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7. 15C 중엽이후 피렌체의 정치적 상황과 미술적 조류의 변화.
( 로렌초 데 메디치의 피렌체와 산드로 보티첼리의 미술적 변모를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피렌체를 다스렸던 1464년 7월 코사모 데 메디치가 죽었다. 이 뒤를 이은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1469년 2월 마상 창 대회를 개최하여, 자신의 후계자인 장남 로렌초를 서둘려 피렌체 사회에 소개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이 가문대대로 이어오는 병인 통풍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20살의 젊은 로렌초는 “새로운 시대는 곧 돌아온다.”라는 문구가 새긴 갑옷을 입고, 3000여명을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본대로 우승하면서, 피렌체사회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였다.
마상 창 대회가 끝나고 약 10개월 후에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자, 로렌초가 메디치가문의 수장이 된다. 또한 로렌초는 메디치가문의 지지하던 정치적 측근들 요청에 따라, 피렌체 정부의 막후 실력자가 되었다. 당시 피렌체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나이가 45세가 넘어야 했다. 따라서 이를 잠시 물러나 있어야 했고, 측근을 통해 다스리는 정치를 하였다.
이 무렵 로렌초는 로마에서 세도(世途)가 가장 높은 오르시니 가문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는 장차 그의 아들인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로 등극하는 데 출발점이 되었다. 사실 피렌체 상인 출신이었던 메디치家에서 교황을 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반니 데 메디치의 어머니가 로마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피렌체의 세도가(勢道家) 자리에 있던 귀족가문과 시민들은 이와 같은 결정에 많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무마하고자, 산타 크로제 광장에서 결혼 축하일겸해서 마상 창 대회를 개최한다. 이는 공개적으로 이번일이 피렌체를 위한 일임에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때 로렌초는 피렌체 귀족 출신인 여성 한명과 함께 말을 타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면서 그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갔다.
이때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없던, 로렌초를 대신한 사람들은, 할아버지 코사모가 설립한 플라톤 아카데미의 인문주의 학자들이었다. 15C중후반 로렌초의 피렌체에서는 로렌초의 후원으로 지어진 카스텔로 별장에서 인문 학자들간의 정기적인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마상 창 대회에서 로렌초는 갑옷에 새긴 “새로운 시대는 곧 돌아온다.”라는 문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꿈꾸던 이상 이었기에 그러했다. 이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문학작품과 고대 그리스의 (신)플라톤사상에서 나온 시대를 앞으로 미래를 이끌러 가야 할 사회의 모델로 삼았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동시에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설파해야 했다.
로렌초 시대에서 인문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인간의 원죄인 이브(화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예멘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신 앞에 죄인”이라는 기존의 가톨릭의 교리가 아닌 인간과 신의 관계를 거의 동일 혹은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보며, 또한 “인간도 하나님(신)처럼 될 수 있다.“ 라는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 헬레니즘 또는 휴머니즘)에 귀를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은 인문학자들이 그 전의 성직자들이 맡았던 역할을 넘겨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제 예술작품의 주제도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로마제국의 문화의 부활과 이교도로 여겨지던 그리스 신(화)들의 모습이 예술작품에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영광의 열매가 열리는 시기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로렌초의 집권초기는 위기와 도전의 연속이었다. 로렌초의 집권이 시작되기 몇 달 전 1478년 부활절 미사가 열리는 피렌체의 산티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파치 家의 음모”가 벌어진 것이다.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의 부상은 이를 견제하던 로마 교황이었던 식그투스 4세와 은행업을 놓고 경쟁하던 파치家가 손을 잡고 음모를 꾸며,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 로렌초는 동료의 도움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고 암살위기를 넘겼으나, 그의 동생 줄리아노는 즉사한다. 메디치의 가문을 후원을 받고 있는 인문주의학자 폴리치아노가 현장에 있어, 그를 위시한 어려 동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빠져 나왔다,
결국 로렌초의 암살 사건은 실패로 돌아가, 파치家의 음모에 가담하였던 협의자는 모두 공개 처형을 당하고, 이 사건의 배후세력이었던 파치 가문은 멸족을 당해 없어졌다. 로렌초는 동생의 이러한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았다. 교황의 사주를 받은 외부 세력의 암살기도를 물리침으로 오히려 메디치가문은 피렌체의 맹주로 실질적인 위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동생 줄리아노는 유복자를 남겼는데, 그 유복자가 성장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하여, 16세기 로마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게 되는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교수형을 당한 파치家의 음모에 가담하였던 협의자 등은 참혹한 모습으로 베키오 궁전의 창문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나중에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그림에 담겨 놓았다, 원래 이 그림은 보티첼리에게 암살자의 처형장면을 공식적으로 맡겼으나, 이 그림은 1494년 민중폭동으로 메디치 가문이 축출될 때, 유실되어 없어졌다.
