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6. 15C 후기고딕예술과 전/후반기 르네상스의 변모 (15C 피렌체모습과 미술기법 발전상황을 중심으로)
15C 초기에 일어난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의 예술가-화가들이 고대에서 착용된 과학/기술의 예술에 도입, 적용 및 이룩한 새로운 기예는 유럽전역의 미술계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다, 이것은 미술을 성경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표현을 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에 예술가와 후원자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다
미술에 있어서 이런 혁명적 요소들은 다시 인간의 탐구적인 능력을 예술가들에게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과를 얻기 위해선 실험과 탐구(정신)의 필요와 중요성에 대한 말이다. 15C 예술에 있어 이런 모험정신은 르네상스 정의인 중세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의 기조에 있어 단절이라는 부분에서 파급되는 영향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하고, 유의해야 할 점은 예술의 지속성(또는 연속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마찬가지로 역사에서도 단절의 의미는 다르기에 단어 사용의 적합/부적합을 떠나, 지속성(또는 연속성)의 요소를 항상 먼저 생각하는 시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15C경까지 유럽대륙 각지 예술의 수준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예술의 향유층이 왕실과 봉건 대영주, 그리고 가톨릭의 종교문화에 한정된 채 발전하였고, 이탈리아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 플랑도르 등지의 지도적인 거장들의 목적이 비슷했기에 14C말엽의 유럽 미술양식이 전부 <국제양식으로 말 할 수 있는 후기 고딕의 시대>라고 표현할 정도다. 이런 국제양식이 프랑스 동남부지역에서 시작되어 이탈리아로 넘어오게 되었는바, 이런 이탈리아의 국제양식 중 대표한 미술양식은 건축분야에서 잘 표현된다.
이탈리아 국제양식의 건축에 대표적인 예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주의 밀라노에 있는 밀라노 대성당으로 1386년 안토니오 다 살루초 대주교가 (이탈리아보다는) 당시 프랑스에서 보편적이었던 후기 고딕 양식인 라요낭(rayonnant)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다.
1389년 수석 엔지니어에 프랑스인 니콜라 드 보나방튀르(Nicolas de Bonaventure)가 임명되어 대성당에 강렬한 고딕 양식의 외관을 부여하였다. 10년 후에 다른 프랑스인 건축가인 장 미뇨(Jean Mignot)가 파리에서 초청되어 작업을 심사하고 개선하도록 하여, 돌을 전례 없는 높이에까지 들어 올리는 데에 새로운 기술들이 필요했던 석공들을 도울 수 있었다. 경과적으로 갈레아초의 엔지니어들이 건설 기계와 기술을 개선할 수 있도록 자극하였다.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어 잔 갈레아초가 1402년 사망할 무렵에는 대성당의 거의 절반이 완공되어 있었다.
보로메오와 펠레그리노는 대성당에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외관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대성당에 로마-이탈리아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당시의 옛 것처럼 보이는 고딕 양식 외관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아직 대부분 미완성이었으나, 펠레그리노는 기둥들과 오벨리스크들과 거대한 팀파눔이 있는 르네상스의 신 양식의 외관을 설계하였다. 펠레그리노의 설계안이 모습을 나타내었을 때는, 정면 부분의 설계 경기가 열려 12개 정도의 설계안이 제출되었다. 이 설계안은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실내 장식 작업은 계속되었다. 1575년에서 1585년 사이 사제관이 새롭게 개축되었고, 신랑(身廊) 안에 새로운 제대와 세례당이 덧붙여졌다. 주 제대를 향해 있는 목재로 된 성가대석은 1614년에 프란체스코 브람빌라가 지었다. 결국 보로메오는 1577년, 전체 건축물을 구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과 (많은 논쟁 끝에 1549년에 통합된)산타 테클라 성당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성당으로 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세 고딕(국제양식)식을 주창한 세공업자과 새로운 르네상스식으로 변경하자는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서로간 견제의 수단으로써) 알력을 비롯하여 미적요소의 주창을 통한 경쟁은 이 성당의 미적요소를 다양하게 하였는데, 결국에는 대부분 외부는 말기의 고딕양식으로 보이고 있고. 세부장식과 내부적 요소는 대부분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방안 식으로 꾸며져 절충안으로 나온다.
17세기 초에 밀라노 추기경인 페데리코 보로메오는 바로크의 건축가이었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리치니와 파비오 만고네에게 대성당의 새로운 외관의 기초를 놓도록 하였다. 다섯개의 입구와 두개의 중앙 창문의 건설을 포함한 이 작업은 163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649년에 새로 온 수석 건축가인 카를로 부치가 혁명적 시도를 도입하였는데, 이때 르네상스식으로 꾸며져 있는 약간의 외관을 처음의 고딕 양식으로 되돌려서, 이미 완성된 세부장식들은 거대한 고딕 벽기둥과 두개의 거대한 종탑 내부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제시된 필리포 유바라(1733)과 루이지 반비텔리(1745) 등이 제시한 다른 설계안들은 모두 실현되지 못하였다. 1682년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정면 부분이 철거되었고 대성당의 지붕 덮개가 완성되었다. 1762년 대성당의 주요 부분 중 하나인 108.5m의 마돈니나(Madonnina)의 첨탑이 세워졌다
1805년 5월 2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에 즉위할 무렵, 건물의 외관을 완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의욕적이었던 그는 프랑스의 회계 담당자가 건축 공방에 부동산을 지불하여 모든 비용을 부담할 것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것은 또 다른 지불의 문제가 생기더라도, 단기간(7년) 안에 대성당의 외관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새로 온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소아베는 이전의 부치의 계획안을 따라 신 고딕 양식의 세부 장식을 위쪽 창들에 덧붙였다. 사실 이런 벽면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한 모자이크화)는 이 성당의 미적요소의 주역으로 들어온 빛을 통하여, 밝은 색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육중한 건축물 무게를 지탱하는 벽면을 스테인글라스로 한 것은 건축공법의 역사상 혁명이자 고딕양식 건축의 절정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때 감사의 형상을 한 나폴레옹의 조각상이 한 첨탑의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이로써 약 500년에 걸친 건설의 현장이 대부분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대성당에서 이탈리아 국왕에 즉위하였다.
