 것들이었다.
지금은 그동안 오랫동안 방치된 보존 상태로 인해 퇴색하여 진 색감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작품이 이 수도원의 식당가에 배치된 채 처음 공개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물론, 아마 부수도원장의 눈에도 경의로운 시각들로 꽉 차지 않았을지...... 더구나 식탁에 있는 접시나 의상의 주름등이 모든 세부가 실감나게 묘사된 것을 보고 놀라움에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들러주는 레오나르도의 성경이야기들의 묘사방식에서 또 다른 경탄의 목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밀라노 정착시기에 밀라노 궁정회가로써도 일했는데, 밀라노를 통치하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연인이자, 정부(애첩)이었던,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화으로 추정되는 『담비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의 초상』을 그렸다. 여기서 그녀가 안고 있는 동물(흰담비)은 실제의 야생에서 나온 족제비가 아닌, 가정에서도 키우기에 적합하도록 개량종인 패럿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 체칠리아 갈레라니(Cecilia Gallerani)이다. 그녀는 재능과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그녀의 나이 17세경에 이 궁정에 들어와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의 연인 (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문예방면에서도 뛰어나 음악을 연주했고 시도 썼다고 알려진다.
레오나르도는 당시의 밀라노 지배자 루도비코 공작의 후원을 기대하며 밀라노 정착시기(1483-1499년경)에 이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의 그림 『담비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의 초상』은 초기 초상화인『지네브라 데 벤치(1476년경)』와 이 작품 이후인 『모나리자(1502년경)』와 연관 지어 레오나르도의 (여성)초상화 양식의 발전상 이해를 알려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지네브라 데 벤치』는 레오나르도의 초상화양식의 어떻게 전개 시켰는지 보여주는 작품이고, 『모나리자』는 그가 이를 지속적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왔는지 그의 초상화의 양식 완성으로 잘 나타난다고 하면, 이 작품의 그림은 그의 초상화 양식발전의 중간 단계로 (발전의) 실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임이 틀림없다는 평가를 내린다.
세 점 모두 얼굴표정이나 자세에서 보여주는 인물의 개성, 생각, 감정을 드러내고자 한 레오나르도의 관심사를 입증한다. 그 예로 『지네브라 데 벤치』에서 드러나는 지네브라 그녀의 기민한 성격은 단호한 턱과 꼭 다문 입술로 나타내었다.
그녀가 안고 있는 담비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이 중 진정으로 받아 드려지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루도비코의 별칭이자, 그의 문장에 등장하는 동물인 에르멜리 노(ermellino : 담비)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그는 가문문장을 본떠 1488년 흰 족제비(담비) 기사단을 창설하기 했다. 이런 것은 『지네브라 데 벤치』에서 뒷 배경으로 나타나는 노간주나무가지(ginepra)를 상징하는 의미와 같은 배경이다.
이 작품의 그림 속에 있는 체칠리아의 모습은 그늘진 곳에서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며 화면 밖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자세의 역동성을 부여하고, 감상자의 흥미를 증폭시킨다.
그러는 한편 그녀의 입가와 눈가에 음영을 넣어 부드러움이 강조되었고, 이에 따라 그녀의 미소가 부각되어 보이도록 만든다. 이런 것은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 『암굴의 성모』에서 마리아와 천사의 얼굴에서도 그녀와 유사한 이러한 미모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는 반대로 그녀가 안고 있는 담비의 붉은(갈색) 눈과 날렵한 용모는 다소 불편한 그녀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안고 있는 담비를 놓칠까봐 한) 그 불안감은 집게발처럼 구부러진 그녀의 오른쪽 손가락에 의해 고조되며, 이는 담비가 들어 올린 왼쪽의 발톱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녀의 손가락의 불안정한 동작은, 레오나르도의 해부학적 드로잉 능력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루도비코 家 상황과 맞물려서 그녀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나는 표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사랑의 감정과 달리,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했고, 그녀는 그해 사생아를 낳았던 역사적 사실에서 드러나듯, 이러 위치에서 정비가 아닌 연인으로써 위치에 불안감이 남아있는 듯하다. 말없이 동작과 몸짓의 표현만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 작품의 작용은 이 그림의 여인의 상태를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것에 해석은 결국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판단을 맡겨진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정착시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해부학적 드로잉능력을 키워갔으며, 또 빛의 작용을 연구했다. 그는 그늘진 곳에 빛이 비칠 때,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효과를 그림에 반영하기 위해 윤곽선을 흐릿하게 나타나고, 색조를 하여금 얕게 여러 번 칠하는 수단 등을 써. 입체감을 나타나는 스푸마토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암시적인 묘사는 인간에 대한 표현까지 확장되어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 하여금 스스로 그림을 느끼게 하는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어, 각자 해석을 하는 바 다르게 된다. 즉, 감상자를 하여금 해석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이 그토록 매혹적으로 불가사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그림에서 보이듯 아랫 소매 부분을 윤곽선을 흘린 듯 한 느낌을 주고, 어둡게 표현하는 빛을 미묘한 혼합된 색체로 나타났다.