이처럼 피치家의 음모가 실패하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나폴리 국왕 페란테(Ferrante 1423-94)를 부추겨서, 군사행동을 일으켜 피렌체에 대한 무력도발을 지시하였고, 이에 배가 아프게 피렌체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던 옆의 도시 국가인 시에나, 루카, 우르비노의 군대도 동원했다. 연합군의 강력한 군대가 피렌체 성벽을 둘러싸고, 공격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시대 특유의 공성전이 시작되기 직전이고, 피렌체의 시민들은 불안과 공황상태에 떨었다. 이때 로렌초는 위기를 빠진 피렌체를 구하고자, 측근만 데리고 거의 혈혈단신으로 나폴리 왕국으로 가, 적장인 페란데 국왕을 만나 담판을 짓게 되는 바, 이는 로렌초의 인생 중 이때가 아마 구사일생이자, 천우기회 일 것이다. 그의 대담한 행동으로 인한, 적장과의 담판은 성공하여 피렌체에 평화를 가지고 금의환향하자. 당시 피렌체의 시민들은 크게 감동 받았다. 이때부터 로렌초의 이름 앞에 “위대한 자” 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로렌초 데 메디치가 1469년부터 1492년까지 실질적으로 피렌체를 통치하게 되면서, 피렌체는 이 시기에 르네상스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다. 사실상 로렌초가 있었기에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고향이 될 수 있었고, 로렌초가 있었기에 르네상스 미술의 최고 거장인 미켈란젤로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대립하던 교황 식스투스 4세와 정치적으로 화해한 뒤, 로렌초는 피렌체의 미술거장들을 로마에 파견하여 시스티나 예배당의 내부 장식을 돕게 했다. 이 성당의 천장과 뒤 벽면은 나중에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화로 장식했지만, 건물 양쪽의 벽면의 프레스코화는 대부분 로렌초가 보낸 피렌체의 거장들이 완성했다. 이 중 페루치오의 『성 베드로에게 (교회의)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등이 유명한 대표작이다. 또한 보티첼리와 가를란다요가 그린 작품도 있다.
로렌초 데 메디치가 피렌체를 통치하는 동안, 메디치家의 저택과 후원, 별장은 르네상스 문화의 명실상부한 중심이 되었다. 신플라톤주의 사상가인 마르실리오 피치노, 폴리치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가 이끄는 (신 플라톤주의) 철학은 피렌체의 르네상스 정신이 되었고, 로렌초는 이들과 정책도 함께 논하며, 이를 정책에 대한 방향의 중심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카레치에 있는 메디치별장에서는 매년 11월 7일 플라톤의 생일에 맞추어서 플라톤의 ⌜향연⌟이 재현되는 등 새로운 사상을 펼칠 수 있는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어갔다.
이와 같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기에 새로운 미술의 부흥이 나올 수 있었다. 르네상스의 전 시기를 우리가 알려 진 바. 유럽 중세시대에는 종교인 카톨릭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회/문화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억압되어, 사회/문화의 내/외부로 표현되는 문예와 미술이 마음대로 작용되지 않아, 중세사회를 암혹의 시대로 표현되는 바 이기도 하다.