이후 나머지의 공사는 보강하는 부수적인 것들로 이후 몇 년간 세워지지 않은 아치들과 첨탑들이 건설되었다. 남쪽 벽에 있는 조각상 또한 완성되었으며, 1829년에서 1858년 사이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새 것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이는 미적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밀라노 대성당의 마지막 세부 장식 교체용으로 하는 공사 진행은 20세기에 비로써야 완성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완성된 출입구는 1965년 1월 6일에 열린 것이다. 이 출입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된 대성당 공사의 가장 마지막 작업으로 여겨진다. 대성당의 주 정면은 2003년에서 2009년 초까지 리노베이션 공사가 진행되어. 2009년 2월에 공사가 끝났다. 이로 하여금 칸돌리아(Candoglia) 대리석의 색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밀라노 대성당이 12C에 시작하여 근대시기까지 오랫동안 공사가 진행된 것은 원략 공사의 양적인 면에서 일손이 많이 들어가는 대규모인데다가,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과거 몇 차례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이 돌았으며, 무엇보다 이 지역이 특성상 지배자가 자주 바뀌었다. 밀라노의 지역이 동북부의 유럽과 이탈리아를 통하는 이탈리아 북부 내륙의 교통요지로인데다, 현재에도 그렇지만. 고대 로마의 전시기로 때부터 산업의 부가 집중되는 산업/무역의 내륙 중심지로 오랫동안 담당하고 있어서. 주변의 큰 세력들이 이 지역을 탐내 왔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에는 독일/오스트리아지방의 신성로마제국의 간섭과 침략을 종종 받았으며, 특히 본격적으로 이 지역이 르네상스 시대가 막 열리는 13세기 후반시기에도 신성로마제국의 2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을 받는 등 많은 고통을 따르는 어지러운 현장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의 간섭과 침공을 자주 받았으며, 근대이후에도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에서 있다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정복 시에 점령당하는 등 어려차례 반목되는 국제정치적 요인이 이 성당의 완공되는 시기를 늦추게 하는 하나의 걸림돌 으로 작용되었다. 또한 르네상스기-근대에 있어 다양하고 새로운 미술기법들의 시도는 더욱이 완성시기를 늦추는 마찰음으로 작용되었다.
프랑스지역에서 들어온 국제양식은 이탈리아의 국제양식은 건축에 집중되었지만, 이는 곧 르네상스의 새로운 미술양식에 밀려, 이탈리아의 지역에서만큼은 국제양식은 그 힘을 별로 발휘하기 못한 채로 다음세대의 미술양식으로 넘어갔기에 이것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미술의 차이, 상이성의 발생 원인으로 작용된다. 하지만 그 차이는 그리 크기 않았고, 중요하지 않다. 이것들은 미술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문과 정치세계에도 적용되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지배층이나 학자들은 대부분 당시 유럽의 공통어인 라틴어를 공식어로 사용하였고, 유럽의 어느 (중세)대학이건지 그 수준이 차이가 별로 없어, 어느 대학에 가르치던 별로 개의치 않았다. 또한 기사나 귀족 등의 상류층은 기사도 이상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고, 가톨릭의 기독교사상을 신봉하였다.
그러다 중세 말기에 주요항구나 교통중심지를 중점으로 상인들과 시민들로 구성된 도시가 형성되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사상의 싹이 그들의 필요에 의해 자생되어 들어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상인들과 시민들은 그 지역의 언어로 사용하였고, 태어난 도시를 중요시했다. 이들은 도시의 특권과 자치, 지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예로 들자면 이들은 오늘날 노동조합과 같은 (상인이나 장인)길드조직을 형성하여, 다른 세력이 그들에 이익을 침해하는 것을 막았다. 즉 그 도시의 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는 예술도 마찬가지여서, 예술품의 판매하는 것은 그 지역의 예술가길드(조각가길드, 회가길드등)나 장인길드(세공업자길드)에 속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예술가, 특히 미술작품을 취급하는 회가나 조각가들은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했다. 어느 (미술)작품이건지 하나는 자기의 최고 수준에서 기술면에서 완전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런 다음에야 자기의 공방을 열 수 있는 자격이 나왔고, 견습공이나 숙련공을 고용해서, 자기만의 예술작품을 판매하거나, 주문을 받을 수 있게 허가가 나게 되었다.
이처럼 어려가지의 새로운 사정들이 부각되면서, 유럽미술계에서 15C에 들어서 변화가 가져 온다. 미술이 지역간의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회파” 또는 “회화유파”적 특징이 나타나기에 이른다. 그런데 ‘회파‘라든가 ‘유파‘의 개념은 당시에는 없었고, 또한 오해를 불려 일으킬만한 소지가 아주 많은 단어이다. 당시에는 미술의 개념 자체가 오늘날처럼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다, 미술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한 것은 아마도 18C후반 인상파시기 쯤되야 독립적인 체계를 갖춘 근대 미술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본격화가 되었다. 다만 이것들을 출발점은 르네상스시대 미술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예술)학교는 당연히 없었다. 그러므로 회가되고자한다면 지역의 유명회가나 세공업자들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꾼노릇부터 해야 되는 비예정(?)적인 코스를 밟아야한다, 미술도구를 정비하고 그림 작업을 준비 하는 일부터 시작하면서 스승이 바쁠 때 기회를 주는 숙련공에 이르기에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이런 한 지역의 유명 예술가의 기술과 노하우등을 제자들에게 전수 하는 방법은 따라서 지역의 “회파”. 또는“유파”를 낳을 수 있는 지역만의 독창성(특수성) 계기의 설명하여 준다. 그래서 15C경의 그림이나 조각의 작품들은 작품의 특성으로써, 어디 것인지 대강 파악할 수 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4C경부터 그 수가 (급속하게)성장하는 미술을 하는 집단, 즉 아틀리에를 양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성장하도록 이끈 배경이 중세말기부터 시작된 도시 성장으로부터 나타난 초기 부르주아계급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내수공업의 배경으로 상공업과 무역의 발달은 초기 부르주와 계급의 자산을 증대하는데, 배경이 되었다.