더욱이 세심한 관찰의 요소가 (그의 작품 특성에 대한) 더한다. 이 작품의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구부린 손가락도 그렇지만 얼굴 양면을 살피고 있자면, 양면이 좀 다르다는 걸 누낄 수 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면, 체칠리아의 왼쪽 눈이 오른쪽 눈보다 작고, 왼쪽 입가는 약간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언가 있는 듯 시선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그렸다.
그녀의 왼편은 확실하게 드러나 있는 반면, 오른쪽은 음영에 싸여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처리하는 음영을 처리하는 회화 색조의 변화로 입체감을 강조하고 아랫부분의 손가락과 소매 부분은 각자 (관찰에 의한) 세밀한 처리와 스푸마토의 윤곽선을 흐릿하게 표현하고. 미묘한 색조 처리로 완성되어 있다.
헤이그와 파리 등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그림을 1711년경에 (1712년 1차 삼국분할하여 러시아령에 속하는) 현재 폴란드 크라쿠프지역에 살던 차르토르스키 가문이 구입했는데, 이때 이 작품도 들어 있던 것으로 안다. 18C중엽 무렵에부터 차르토르스키 가문이 레오나르도의 이 작품의 그림을 포함한 어려 작품을 크라쿠프에서 전시되었는데. 이것이 차르토리스키 미술관의 시초가 된다. 이 그림은 그 후 120년 동안 크라쿠프에 소장되었으며, 이 도시를 떠난 것은 3번뿐이다. 세계1차 대전 때 안전을 위해, 차르토르스키공에 의해 드레스덴으로 옮겨진 바 있으며, 세계2차대전시는 나치에게 약탈되어진 바 있고, 1992년에 뉴욕에 전시된 적이 있다.
이 작품 그림은 후대의 정제되지 않는 어려 차례 복원작업에 의하여, 표면은 많이 문질러졌으며, 배경은 조정되지 않은 검은색으로 덧칠해졌고, 좌측 상단 구석은 깨진 뒤, 수리되었고, 모델의 머리 위에 있는 투명한 베일은 사치스러운 머리모양으로 바뀌었으며, 손가락들은 심하게 가필되는 등의 많은 손상을 입었음에도, 그나마 남아있는 몇 개 안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완성작이고, 그의 작품들 중에서는 양호한 상태의 작품에 속한다.
이후 1499년 프랑스 침공으로 밀라노가 함락되고, 스포르차 공 왕가가 무너지자, 레오나르도는 브라만데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 이후, 브라만데는 로마로 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설계를 관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의 일행과 헤어진 뒤,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거쳐 1500년경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는 그 이후 약 6년 동안 예술의 휴식기였으나, 밀라노 정착 때부터 몰두 했던 그의 해부학저서에 결과물을 넣기 위한 (해부학)연구는 계속되어, 그 결과물이 (비밀)노트에 담겨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의 해부학연구(해부 드로잉)은 단순히 회화에서 실험해 볼 자료로 관찰한 수준의 텍스트 정도가 아닌 의학적 기준에서 실제로 신체를 절단해 보았는데, 이중엔 자궁에 있는 태아를 그린 드로잉도 있었다. 또한 그가 창안하여 근육을 싸고 있는 부분을 제거하여 가능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묘사법도 그의 해부학의 성과이었다,
1508년경 피렌체 정부가 그에게 시청사 대회의실에 장식 할 작품을 그려달려고 한다.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와 함께 피렌체가 승리를 거둔 『앙가리아 전투』를 그에게 그려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승낙하였다.