아무튼 로렌초의 피렌체 시기, 대표적인 미술가 한 사람을 꼽히라고 하면 산드로 보티첼리(1444/5-1510)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본명은 알렉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Alessandro di Mariano Fillipepi)이지만, 전당포 주인인 형 조반니에게서 따온 보티첼리(=작은 술통)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금속세공사 훈련을 받다가, 회가를 되기로 결심하고 필리 필라포 리피 공방에 들어갔다. 리피에게 그림에 대한 재료와 기법에 대한 기초교육을 전수 받았으며, 특히 리피의 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보티첼리의 첫 작품은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청사인 시뇨리아 (베키오) 궁을 위해 그린 4가지 기본 덕목중 하나인 “용기”를 다툰 그림이다. 이 그림은 (나머지 3가지 덕목을 그린) 피에로 폴리이우올로가 설정한 패턴에 따라 용기를 화려하게 장식된 왕좌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표현하였다, 이 그림에서 그녀가 입은 의상의 풍성한 주름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여 그녀의 자세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명성이 높아진 보티첼리는 곧 다양한 종류의 작업의 맡겨진다. 그 중에는 종교적인 제단화 도 있고 또 어느 귀족인 초상화도 있었지만, 메디치家를 위한 일도 맡아 하였는데.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마상 창 시합을 위한 장식도 그가 맡은 초기의 일 중 하나이다. 현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1470년경)』의 경우도 이 무렵에 그려진 작품이다. 델 라마라는 금융인이 당대 피렌체의 최고 권력자이었던 로렌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유명화가였던 보티첼리에게 동방박사의 일행 얼굴들을 메디치의 3부자의 얼굴로 묘사하도록 하였다. 가운데에 있는 예수의 발에 입 맞추는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인물이 코사모로 인물을 묘사하고. 그 옆 아래에 붉은 망토를 걸친 사람이 피에로, 그와 마주보는 사람이 형제인 조반니 이며, 조반니 옆에 검은 바탕에 붉은 줄무늬의 옷을 입은 이가 로렌초로 묘사했다 또한 이 그림은 직접 선물한 게 아니라, 예배당에 거는 방식으로 선물됐는데, “보다 많은 이들이 보게 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고려”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를 어떻게 보자면 이제 성스러운 종교화조차도 세속의 권력에 입 맞추는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이 시기에 피렌체는 Epifania(주의 공현일) 시기 때마다 거리에 동방박사의 행렬이 재현되는 등 이 그림의 주제로 하는 작품이 많은 수요가 있자, 보티첼리는 이 그림 주제로 하는 장면을 다르게 묘사하여 몇 개 더 제작한 것 같은데, 이 작품들은 현재 영국의 런던 내셔널 갤러리이나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등지에 퍼져 있다.
또한 로렌초의 암살 사건인 파치家의 음모에 가담하였던 협의자는 모두 공개 처형을 당하고 파치 가문은 멸족을 당해 없어진 바 있는 베키오궁의 처형장면을 그린 그림을 보티첼리에게 그리게 한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당시 그림은 1494년 민중폭동으로 메디치 가문이 축출될 때, 유실되어 없어지고, 후대에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이를 본떠서 다시 그러넣는다.
그 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부추긴 나폴리 국왕 페란테의 군사행동이었던 피렌체에 대한 무력도발을 막은 로렌초의 대담한 단독 담판에서 승리는 보티첼리의 마음에도 크게 감동을 받았고, 이를 보답하기 위해, 그의 승리를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이 바로『팔라스와 켄타우로스(1480년경)』이였다.
그리스 신화의 내용에서 보듯,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존재인 켄타우로스는 인간과 동물의 본성을 공유하나, 길러지지 않는 존재로 그 성질이 포악하며, 호색적이며, 야수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보 듯, 지혜와 전쟁의 신인 아테네가 순결한 처녀인 팔라스의 모습으로 켄타우로스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모습이다. 문명을 상징하는 건물의 방향으로 향하는 야만의 켄타우로스를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덩치로 자랑하는 켄타우로스보다 키가 더 크게 묘사된 아테네 여신은 무표정하지만, 단호하게 그를 제압하고 있고, 머리를 잡힌 켄타우로스는 체념한 듯 처진 입 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팔라스는 “위대한 자“를 상징하며, 팔라스의 옷에 메디치의 가문의 문장인 십중 다이아몬드를 그려 넣음으로써, 나폴리의 담판을 통해, 적을 물리친 그를 찬양하고 있다.
이 그림의 배경으로 바다로 향하는 작은 배를 그렸는데, 이 작은 배는 분명 “위대한 자“ 로렌초가 타고 간 피렌체를 떠나 파샤에서 나폴리로 갈 때 쓰인 배일 것이다.
로렌초의 피렌체가 그의 활약 덕에 위기를 넘기고, 새 시대 전성기를 맞이하자, 지지하는 측근들과와 인문학자들은 그의 저택 또는 카스텔로 별장의 벽면을 자신들의 새로운 시대를 표현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해 줄 것을 보티첼리에게 의뢰했다, 이로써 1476년경 나온 작품이 『봄의 우이(또는 프리마베라)』이다.