초기 자본주의적 특성을 가진 집단은 어려가지형태로 나타나는 바, 대규모의 선박 주, 가내수업자 집단을 통솔하는 초기적 거상, 길드 공장의 상류계급,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기는 초기 은행업자등들이 중심이었다. 특히 초기 은행업은 고리대대부업자, 게토의 유대자금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도시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도시의 정치적 세력으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성공적인 대표적인 예가 피렌체의 메디치家 이었다. 또한 이들은 신분상의약점을 극복하고, 봉건영주나 유명귀족가문 등의 상류층을 모방하고자, 약간의 허영심의 발호로 예술을 중흥하기에 시작하였다. 이때 대부분 신흥도시의 초장기 정치세력은 정치적 연합과 유력 가문들 간의 결혼동맹 등으로 스스로 변용된 민주제의 비정상적인 권력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마치 고대의 그리스 아테네 등에서 나타나는 도시국가의 과두제 및 독제정이 나타나는 과정과 흡사했다. 결국 소수의 부유한 가계가 절대적으로 상원(Senaie), 대협의회(The Grand Couneil) 의석을 차지하였고, 총독이나 또는 종신의장(a Ilfe president)등의 권력핵심층을 에 대한 선출권을 장악했다.
14-15C 이탈리아 도시국가중 피렌체는 점차 메디치家에 의해 권력독점이 되어갔으며, 베네치아는 소수집안들의 연합체인 과두제를 정치체계로 삼았다.
14C이후 경제적으로 피샤. 제노바. 뤼크, 시에나를 약화시켜, 전쟁 또는 흡수 합병을 통하여 이탈리아 중부지방에서 제1도시로 떠오르며, 르네상스의 지적 중심지가 된 피렌체에서는 1434년부터 사실상 코사모 데 메디치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예술의 중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메디치家는 피렌체의 오래된 모직(毛織)업을 통한 기업의 계승자로 코사모의 부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노력으로 교황청등 각국 주요 도시에 은행업으로 진출, 성장하게 되는 바, 정치적으로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는 시기는 코시모 데 메디치에 의해서다.
코사모 데 메디치는 정식으로 직위를 얻지 못하였지만, 분쟁을 원하지 않는 인민들의 지지로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다른 정치적 세력들의 연합에 의해 한 차례의 추방하게 되었지만, 코사모 데 메디치는 인민의 절대적 지지와 정치적 상황을 잘 파악하고, 교황청등 외부압력을 통하여 1434년에 다시 돌아와, (그의) 위상을 새로이 정립하고 확고한 정치적 세습제로 올라갔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자비를 들어서 1439년에 동방의 비잔틴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를 재결합을 위한 피렌체 공의회를 개체했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였다. 첫 번째는 종교적 입장의 차이와 정치적 갈등에 의한 11C 이후의 종교적 단절을 극복하는(데 노력한) 것이고, 두 번째는 피렌체의 실질적 영주가 누구인지 알리는 정치적 선전이었다. 사려 깊은 코시모는 실질적인 힘과 힘을 대결에서 힘의 권위를 상징하는 종교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피렌체 공의회 개체는 유럽 르네상스의 역사에 있어, 단순히 종교적 화합을 위한 사건이 아니다. 실상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정교간의 입장이 커서 신학적/ 제도적인 화합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주목한 이유는 피렌체 공의회 개체를 통한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피렌체 통하여, 이탈리아 아니 전체적으로 서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이것이 전성기 르네상스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15C후반에 밀어닥친 신플라톤주의 철학체계와 비잔틴에 남아있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형태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등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적 파도를 일으킨다.
피렌체를 방문하는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 예술가들에게 코시모는 충분한 우호적인 인상을 주었다, 고대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연구자(철학자)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줌으로 동/서 문화가 피렌체 중심으로 교류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계기의 위치는 빨리 찾아온다. 피렌체 공회의가 막을 내린 15년 후인 비잔틴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의 대공세에 의해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멸망함으로 동방교회에서 탈출한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대거 피렌체로 이주, 망명하였다.
더구나 코사모는 산 마르코 수도원을 재건축하고, 그에 따른 장식은 프라 안첼리코에게 전임도록 하였고, 우젤로의 작품에 출자하기도 하고, 수도원에서 수녀와의 관계를 맺는 등 말썽부려 쫓겨난 리피를 보호, 옹호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도록 독려 하는 등 예술가들에 보호와 예술의 중흥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입상, 그림, 금은세공품, 고대의 카메오 등을 수집하면서 자신의 컬렉션을 예술가들에게 개방하였다, 또한 그 당시 유명하지 않았던-신흥 미켈로 초에게 자신의 가문 이름을 딴 메디치 리카르디 저택을 짓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서양의 미술사, 특히 르네상스 미술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15C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술에 혁명적인 실험을 하였던 거장들과 유파들이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장소로 선택하려고 할 때 피렌체가 가지는 요소들은 절대적일 것이다. 그리고 건축의 브루넬레스키와 조각의 도나텔로, 회화의 마사초의 뒤에 잇는 다음 미술세대가 이들의 미술기법의 발견을 어떻게 해석하여 이용하였는지 또는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미술기법의 발전과 미술사 발전과정에서는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현실상에서 새로운 발견을 가지고 응용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미술작품세계에게 있어서 시장이 반응은 새로운 것보다 재래식으로 인습적인 익숙한 작품이 통하는 경우가 많아, 예술가들은 작품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 새로운 발견요소를 집어넣을지도 고민하였다. 대체로 이 시기는 새로운 방법과 재래식을 절충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건축의 경우,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브루니와 알베르티)가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계한 만토바에 있는 성 안드레아 대성당(1460년경완공)의 정면처럼 로마 개선문을 딴 건축물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의 생각과 같은 방향으로 로마유적의 유적의 원주, 박공, 처마장식(comicce)과 같은 고전적인 건축의 형식을 도입하려는 것을 계승하여 이어 받아 세운 건축물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런 양식은 대규모 건축물이야 가능하겠지만, 도시의 일상적인 건축물들을 로마신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실상 그렇게 짓는다 하더라도 문화와 생활상의 필요성이 완전 바뀐 시대에서, 그렇게 짓는다면 오히려 불편함을 초례하는 문제점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서 건축가들 고민을 가중을 시켰다.