그의 작품 『앙가리아 전투』는 전투의 잔흑성을 말해주듯, 말과 인간들이 격렬하게 뒤엉키어 싸우고 있는 전쟁자체의 열기를 재현한 장면을 그렸다. 이 그림은 그릴 때 밀라노에서 익힌 기법들이 선보였지만, 도중 그가 선택한 왁스매체가 녹아 흘려 내리는 등, 어려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 레오나르도는 이 작업을 1505년 무렵에 중단하고 말았으며, 레오나르도가 이 작품을 그린 벽이 현재 지워진 채, 그가 노트에 그린 드로잉 몇 점 혼적이 있을 뿐이다, 레오나르도의 이 작품에 그림에 대해 알 수 있는 바는 이러한 내용과 손상되기 이전에 그린 모사본이 몇 점 남아있어, 후대에 17C 루벤스 등이 복원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피렌체에 돌아온 후, 피렌체 제 2정착기동안에 그가 그린 작품 중에서 뛰어나고 유명한 작품은 피렌체의 어느 지배관리의 부인 초상화 『모나리자』가 있다. 『모나리자』는 사실 레오나르도의 작품 중 으뜸으로 평가받는 뛰어난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대중에게 알려진 인지도 또한 가장 높은 작품으로 알려진다.
이런 높은 인지도가,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반드시 좋다고 볼 수만 없는 것이 이를 이용하여 무분별하게 나타나는 TV 매체 등에 의한 광고 선전 등에서 나오는 왜곡된 이미지나 무문별한 복사품 등은, 실제 회가의 예술 작품을 보는 시각을 망가틀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대작을 볼 때는, 안다고 믿는 사실에 대한 것을 잠시 접어두고, 처음 보는 작품처럼 새롭게 구상하는 것을 인지하고 보는 것이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그림을 보게 되면 무엇보다 우리를 감탄하게 하는 것은 대가의 초상화답게 주인공 리자(부인)라는 인물이 매우 사실적으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림을 통해 그녀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듯, 마치 그림에 나타난 그녀는 관람하는 우리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보면 이 그림 앞에 한참 서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그녀의 영혼이 이 그림에 깃 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리자의 얼굴의 입가에 있는 신비스런 미소는 실재 미소를 지으며 웃는 것인지, 그렇지 않는 건지 알쏭달쏭하다. 또한 그 미소의 배경에 어떤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우리들 바라보는 것인지 아니면 멀리 있는 물체를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의 시선 또한 그녀의 모습이 신비롭게만 느껴질 뿐이다.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이 초상화를 제작하는 동안에 줄곧 가수나 연주자를 함께 데려와,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를 시키곤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신비한 미소나 눈가의 모습 등을 보아서 레오나르도는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틀림없다.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결합하는 문제에 그의 천재적인 기질을 나타나는 사고력은 이 그림에서 두각 되어 나온다. 물론 르네상스의 회화 기법에 있어, 당대의 회가들은 자연스러운 표현법, 어떤 대상에 대한 정확한 소묘와 배경의 자연 환경에 대한 조화로운 구성법 해결에 고민이 많이 하였는바, 레오나르도 이전의 회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정확한 묘사하는 세부는 세부대로, 인물표현을 중시하는 선은 선대로 나타나는 마치 과거 20C 영상만화 캐릭터처럼 나타나는 것이 특성이다. 그리고 작품의 그림 배경화면과 조화되지 않는 면이 상당수 있어 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오나르도는 윤곽선을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고, 형태를 그림자속에 사라지는 것과 같이 약간 희미하게 흘리는 상태로 유지하였다. 이런 효과는 색과 혼합하여 흐릿한 형태로, 마치 그림에서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 무언가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효과 이상의 효과를 남기게 된다. 이는 그가 밀라노 정착이전부터, 초상적 그림에 간간히 쓰였던 스푸마토의 기법을 밀라노의 정착기간에, 자신의 독창적 창안의 판단대로 개발하여 선보였는데, 이것이 효과적으로 가장 잘 표현되어 나타난 작품이 『모나리자』이었다.