이 작품은 크기가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가 넘은 거대한 작품이고, 더 놀라운 것은 이 하나의 켄퍼스에 그려진 이 작품 속에 식물만 해도 500여 종류가 되며, 190종류의 꽃이 하나하나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세부터 르네상스기에 이 작품이 나오기 이르기에 전까지 예술작품의 주제로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미(美)의 여신인 비너스, 사랑의 신 큐비드, 꽃의 여신인 폴로라 등 9명의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묘사되어 있다. 인체의 완벽한 비율로 묘사된 신들의 모습과 섬세한 표정은 과거에서 현재 이르기에 어떤 작품에 비해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대 로마제국기 시인이자 문장가이었던 오비디우스(Publaus Ovidius Naso B.C 43- A.D 17)의 『로마의 축제들』 작품에서 오월제 장면이 어떻게 묘사가 되었는지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가 쓴 시 서두의 내용은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등장으로써 시작되며 이는 곧 이탈리아지방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의 계철이 바꿈을 의미한다. 제피로스의 등장은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오고 있음을 전초이었던 것이다. 이를 르네상스의 피렌체에 언급하자면서 로렌초의 등장은 어두운 과거(중세)의 시대가 지나고, 곧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상징을 뜻한다.
계속하여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요정인 클로리스를 겁탈하여 강제결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을 작품의 맨 오른쪽에 어두운 색을 띤 제피로스가 입에 가득히 서풍을 몰고 있고, 클로리스는 깜짝 놀라 도망쳤으나, 이는 곧 제피로스에게 잡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강제결혼 한 제피로스는 아내인 클로라스에게 사과하고, 마음을 돌리려고 꽃의 정원을 결혼선물로 준다. .그러자 요정 클로라스는 꽃의 여신 클로라로 변신한다. 그래서 화려하게 장식된 꽃무늬 차림으로 된 옷을 입은 여신 클로라가 만족한 듯 기뻐한 장면이 옆에 따라 나오는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이 작품에서, 나뭇잎들이 새로이 피는(데워지는) 봄이 오자, 계절을 관장하는 세 명의 여신 호라이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이 작품에서 보티첼리는 이 구절을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고 있는 세 명의 여신(三美神 삼미신)으로 묘사하여 표현하였다. 그리고 보티첼리는 이 작품의 바탕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찾아온 봄을 맞이하는 오월제가 열리는 광장을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숲속처럼 화려한 장식과 같이 꾸미었는데, 이 광장이 바로 “새로운 시대 피렌체의 모습”이고 또한 피렌체가 “꽃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계속하여 이어지는 장면은 오월제의 주인공이고, 풍요의 여신이자, 美의 여신인 비너스가 등장하게 되는 바이다. 오비디우스는 이 대목에서 비너스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연결시켜, 자기가 살고 있던 당대의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제국“을 새로운 시대로 찬양한다. 다시 말하자면 봄을 주관하는 여신 비너스를 등장시켜, 아우구스투스에게 새로운 과업을 완성할 함을 몰아주게 된다.
보티첼리는 이 대목을 중심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가운데 화면에 비너스를 등장시키고, 비너스가 좋아했다는, 노란색의 도금양의 열매를 맺은 나무를 비너스의 주변에 넣음으로써, 주인공을 돋보이고 있다. 중앙의 여신 비너스는 美를 상징하며, 美는 진리와 동일하므로 비너스의 그림을 보는 것은 아름다움(美)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바, 이를 동일 한 위치에서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고취시키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모티브의 영감원이 고대 철학 두고 있음으로 이 그림은 다양한 시각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존재한다.
비너스 위로는 사랑의 큐미드가 날아다니며 화살 한 개를 삼미신의 한 여신을 겨냥하고 있다. 삼미신의 옆에는 신의 전령인 메르쿠리우스가 있다. 메르쿠리우스의 얼굴은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던 헤르메스 트리스메가스투스의 형상이라고 알려진다. 이런 것들은 당시 피렌체에 유행하였던 신비사상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다
그리고 비너스 뒤에 보이는 월계수의 무성한 가지를 넣었는데, 이는 로마제국기에는 아우구스투스황제를 상징하며, 또한 이를 비유해 당시 피렌체의 로렌초를 상징하는 것으로 끌고 나옴으로써, 로렌초의 지지 세력인 당시 피렌체의 다수의 인문학자들의 “새로운 시대” 여는 사상이 이 작품에 들어있다.