그래서 그 두 개의 양식, 도시의 건축물과 브루넬레스키의 고전양식 건축의 형식을 절충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나온 결과의 건축물이 당시 피렌체 대상인이었던 루첼라아 家을 위한 대저택이다. 알베르티는 도시의 평범한 통상적인양식에 정면을 장식하는데 있어 고전적인 형식을 사용했다. 그는 이 건물을 원주 (또는 반원주)을 세우는 등의 건축 구조를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고전풍의 기둥을 암시하는 벽기둥(붙임기둥:pilaster)과 엔타블레이처(entablature)를 그물처럼 엮어서 건물 전체를 덮었다. 그리스의 건물 기둥의 3단계 변천과정을 잘 표현하던 로마의 콜로세움처럼 건물전면에 층마다 다른 양식이 존재한다. 1층에는 투스칸식(도리아식 기둥건축)의 오더, 2층에는 이오닉 오더, 3층에는 코리트식 오더로 된 필라스터들을 각각 배치시켜 각 층마다 다른 오더를 사용하여 분적시키는 고대 로마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건물의 위층으로 갈수록 가벼워진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많은 팔라초 건축의 규범이 된 알베르티 고유의 건축양식은 그 당시 건물들에 고전적 요소를 아카데믹하게 적용한 것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팔라초양식의 발전하여 후대의 고전시대의 모델을 본 딴 조소적인 부착기둥을 벽면에서 거의 돌출하지 않고 있는 얇은 필라스터로 변용시켜 정면에 필라스터를 부착하였으며, 최초의 유주(留住?)식으로서 발전하게 되는바 후대 근현대 건축의 규범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알베르티의 건축이 중세의 고딕 전통과 완전히 결별 한 것은 아니다. 루첼라아 집안의 대저택에서 보이는 창문틀의 형식들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보는 창문틀과 매우 유사한 점이 보이고 있는가 하면, 중세의 사각의 전통으로 된 도시건물인 주요관공서(시청등) 건물에 닮아있다.
그는 1475년경에 찬사와 함께 브루넬레스키에게 헌정된 『건축론』을 발표하였는데, 건축에 있어 신플라톤주의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고전적인 美적 기준을 제시한다. 알베르티는 그밖에도 페라라의 종탑과 산탄드레아 성당을 설계했다.
이런 현상들은 건축뿐만 아니라, 15C 중반에 들어가면서 조각이나 회화 등 다른 예술 작품들도 새로운 고안을 당시 오래된 전통에 맞게 조화시켜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즉 중세고딕과 근대적 양식 사이에 절충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조각의 경우 일찍 감시 중세의 고딕(풍) 양식에다, 새로운 고안(원근법)의 표현을 절충하여 조화로운 미를 나타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부조의 형식에 『천국의 문』 제작한 기베르티는 앞의 글에서 설명하였듯, 작품 중에 있는「요셉 이야기」에서도 희미하게 나타나는 원근법을 썼다. 이를 조화로운 절충한 방법이 자연스럽게 잘 표현한 것은 시에나 대성당의 세례당 세례반에 부조한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예수그리스도가 세례요한에게 (강가에서) 세례를 받는 성경의 기록을 한 폭의 그림을 부조 형식으로 나타난 것으로, 중세의 선구자들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 부조의 그림에서 중앙의 예수그리스도는 양쪽으로, 제자들과 세례요한을, 그리고 위로는 천사들과 비둘기가 펼쳐지는 창공의 하늘아래에서,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를 받고 있다. 제자들의 위치에서 위와 아래의 차이 그리고 위의 천사들과 비둘기 모습도 위아래에서 차이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이듯이 안 보이는 원근법은 부조라는 중세적 기법을 세련되게 만드는 원동력에서 15C 도나텔로 기법을 연상시킨다,
다만 도나텔로가 성경의 장면을 표현한 새롭고 극적인 방법이 그 전시대의 자랑거리였던 명료한 배치 방식을 뒤엎어 놓은 반면 기베르티는 보다 명료하고 절제하게 표현하고자 세심한 배려를 했다.
이는 더욱이 옷 주름과 각자 특징을 한 인물상에서 보이는 고딕 말기의 부조 양식과, 원근법이라는 넓은 시야의 새로운 기법의 완만하고 적절한 조화는, 기베르티의 부조의 한 특징으로 기존의 중세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적절한 작품임으로 설명이 된다.
마사초가 토대로 새로운 기법들을 완성시킨 회화부분은 조각과 건축과 다르게, 시간을 두고 이를 동시대 회가들에게 더디게 받아 들어갔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회화는 대부분이 프레스코의 기법으로 마사초의 새로운 기법이 적용하기엔 어려운데다가 회화 특성상 작품이라는 성질상으로 대중의 시야에 쉽게 띄어 당시의 익숙한 것을 찾는 주문자들과 작품을 직접 구매하려는 사람들을 요구도 생각해 봐야 한다.