이 작품의 그림에서 보이듯, 우리가 인물의 표정을 나타나는 두가지요소인 입 가장자리(입 꼬리)와 눈 가장자리(눈언저리)부분을 이 기법으로 나타나 표현하고 있다. 이에 보이는 효과는 그림에서 모나리자가 어떤 기분으로 또 우리를 보고 있는지 아님 그냥 먼 시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호함, 그 자체가 이 작품의 그림에서 나타난 치명적인 매력일 것이다. 각종의 설이 나오게 만든 연하게 칠하여 오래되어 퇴색하여 없어진 눈썹 부위가 사라진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랫부분의 리자의 손을 모델링 방법이나, 섬세하게 표현되어있는 옷의 주름을 묘사한 그림 방법은 자연의 요소를 끈질기게 관찰하는 레오나르도의 방식 없이는 표현하기는 힘든 요소들이다.
거기에『모나리자』의 뒷 배경으로, 화면 배경의 그림을 지평선과 가까워질수록, 색체의 진함이 절제된 대기원근법을 사용함으로써, 깊은 공간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이를 이 그림내부에서 자세히 표현하자면, 왼쪽의 지평선이 오른쪽에 있는 지평선보다 훨씬 낮은 곳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데, 색체의 변화가 이런 현상을 가져온다. 즉 색체가 연하게 칠함으로써, 깊은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눈의) 착시 현상을 이용하여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리자부인이 작품의 휴식차에 여행 도중에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성의 작품으로 알려져 더 유명하게 되었으며, 레오나르도의 말년에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살았는데, 이 작품도 함께 가져갔다. 그것이 현재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박물관에 있는 이유다. 허나 한번 20C 초반에 이 그림이 도둑을 맞아 이탈리아에 방문(?)한 사실이 있다. 그 후 이탈리아정부는 이 작품이 이탈리아에서 나온 유명한 작품인 이유로 이탈리아의 각지의 미술관에 천천히 전시되어 돈 다음에 반환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다. 어쩌든 지금 특별한 강화 유리로 만든 보관 장치 안에 모셔 있는(?) 모나리자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1510년경 작품을 그린 『성안나와 성모자』또한 이 시기에 만들어진 레오나르도의 걸작이다. 그림화면은 어머니인 성 안나의 무릎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몸을 굽혀 희생을 상징하는 어린양과 놀고 있는 아기 예수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려는 장면이다, 성 안나와 성모 마리아의 아직 아기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길은 훗날 무슨 일인가 예언하는 양 무척 애처롭고 안쓰럽다는 눈길을 주고 있다. 이 같이 그려진 성 안나와 성모의 얼굴상은 레오나르도가 도달한 신성한 여성미의 전형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중세 때부터 그려지고 있지만, 만년의 레오나르도는 이 주제의 장면에서 오랫동안 탐구해온 인간과 우주 그리고 자연의 정신성에서부터 생명의 (탄생에) 신비로움 까지 담은 화면을 실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밑의 부분을 뺀 나머지는 거의 완성 단계로 도달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림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으며, 횐/ 황/ 청/ 적색으로 한정된 색체의 미묘한 조화가 전체 화면의 성스럽고 신비스런 분위기를 충만 시킨다.
안개 낀 대기 속에 드러나는 아득히 먼 산의 설경(雪景)은 몬테로사에 등반한 적이 있는 레오나르도가 그때 감동을 이 화면에 살려 자연의 신비로움을 나타내었다.
프랑스의 밀라노 점령이 끝난 1512년경 그는 새로운 미술후원지인 로마로 관심을 돌렸다. 1513년 교황의 사촌인 줄리오 데 메디치의 요청으로 로마 바티칸에 머물렀으나, 그에게 그 후 약 4년간 로마생활은 유쾌하지 못했다. 그는 로마에서 어떤 작품도, 결과물도 남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쟁자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가 여기서 위대한 작품들의 선보이고 있을 때라, 심리적으로도 위축된 것 같아 초초했다고 한다.