정리하자면 보티첼리의 『봄의 우이(또는 프리마베라)』 작품은 오비디우스의 『로마의 축제들』 작품에서 오월제 장면을 회화로 나타난 것이다. 보티첼리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표면 안에서 몸을 흔들고, 춤읗 추며, 물결모양으로 무리를 지으며, 꽃과 나무, 풀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이로써 작품을 더 유연하고,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를 통하여 로마제국의 황금기 시작을 알리는 아우구스투스 집권기를 비유해, 당시 자신이 살던 피렌체의 로렌초의 시대를 이탈리아의 제 2의 황금기로 부활과 유지 목적을 바랬던 사람들(집권층)의 마음을 예술을 통해 상징하는 요소를 넣어서 만든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로렌초가 이끌던 피렌체의 황금기시대 정치적 상황들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로렌초는 교황 식스투스 4세와 정치적으로 화해한 다음에 그 답례의 표시로 기틀란디아오, 페루지노 등 피렌체의 미술거장들을 로마에 파견하여 시스티나 예배당의 내부 장식을 돕게 했다. 건물 안 양쪽 벽면에 펼쳐진 프레스코화 중 당시 34세 나이인 보티첼리 작품도 있다. 1481년부터 약 2여년 걸쳐, 종교적 색체가 들어가 있는 작품을 그렸는데, 구/신약 성경의 내용의 주제로 3개의 벽면을 장식된 『모세의 시련』, 『그리스도의 유혹과 나환자치료』, 『코라와 그 무리의 반역』이 그것이다.
스승 필리포 리피에게 배운 과학적 사실주의의 15C경 피렌체 회파 주류에서 나온 그림 특색이 담겨 있지만, 후대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지적하였듯이 그의 화법은 그림풍경에서 만큼은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특색 즉 전원의 분위기처럼 평화롭고 고즈넉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 나오는 데,『모세의 시련』의 풍경이 그러하다. 이는 이 그림의 인물들과 사건들의 전개에서 종교적 우울함을 미묘한 미적요소로 변조 시키는데, 역할을 맡고 있다.
이 그림의 주요 주제는 구약의 내용 중 출애굽기의 모세이야기의 내용의 3가지 장면을 함께 묘사한 작품이다. 이 그림의 화면 오른쪽 밑에 보면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며, 가운데 중앙 장면에는 미디안으로 물을 뜨러간 아드로의 딸들을 위해, 대신 물을 길러주는 모세가 등장하며, 왼쪽의 밑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집트를 떠나는 장연을 재현해 놓았다. 즉, 구약의 한 내용인 “모세의 청장년의 모습“을 이 그림을 통하여 알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그리스도의 유혹과 나환자치료』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악마에게 3번의 시험을 당하는 광경과 이와 중 나환자를 만나 고치는 장면이 기록된 신약의 내용들로 이루고 있다. 3번 시험 중 왼쪽 위 장면은 돌을 하여금 빵으로 변할 것을 요구받는 악마의 제안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임으로 물러가라는 예수의 담판이며. 가운데 중앙 위의 그림은 높은 신전에 올라가 떨어져 보라는 악마의 제안을 하나님의 힘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물리치는 예수 그리스도이었고, 오른쪽 위 장면은 악마가 이 세상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하고 있는 것을 물리치는 예수 그리스도가 팔을 올려 내리는 몸짓으로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다.
그리고 앞쪽의 중앙그림은 나환자이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적의 치료를 받아 깨끗이 나은 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또는 사제)에게 감사의 신성한 증표를 바치는 청년의 모습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중앙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가운데 나뭇단을 인 여인의 모습이다, 이는 1478년경의 작품인 『봄』의 우수어린 매혹적 여인상을 연상시키는 옷과 자태를 그대로 따온 것이 분명하다.