도미니크회 수도원의 수사인 프라 안젤리코는 1440-50년경에 피렌체의 중심가에서 북서쪽으로 좀 떨어진 산 마르코 (성당)수도원에 그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 프레스코화의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1440년경 피렌체에서 대규모 공방을 연 그는 1440년대 초반에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산 마르코 (성당)수도원에 장식작업을 시작했다, 웅장한 제단화를 제작하였으며 개인과 공공의 장소에 각자 잘 어울리는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해, 미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하였다. 그는 분명 ‘실제’ 공간의 재현에 대한 혁신적 개념이나 인물에 대한 자연적인 접근과 같은 당시 피렌체 미술 기법 발달에 대하여 모든 지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다투는 주제가 과거의 비재현적인 양식이나 상징적인 양식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느껴지면 혁신적인 기법들을 무시하곤 하였다.
1920년대부터 산마르코 수도원은 프라 안젤리코 예술의 전당을 만들고자 그의 어려 작품을 수집하였고, 수도원 내부에 남아 있는 안젤리코 작품을 당시의 빛을 내고자 복원을 시도 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에 그의 대부분 작품들이 복원을 완료하여,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수도원의 사재관의 복도(방)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어려가지 작품 중 1440년 초반에 그린 『수태고지』가 예술학도가 아니더라도 눈에 띤다. 안젤리코가 그린 이 『수태고지』에서 나타나 보이듯, 원근법을 나타난 둥근 천장과 양측면의 기둥은 그가 완벽한 형태로 원근법을 이해하고 있고, 이를 나타나는데 아무런 어려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단지 “벽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은 효과는 이 작가의 주된 의도가 아니다. 이 그림에서 천사와 성처녀 마리아가 입은 옅은 분홍색의 옷을 봐도 화려하거나, 율동감과 근육질을 나타나는 것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시모네 마르티니의 직품처럼 정적인 분위기에서 단순한 그리고 차분하고 겸손하게 성화를 그렸다. 마사초의 최신 기법을 깊게 이해하고 있음에 불구하고, 일부러 보이지 않거나 살짝 보이고 있으며, 13C말 -14C 초반 조토를 따르는 일반 화풍의 그림처럼 중세적 기법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 이 그림과 안젤리코의 작품에서 보이는 하나의 시각이다.
산 마르코 수도원의 사재관에는 연결된 모두 44개의 방이 있다, 각방에는 각자 특색이 있는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가 벽면에 걸려 있다, 그 중에서 첫 번째 방의 『나를 만지지 말라.』를 비롯하여, 『희롱 당하시는 그리스도』등 안젤리코 프레스코화의 대표작이 유명하다. 이 작품들은 단순히 장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수도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명시하도록 해 심리적인 명상을 유도한다. 또한 대부분 작품이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아, 그림에서 주인공들이 공중에 한층 떠있는 느낌을 받는다.
산 마르코 수도원(의 박물관)내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인기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은 『최후의 심판』으로 공중의 중심 위에 있는 예수그리스도가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고, 좌우 양쪽으로 사도들과 성자 26인이 천상과 지상의 세계 사이에 최후의 심판의 광명을 지켜본다.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우측의 구멍으로 표현되는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잔인하고 참혹한 지옥의 형벌이 예고되는 사람들 가운데는 왕과 귀족, 사제, 귀부인, 심지어는 교황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그림으로 하여금 지옥의 끔직한 광명을 느껴본 가톨릭의 신념과 믿음을 최우선으로 살아갔던 중세-르네상스 인들로써는 죄 짖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 갈 듯싶다.
산 마르코 수도원(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원래자리인 계단 꼭대기에 위치하여 숙소가 있는 방으로 방문한 이들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그림 작품인 또 다른 작품인 『수태고지 1450년경』의 프레스코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서 생활했던 도미크회 수사들이 매일 같이 먼저 보게 되는 그림이었다. 이 프레스코화의 내용은 대부분 기존의 수태고지의 그림 내용이 그렇듯이,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마리아에게 나타나 신의 이름으로 아들을 낳을 것을 알려주는 내용들이지만. 이 작품은 이전 수태고지의 작품과는 형식의 내용이 다른 면이 있다.
우선 기존의 수태고지는 방안의 깊게 들어오고, 대천사 가브라엘이 마리아와 (동등한) 대화를 나누는 양으로 표시한다면, 이 수태고지의 그림은 뻥 뚤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치형으로 된 개방형의 건물로 바깥의 풍경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가브라엘이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마리아에게 다가와 신의 계시를 말하는 것이 보인다. 마리아 역시 다 알고 있다는 양으로 놀라는 기색 없이 겸손하게 손을 모이며 이를 수락한다. 이때 고개를 약간 숙인 마리아의 머리는 가브라엘의 머리와 거의 일직선으로 균형을 이룬다,
의자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의 위치는 이 그림에서 보이는 아치형의 건물의 제한된 공간에 있다. 그리고 기둥들로 하여금 분리되는 바, 세속에서 분리된 존재임에 나타나며. 그림에서의 틀을 형성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은 영적인 공간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주기에 사실성의 묘사에 기대치에 맞출 필요가 없기에 주변의 환경 사실성은 떨어진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후광이 가브라엘이 비추는 후광보다 크고 높게 표시되며, 또한 주변의 환경보다 성모 마리아의 비율이 크게 묘사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이 그림에서 그녀의 위치와 중요성이 강조되어 나타난다하겠다.
이런 구상을 한 수태고지는 안젤리코가 처음이며, 이후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후대 미술대가에게 계승되어. 15C 중후반- 16C 르네상스기에도 계속 출현되는 모방작이 나온다.