그가 로마에서 머문 거의 마지막 시기 아니면 피렌체로 돌아온 직후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 『세례(자) 요한(1513-16년경)』 은 레오나르도 만년의 명작으로 뽑힌다. 배경을 암혹으로 설정되어져 있고, 그 속에서 신비의 미소를 머금은 세례 요한이 웃옷을 벗은 채로 있는 반신상이 마치 환영적 분위기를 연상시키며, 그 속에서 요한의 동작은 오른 손의 검지 손가락은 하늘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는 알 수 없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신비의 미소로 처리되어져 있는 요한의 입가는 마치 그가 그린 『모나리자』 및 『성모자와 성안나』 등에서 보이는 레오나르도의 특유의 그림 방식이 들어있다 하겠다, 여기서는 기존까지 신비의 미적요소 탐구가 집대성이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은 시각이다,
배경이 검게 처리된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무엇인지 또는 어두운 풍경을 그려 넣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마저 아니면 레오나르도 자신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이 검게 지워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작 연대는 1513년경부터 1516년경으로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는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의 일을 거의 포기하고, 해부학이나 지질학 등 과학적인 일에 몰두하였을 시기이다. 성 요한의 얼굴에는 어느 의미의 성적의미를 내포한 미소를 담고 있다.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며, 신적도 아니고, 동물적도 아닌 미소가 담겨있는 것은 교묘한 레오나르도 자신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상이 천사상에서 유래하는 것은 그 성격이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천사는 중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1476년경 동성애로 익명으로 고발당했고, 그 협의가 거의 사실로 드러난 바 있으며, 그 때문에 그의 신변이 위협을 받았던 그의 동성애적인 생각이 아마 이 작품을 통해 교묘한 위치에서 그린 그림에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세례(자) 요한』 모델이 제자였던 지아코모 카포티(일명 ‘살라이’) 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기록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자신은 특히 금발을 무척 좋아했으며, 그의 작품 곳곳에서 자연스러운 금발은 레오나르도의 이성향(또는 동성향)만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작품 곳곳에는 한올의 세필로 그려서, 너무나 섬세하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레오나르도가 임종 때까지 같이 옆을 지키는 몇 안 되는 제자이기도 했던. 그의 제자인 살라이는 『세례(자) 요한 』그림의 표현과 같은 치렁치렁한 금발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11년 1월 이탈리아 국립문화재감정위원회는 『모나리자』의 코와 입이 살라이를 모델로 그려진 『세례 요한』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공식 발표를 내놨다. 이것은 그동안 레오나르도가 그린 『모나리자』를 비롯한 그의 인물 초상화와 종교화에서 나온 이미지나 표현의 방식 및 세계관이 『세례요한』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더 보여주고, 이들을 종합/ 발달된 모습으로 나타냈음을 뜻한다.
이 작품은 한때 영국의 왕실 컬렉션에 들어간 적이 있었으며, 17세기경에 프랑스로 옮겨져 전해지다가, 태양왕 루이 14세 제위 시절에 현재 미술관으로 개관하는 루브르 궁전에 정착하였다,
1517년 이탈리아 미술가를 통해 명망을 높이려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의 제의를 받아들어 프랑스로 가서 귀빈으로 약 2년의 기간의 말년 생활을 지내다가 앙부아즈에서 머물던 중에 사망하였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1세는 그에게 있어 이상적인 후원자였고, 말년의 생활에 딱 좋은 환경을 제공하였다. 그는 회가에게 존경을 표할 수 알았고, 관대하였으며, 귀찮게 굴지도 않았고, 단지 위대한 이탈리아의 선각자를 볼 수 있다는 데 만족하였다. 그와는 대화는 그 자체 르네상스이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후계자나 라파엘로 등 동시대 미술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그가 머문 기간의 밀라노에서는 기존 학파들이 해체양상을 보이는 등 미술 양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탈리아 절정기 르네상스 미술 그중에서도 대규모의 회화를 구성하는 과정과 회화기법은 그로 인해 변하는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외형상을 흐릿하게 표현한 스푸마토의 기법은 그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유화기법은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15C 중반까지 선호하던 강한 외곽선에서 물려나, 이제 회가들은 그림자이용. 체계적인 강조법, 명암대조법 등 16C 완만한 화법을 이용하기에 이른다. 또한 그에 의해 생긴 종이에 드로잉하는 기법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이나 그림에 영향을 주었으며, 현대에 들어와 드로잉 예술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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