그림의 풍경 및 인물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 그리고 작품의 그림에 신비한 분위기의 표출은 주제의 내용은 종교적이지만, 보티첼리의 특유의 관능적인 정감이 깃든 작품이라고 평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코라와 그 무리의 반역』은 구약 중 만수기 16장의 한 구절에서 따온 그림인데, 모세가 반역하려고 한 코라, 다단, 아비람 및 그 일당을 향해, 하느님(야훼)에게 받은 지팡이로 휘둘려 신벌(神罰)을 내리는 장면이다. 오른쪽의 장면에는 하느님의 모독한자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신자들의 모습이 나타나있는데, 손에 돌을 쥔 성난 사나이들의 폭행태세를 제지하며, 나서는 인물이 보티첼리가 그린 자신의 자화상을 본 따 그렸다는 전해진다. 그리고 배경의 중앙의 개선문 형태인 건물은 로마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처럼 종교적인 성향인 작품들도 남겼지만, 그의 예술 모티브는 그리스신화를 비롯한 고대신화/ 전설에서 나온 것임으로 당시 사람들로써는 그의 예술이 보면 매우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러한 성향이 나타나는 대표작이 1487년경에 나온 보티첼리의 걸작중 하나인 『비너스의 탄생』이다. 로렌초의 사촌 동생인 로렌초 디 피에로 프란체스코 메디치가 주문한 작품으로 메디치家 별장이나, 개인 집안에 걸어 두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의 주제는 폴리치아노의 시 『라 지오스트라』 중에서 그리이스 화가 아펠레스의 잃어버린 명화를 노래하고 있는 대목을 취급했다고 말해지고 있으며, 아울러 보티첼리 자신도 그녀를 사랑했던, 젊은 나이로 죽은 당시 피렌체 제일가는 미인인 아름다운 시모네타를 생각하고 그렸다고 한다.
그리스신화에서 이 여신의 탄생의 비화는 특정의 민족 신화의 틀을 벗어나, 여성의 원형으로 서양에서 (고대시대의) 문학과 미술에서 폭넓게 다루어 졌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서사시 『오디세이아』, 『일리아스』에 의해 전해지는 비너스(아프로디테)의 비화는 제우스와 바다의 정령 디오네의 딸로 되어 있고, 또한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가 쓴 『신들의 계보』에서는 천공의 신 우라노스와 그의 아들 크로노스와의 싸움에서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즉,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의 음부 속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의 성기를 낫으로 잘라 바다에 던졌는데, 바다를 떠다니는 성기 주위에 하얀 거품(아프로스)이 모이고, 그 거품 속에서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으로 비너스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 작품의 그림에서 화면의 전개는, 지중해의 깨끗한 물거품에서 태어난 나체의 여신이 오른쪽에 있는 바람의 신에게 부드럽게 밀려져, 요정이 옷을 들고 기다리는 해안에까지 다다른 장면이다. 이 비너스의 자태는 아름다운 몸매를 자연의 것으로서 순진난만하게 자랑케 한 고대 그리스의 미의 여신 그것이 아니다. 이미 부끄러움을 알게 된 젊은 여성이 빨리 숨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살짝 보여 주려고 서 있는 듯, 한 자태이다.
진주같이 눈부신 살갗의 비너스의 나체를 형상화하는 미묘한 곡선은, 파도치는 금발의 머릿결 움직임과 찬란하게 조화돼 있고, 화면 전체는 시적(詩的)인 미의 분위기로 충만해 있다. 그녀의 목의 길이는 좀 길게 하고, 어께는 가파르게 내려오며, 왼쪽 팔과 어께의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되어 있는 등. 인체의 비율 사실성에 대한 포기는 오히려 그녀를 천성의 존재로 나타나기 위한 보티첼리의 의도였고, 그의 의도대로 이 그림에서 비너스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천상의 존재가 되었다.
이 작품의 그림 전체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화면의 중앙에 잎에서 설명한 바, ‘정숙한 비너스의 자세’로 취한 비너스가 자신의 지물(持物)인 조개위에 서서 해안으로 밀려온다. 좌측 위, 상단에 보이는 서풍의 신인 제피로스는 미풍을 불어 비너스를 밀어주며, 그의 부인인 클로리스(그리스의 꽃의 여신)를 안고 있다. 이들 주변에 비너스에게 바치는 순백의 장미가 흩날리고 있다. 우측에 플로라(로마의 꽃의 여신)가 비너스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플로라는 푸른 꽃 문양이 있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으며, 허리에 장미가지를 두르고, 목에는 비너스에게 바칠 사랑처럼 늘 푸른 상록수인 도금양으로 만든 화환을 걸고 있다. 그녀는 붉은 바탕에 흰 꽃의 문양이 있는 풍성한 망토를 들어, 나체 몸으로 그대로 들어오는 비너스를 감싸려 하고 있다. 조개에서 막 걸음을 내닫는 신체는, 서정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를 청조하고 있으며. 전체 구성은 아름답고, 잘 조화롭게 되어 있다.