이 수도원(성당)의 중앙 제단화로 그려져 일부분인 프라 안젤리코의 대표적 명작인 『성자들과 함께한 성모자(성모와 아기예수)』그림은 19C에 시도된 무리한 복원 작업으로 인해 원작의 아름다움이 크게 훼손되었다. 중앙의 성모자는 가운데 높은 상석 앉아, 좌우로 많은 성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바닥에 있는 카펫을 이용한 원근법은 화면에서 넉넉한 공간의 창출하며, 여기에서 성자들 위치가 원근법으로 처리되어 (위로 갈수록 작게) 표현되어져 있다. 많은 성자들 뒤로는 사이프러스, 소나무 등의 울창한 숲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정사각형의 화면은 15C 이후에 회가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당시로서는 형식면에도 파격적인 선택임을 보이고 있음에 변화의 과도기에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프라 안젤리코는 좌대에 앉아 있는 성모 마리아 혹은 예수 아래에 다수의 성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포즈의 「성스러운 대화(sacra conversazione)」의 양식을 발전 하는데 주역으로 나온다. 이 양식은 기존의 성모자양식에 양쪽의 좌우로 퍼져있는 자연스러운 성자들의 모습까지 담아두는 것으로, 프라 안젤리코가 개발하여, 16C에 이르려 라파엘로와 타지아노가 완성했다. 현재 제단화의 이 그림은 우피치 미술관에 있으며, 제단화의 일부가 유럽의 미술관/ 박물관에 흩어져 버린 채로 남아있다.
그는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부원장직을 맡는 등 거기서 평생 일생을 열성적으로 일했지만. 한 때 그는 1446년 무렵에 교황의 부름을 받아 4년간 로마에서 머물며 바티칸 궁 니콜라우스 5세 예배당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때 그린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성 스테파누스와 성라우렌티누스의 생애를 그린 (1448-49) 의 연작으로써 『가난한 자들에게 교회의 보물들을 나누어 주는 성라우렌티누스』를 비롯한 작품들은 이 시기에 그가 그린 작품 중에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작품에 속한다. 산마르코 수도원에서 그린 작품보다 더 색감이 선명하고 생생히 인물들의 묘사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가 남긴 작품 속에 있는 건축물을 그린 그림에서 고대 로마의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도를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프라 안젤리코는 기존의 중세 고딕회화의 종교성을 유지하면서도, 마사초 등이 추구하였던 원근법등으로 나타나는 깊이 있는 공간의 해석을 수용하고, 새로운 양식을 개발하여, 새로운 르네상스 회화의 초석을 놓았다. 또한 그가 그린 성모마리아나 아기예수 상에서 보이는 단순하면서도 성스러우며 온화한 (미소로 맞이하는) 모습과 그러한 분위기의 표출은 그만이 가진 그림의 특성이다. 이는 후대에 라파엘로 등에 계승되었다. 따라서 ‘중세의 마지막 회가’ 라는 이미지는 탈피하여 15C 중후반의 피렌체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의 미술을 이끈 회가임을 재해석되어야 마땅하다.
프라 안젤리코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시대 예술가/ 회가들은 대단히도 원근법과 같은 최신기법을 어떻게 작품에 작용해야 될지, 이를 중세기법과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 낼지, 또 중세 프레스코로 그릴지 아님 네덜란드지역으로부터 전해진 새로운 기법인 유화 방식으로 그릴지, 패널은 벽화 또는 나무 패널이냐, 종이제지로 선택해야 할지, 선택의 다양성에 폭이 넓은 가운데서 선택기로에 썼다. 아직까지는 이탈리아지역에서 널빤지(두꺼운 종이) 형태인 종이제지가 그림회화의 재료로 보편화가 이루어지기 않은 시점이라, 대부분 무겁기는 하지만, 이동이 가능한 그리고 한 쪽의 면이 매끈하게 만든 나무 패널이 점차 인기가 있어왔다. 또한 프레스코화나 벽화는 마르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 등 작업상으로 오래 걸리고, 물감이 스며들면 수정이 불가능하여, 벽 자체를 글어 내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은 것도 한 몫 했다.
프라 안젤리코와 같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시대 회가 중 파올로 우첼로는 중세회가로도 평가를 받지도 하지만. 그의 작품의 성격은 그야말로 르네상스 개척자인 차원을 넘어선다 하겠다. 그가 작품을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한 1440-50년대의 그의 작품을 보면 공간의 재현 차원과 관련되어서, 피렌체 미술의 당시 최신기법을 대부분 수용하여 작품에 이용했다.
그의 대표작인 『산 로마노 전투』의 3부작은 삼면으로 구성된 것 중에 가장 중요하고 정면을 담고 있는 가운데 중앙패널은 현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왼쪽패널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그리고 오른쪽 패널은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각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을 처음으로 주문 한 사람은 피렌체의 명문가이었던 바르톨리나 살림베니 (Barrolinl Salimbeni) 이었으며, 우첼로는 이를 약 20년 걸쳐, 1450년경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처음에 바르톨리나家 개인 예배당(성당)에 전시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당시에도 작품의 구도와 관련하여 논쟁으로 유명한 작품으로 떠오르는 작품이어서 자산이 있는 구매자들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고 알려진다. 후에 바르톨리아 살림베니가 정적이었던 메디치 가문에 의해 추방되고 나선 한동안 바르톨리아 개인 창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건이 발생하였고, 나중에서야 메디치家 개인침실에서 발견이 되었다.
여문에 의하면 로렌초 데 메디치가 이 작품을 탐낸 가운데서 사람을 고용하여 훔쳐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작품이 메디치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르톨리아 살림베니의 후손들이 반환소송을 냈지만, 받아들어지기 않는다. 나중에 이 그림은 메디치가가 추방한 뒤에 3부작 가운데 2개가 뿔뿔이 흩어져 현재 런던과 파리에 소장되어 있으며, 가운데 중앙패널만이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우첼로가 나타난 『산 마르코 전투』 장면은 14C초 무렵 피렌체가 강성해지게 되자. 이웃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서로 연합하여 피렌체에 압박을 가하고, 북부인 밀라노 중심으로 한 연합군을 형성하여 쳐들어왔으나, 피렌체가 극적으로 이겨 시에나와 루카를 점령하게 된 1432년 6월에 있었던 전투이었다. 이후 피렌체는 한동안 메디치家에 의한 통치 받으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작품 그림을 보게 되면 알 수 있듯이 서로의 양측 군사들이 마치 중세의 마상 창 시합을 하는 양 서로 창을 맞대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의 장면을 착각을 한 나머지 16C에 기록한 우피치의 미술관 소장품 목록에서 이 그림을 「마상 창 시합의 장면」이라고 적어 기록되는 웃지 못할 사실적 기록이 남아져 있다.
나무판자의 안에 있는 캔버스 천의 좁은 공간은 연구하는 미술학자들이 말하기를 당시 우첼로가 그릴 당시의 공간의 그대로가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첼로가 그릴당시의 공간은 둥근모양의 반원형으로 된 공간이 나무판자 위에 더 있는데, 나중에 메디치가의 개인 공간으로 옮길 당시에 방에다 매달아 걸기 좋게 하기 위하여 반원형을 잘라냈다고 한다. 실제로 오늘날 컴퓨터 3차원 그래픽으로 (이 그림 위에) 둥근 반원형의 (하늘과 성을 그린) 모습을 추가 한 결과, 이 작품의 당시의 원근법 및 단축법이 잘 드러내 보인다는 결과가 낳았다.
아무튼 우첼로는 이와 같은 공간에 전투의 현장의 생생한 현장의 실재모습과 그 그림 자체에 혼란을 주기위한 목적으로 과감한 생략을 시도하고, 관점의 축소를 주저하지 않는 등 독창적인 요소를 많이 넣었다. 이 때문에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은 (중세)전투 현장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더구나 이 그림에서 부려져 있는 창의 모습과 이 그림 밑바닥에 죽은 병사의 모습과 넘어져 있는 말 등은 그가 원근법의 구현에 충실한 가운데서 단순화된 사실주의를 부여했음을 의미 또한 이 그림에서 사실적 재현에 시사 한 바 크다. 그가 이 그림에서 가장 크게 자부심을 느낀 것은 땅에 떨어져 죽은 전사자의 모습일 것이다. 그 인물을 단축법으로 묘사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적업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부러진 창 하나까지도 하나의 소실점에 향해 배치되어 있는 바, 우첼로는 원근법에 의해서, 그림속의 인물들이 입체감이 있고,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실감나는 무대를 구축하려고 했다.
우첼로가 얼마나 원근법의 구현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고 또한 그림 자체의 혼란과 움직임을 통한 사실적 재현이라는 그만이 가지는 미술적 가치는 일찍이 초기 작품에 해당하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의 회랑에 있는 『대홍수』 (1446~1449년경)에서 잘 나타난다. 원래는 프레스코화였지만, 후대에 캔버스로 옮겨진 작품이다.
현재 세밀한 복원 작업을 통해 그 당시 녹색 바탕의 단색 조화가 잘 드러난 이 그림은 단색조의 주요 효과 및 명암 처리법에 의해, 그 속의 사람들과 사물들이 회화에서 조각의 부조와 같은 효과를 나타난다. 이런 것은 조각적 형태를 중시하는 당대의 피렌체 미술의 경향에서 비롯되었지만, 또한 그가 알베르티의 『회화론』에서 단색조의 사용을 중시하려는 충고를 받아드린 결과로 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단색조의 사용은 그가 회화에서 표현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이 그림처럼 단색조의 사용은 곧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어져 갔다. 또한 알베르티는 회화에서의 풍부하고 다양한 세부를 강조한다. 이 그림을 보듯, 나타나는 주요사람들의 복잡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고, 다양한 반응에 세부를 가해, 그 느낌 그대로의 전달하는 데 얻도록 성공하였다. 회화에서의 감정을 나타나 보이고 있다.
우첼로의 작품들은 정확한 선묘 작업위에 격렬한 반응으로 보이는 감정을 나타나는데 노력하였으며. 또한 회화에 원근법과 단축법과 같은 당대의 최신 기법을 안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프라 필라포 리피 또한 15C중엽 무렵 (이탈리아 지역의) 르네상스 미술적 조류에서 빼먹을 수 없는 회가이다. 리피는 15세 정도에 어린 나이로 더 이상 그를 돌보아 줄 여력이 없는 고모의 손에 이끌러 1421년경에 피렌체의 가르멜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의 이전 생애 기록은 없지만, 이후 10년여년간 이 수도원의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걸 보아서, 청소년의 나이에 수도원의 교육을 받고, 수도사의 길을 연 것으로 추정되어 온다. 그가 가르델회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사의 교육을 받은 1420년대에는 가르델회 수도원의 브란카치 예배당에는 마사초가 작업 중이었음으로 아마도 그가 마사초의 유일한 제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증거는 1430년대 가르멜회 수도원인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그가 그린 프레스코화 일부는 마사초의 영향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를 자세히 말하자면 원근법과 인물에 대한 입체감을 나타나는 경향은 미사초의 작품에 대한 성격과 닮아 있다.
정식회가로 기록에 언급된 1430년대가 되자 그의 입지는 안정되어갔다, 이때 . 세인트 스피리트 성당의 바르바도리가(家)의 가족 예배당을 위한 『바르바도리 제단화』, 산 단부로조 성당의 『성모의 대관식』등 주요 작품들이 많이 제작하였다, 특히 『바르바도리 제단화』는 성스러운 대화 양식의 초기에 해당되는 것임으로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에 영향으로 나온 작임을 알려준다, 이 작품에서 (지켜보는) 상인들은 이전처럼 별도의 공간(패널)이 아닌 합의 통합된 공간 안의 성모자 주변에 함께 모여져 있다. 이런 것은 역사적으로 상인들의 계층이 지위가 상승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당시 선구적인 미술(가)들을 후원하는 계급층이 대다수가 상인집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후대에 성직에 쫓겨난 리피를 보호하고 그의 작품들을 후원하였던 메디치가(家) 역시 마찬가지이었다.