각 인물은 명암을 통해 입체감과 실체감을 부여 받는다. 보티첼리는 세밀한 붓칠로 그라데이션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살 곁은 마치 대리석의 표면과 같이 매끈하다. 여기서 인물 옷의 색은 “ 알베르트의 원칙”에 따라 각자 다른 색으로 채색하였다. 붉은 망토를 둔 플로라는 흰옷, 클로리스는 녹색의 옷 을 그리고 제피로스는 푸른 색의 옷을 입고 있다.
이러한 것은 그가 알베르티의 (색상의 감정에 대한)원칙에 충실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알베르티의 주관에 의하면 녹색 또는 푸른색 옆에 칠해진 장미색은 ‘티 없는 아름다움’을, 흰색은 ‘생기와 우아함을 연출한다.
그리고 보티첼리는 수평선 가까이 할수록, 색조를 창백하게 하여 거리감을 나타난 ’대기 원근법’을 이 그림에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그림을 당시 피렌체의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던 우아한 궁정풍양식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또한 이 작품의 그림은 그의 선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마치 밑그림을 그리듯이 한 그의 선묘는 정확성을 중시하지 않으며, 율동감이 있는 선이 화면전체의 경쾌한 패턴을 연출하는데, 이로 하여금 선으로 인물의 개성을 잘 드러나게 한다.
그리하여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의 자세. 우아한 비례와 섬세한 윤곽선을 가지는 인물상의 모습을 드러나는데, 이는 이 작품 그림의 서정적이고. 육감적인 특성을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의 그림은 그리스의 신화 한 장면을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교한 신플라톤주의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당시 인문학자들은 기존의 가톨릭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반대하여, (신)플라톤주의를 내세워 이를 통합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그리스도교와 고전 신화를 양립하려고 노력하였고, 고전 신화에 내포된 지혜의 알레고리를 해독하여, 심오한 진리에 도달 하려고 하였다. 숨은 의미를 가장하는데 은유와 상징이 사용되었으며, 의도적인 은밀한 은폐 공간이 있어 왔다. 사실 이 작품의 그림을 비롯하여 고전 신화의 대상으로 그린 다른 작품들이 주요 위치한 (보관하고, 감상하는) 곳은 공공장소가 아니라, 사적 공간에 걸어 두기 위함이었다.
그럼으로 이와 같은 작품의 숨은 뜻을 제대로 파악한 이들은 당시 문화 사상계에 입문한 자들만 정확한 진위에 다가가 알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美의 여신」 비너스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맨 먼저 밀러의 『비너스』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떠올리게 된다. 『밀러의 비너스』는 고대 그리스시대의 조각이고, 『비너스의 탄생』 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피렌체의 전성기의 회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이 비너스의 “대명사”격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에까지 수많은 미술가들에 의해 많은 비너스의 작품이 지금도 계속 태어나고 있지만,「비너스의 탄생」은 그 명제가 시사하듯, 회화미술에서 비너스화의 효시처럼 인식되고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새로운 미의 기준이 그 후 서양미술사에 명제처럼 되어 이어진다 하겠다.
이 작품은 현재 보티첼리의 또 다른 명작인 『봄의 우의』와 함께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컬렉션이 소장된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보티첼리는 동일한 위치, 동일한 시대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영국의 런던국립 회화관에 있는 『비너스와 마르스』 와 같은 육감적이고, 곡선미를 자랑하며, 장식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을 계속 선보이며, 메디치 家의 입지를 내세울 만한 작품들을 계속 출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은 비교적 후기의 작품인 『석류의 성모 (1487년경)』,『수태고지1490년경』등 종교적 작품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전 기존의 종교작품과는 달리 인물들 특히 성모 마리아를 숨어있던 여성의 관능미를 드러나고, 감미롭고, 독특한 곡선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사망한 1492년 기준으로 말년의 보티첼리의 작품에 나타난 특징과 성향은 기존과 확실히 달라진다. 이러 한 것인 아마 당시의 피렌체의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이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말하자면 프랑스군의 피렌체 침입과 그 과정에서 메디치家 추방, 그 후 종교 개혁가 사보나롤라의 광적인 신정정치의 영향, 그 후로도 혼란이 계속된 이탈리아 정치적 상황이 그의 작품인 그림세계관이 변하게 만든 주 요인이다.