이 시기 리피는 성모자의 그림과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선보이었다, 1453년 무렵에 완성된 ⌜성안나의 생애와 성모자⌟가 그의 성모자의 양식에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어로 ‘둥근‘ 이라는 뜻을 가진 「룬도」라고 알려진 원형그림이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성모자를 「툰도」 형식으로 다툰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다.
이 툰도에서 리피는 성모자를 친근하고 가정적인 환경에 자리를 잡게 함으로써 관습에 벗어난다, 대게 성모자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를 다투는 그림을 그릴 때는 배경에 금박을 사용함으로 천국과 같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암시하곤 했고, 성모는 주로 화려하게 장식된 상석인 옥좌에 앉는다. 리피는 이 그림에서 성모를 조각의 새긴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여 과거 그림에서 본 사람들 속에 성모가 앉아 있던 옥좌를 떠오르게 한다.
이 그림에서 성모의 얼굴은 온화하고 상냥한 미소를 하고 있지만, 왠지 몰을 슬픈 예감을 든 표정을 하고 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미래가 예건하는 바다. 아기인 예수그리스도는 빨간 석류 알갱이를 손에 쥐고, 어머니 성모마리아를 향해 눈을 마주 보고 있다. 빨간 석류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절을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기예수는 석류 알갱이를 먹으려고 하는 듯 유치가 드러난 입을 벌리고, 장난스럽게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사랑스럽고,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기존의 성모자상이 영적인 면을 강조하며, 양식화된 그림에 비하여, 리피의 성모자상은 대게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 성모는 아름다고 예쁜 여성의 상을 지니고 있고, 아기(예수)는 귀엽고, 활기차다. 이런 유쾌한 분위기는 보통 아기가 하는 양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여기서도 성모의 치마 저리에 매달리고 있다, 리피는 인간적인 면을 강조한 덕분에 이 그림은 우리에게 더 큰 호소력을 갖는다.
이 그림에서 원근법에 대한 리피의 관심은 벽과 바닥의 기하학적인 바닥무늬에서 드러난다. 멀리 있을수록, 좁아지는 무늬는 깊이감과 입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다가온다. 또한 이를 이용하여 성모자와 성모마리아의 어머니의 안나 생애를 다툰 내용인 그림을 분리하는데 성공하였다.
1435년부터 약 2년간의 네덜란드의 남부지역을 한 차례 여행은 1440년대 그의 작품이 네덜란드의 장식적인 양식과 배경(풍경)으로 하는 그림 작품의 변화를 예고한다. 여기에 프라 안젤리코의 ‘성스러운 대화‘ 양식 영향도 받았다, 1450년대부터 리피는 숲을 배경으로 하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모」라는 주제의 연작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스켄들 때문인지 그의 후기작은 전기작보다 더 종교적이며 서정적인 성격이 짙은 작품이 나타는데 ‘탄생‘ 연작이 그것을 대변한다. 『성가족과 막달라 마리아, 성 히에로니무스, 성 힐라리오』작품의 그림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성모」라는 탄생 주제의 연작들의 첫 번째에 해당되며, ‘성스러운 대화‘ 양식을 확대시킨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확실히 색체라든가, (옷과 풍경 등)세부적 묘사, 전체 구성 등에서 네덜란드지역의 회화의 영향이 드러난다. 또한 원근법, 피리미드식 구도, 인물의 입체감부여 등에서 나타난 피렌체 미술기법도 씌었다.
이 작품의 구도를 자세히 살펴보자, 성가족은 앞쪽에 형성되어 피라미드의 하단을 형성한다. 한편 성인들(성 히에로니무스, 성 힐라리오)은 바위에 윤곽선을 따라 감상자의시선을 위에 천사들 무리로 인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각진 벽에 강조한 성모의 등선은 삼각형의 또 한면을 이룬다, 오른쪽은 성모자가, 왼쪽은 요셉과 성 히에로니무스, 성 힐라리오가 각각 작은 삼각형을 형성한다. 또한 요셉의 지팡이와 그 뒷면의 바위는 삼각형의 두변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삼각형(피라미드)의 안정적 형성구도는 삼림배경으로 한 어두운 배경에서 주요 인물 들이 잘 띄게 하는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감상자의 시선을 중심으로 모이는 효과가 있다.
필라포 리피의 회화(특히 후반부)에서 대게 닮은 인상을 하고 있는 여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것은 연인이었던 루크레차 뷰티를 모텔로 하고 있기에 그렇다. 특히 성모자의 그림에서 성모마리아의 모텔로 자주 등장한다. 이런 것은 대를 이어서 회가된 아들인 필리피노 리피의 작품에서도 자주 나온다.
그의 후반부의 대표작인 『성모자와 두 천사(1455-57년경)』에서 보듯 온화한 성모가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장난기가 있는 짓궂은 웃음을 지닌 아이(천사)가 아기 그리스도를 부축하는 매혹적인 그림으로 변모하는 양식의 변화가 리피의 작품의 발전상 기술하는데, 궁극적으로 다른 영감 원을 비롯한 시정을 전하기 위한 사실주의를 감미롭게 변주한 데서 오는 데서 비롯된다 하겠다. 이것은 ⌜탄생⌟연작에서 나온 새로운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
프라 필리포 리피의 작품은 조수였던 산보로 보티첼리에 의하여, 리피의 회화 기법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들은 후대의 라파엘로 등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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