특히, 종교 개혁가 사보나롤라의 광적인 신정정치의 행위는 그로 하여금 변하게 만들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보나롤라의 신정정치 광적인 예는 베키오 광장에서 있었던 “신성스럽지 않는 물품”의 화형식인데, 이 때 메디치家 시대를 장식했던 수많은 작품들과 고전작품의 해석하고 연구했던 유명 작가의 작품이나 철학(연구)서 등이, 수 많은 군중들 보는 앞에서 모두 불태워 없어졌다. 이때 보티첼리의 작품도 몇 점이 불에 타 없어졌고, 나중엔 스스로 내놓아야 처지에 이른다.
이와 같은 종교적 광적 현상의 살벌한 분위기는, 예술의 자율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아, 메디치家가 이룩한 예술의 피렌체에 대한 옛 명성은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이 피렌체를 등지고 떠났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보티첼리의 예술적 특성이 기존과 다른 특성을 갖게 되었다. 내용상으로는 기존의 비의적인 면이 사라지고, 그리스도교적면이 강해진다. 이런 것은 사보나롤라의 설교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모르지만, 그 영향으로 자신의 세속적 미술을 철저히 재검토하였고, 종교화에 매진하게 된다. 더구나 북유럽의 미술적요소의 짙은 색감과 강렬한 감성을 보이는 요소를 받아들이게 되는 데, 미술구도 및 형식상에 있어서도 변화가 나타난다하겠다, 이런 것은 그의 예술의 말기 작품인 『십자가에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2편과 『신비의 경탄(또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탄생) 1510년경』와 같은 작품에서 드러나 있다.
그의 생애에서 (현존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신비의 경탄(또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탄생) 1500』을 보면 그리스어로 적힌 “ 나 산드로는 1500년에 이탈리아가 혼란에 빠진 때 이 그림을 그린다. 혼란기 전반은 ⌜요한묵시록⌟ 11장에 2번째 재앙에 따라, 악마가 3년 반 기간 동안 해방되어 날 뛸 것이고, 이 후 악마는 제12장의 말씀대로 묶을 것이고, 이 그림처럼.......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명문이 이 작품 그림의 위에 적어 놓았다,
이러한 명문 아래 이 작품의 그림은 실제 황금의 도금 앝은 막으로 입어 표현된 천국의문이 아래는 흰색과 빨강색 그리고 녹색으로 된 옷을 입은 천사들이 춤을 추는 모습으로 위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담겨있고, 가운데 마굿간(외양간)에서 태어난 예수와 마리아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리고 맨 아래 부분은 남녀가 춤추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 남자는 사보나롤라와 추종자 두 명이라고 한다. 이 작품을 내는 시기 전후로 피렌체에서 급진적 신정종교개혁을 주장했던 사보나롤라는 교황청에서 파문을 받아 추종자들과 함께 화형으로 죽었다. 이로서 작품을 내 놓지 못한 채로 그대로 영혼을 묵었으나, 18세기에 영국에서 이 작품 보티첼리의 그림이 발견할 때, 전시되어 오늘날까지 영국의 국립회화관에 있는 것이다. 아마 나폴레옹 전쟁당시로 프랑스군이 로마 진입 시 이탈리아 귀족집안들이 싸게 그림을 고전작품수집상에게 넘기곤 하였는데. 그때 이 작품도 넘어간 모양이다.
명제 그대로 이 작품의 속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였던 현실미가 현실적인 황상의 세계로 대체되고 있다. 이 그림에는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하는 포즈 같은 것은 기존의 보티첼리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지만, 전체 화면에 이미지를 나타나 보이는 것은 보티첼리의 기존의 역작에서 보이는 관능적인 맥이나, 원근법등의 사실적 비례는 보이지 않고, 오직 광신적인 공허한 종교작품으로만 보이는 것뿐이다.
보티첼리는 그 후 10년간 어지러운 피렌체의 정치상을 체념하는 듯, 그림으로 아무런 작품을 내지 못하고, 14C 단테의 『신곡』의 삽화 제작에 몰두하다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공식적으로 미술(작품)의 중세시대 종언을 맞이하는 시대로 도달하였다. 조토로부터 시작되는 2세기에 걸쳐 미술의 변화는 중세 말 무렵에 시작된 점진적인 기술적 발달과 이로 인해 나타나는 국제정치적요소와 사상의 변화가 누적된 결과물이다. 이제야 미술이 중세 종교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고대미술의 사상적 이해와 중세 말부터 시작된 기술의 변화를 착용함으로써) 인간-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을 표현하게 하는 장치를 마련해 놓는 근대 미술 흐름으로 가는 첫 걸음을 (보티첼리에 인해)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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