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4. 15C초 피렌체의 르네상스 (과트로첸토의 예술시대)
역사가들은 15C 들어가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르네상스로의 진입하여 이를 중흥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비뇽유수와 교회 대분열은 중세유럽의 정신적 지주이었던 가톨릭교회와 로마 교황의 권위를 중세 전성기 당시와 권위에 비교한다면. 그 권위를 다시는 재기하기 못할 수준으로 떨어트려 놓았다. 가톨릭교회는 분열되었고. 교황이라고 칭하는 세력들이 피샤, 로마, 아비뇽에서 서로 나타나면서, 사태는 심각해졌다. 이처럼 가치가 전복된 세상에서 중세인들은 문제의 해결방안을 근본적으로 모색하였고, 점차적으로 그 대안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때 중세 대학에서 발전된 인문주의의 자기발전과 합리적 사고의 힘은 가톨릭교회 신 중심에 대항할 가치였고 마땅한 대안이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사이비종교와 미신적요소가 활개 쳐서, 그 힘을 기르지 못했지만, 여전히 왕실도서관과 대학, 수도원 등에서, 기록의 대상에 남아 있었다.
흑사병이 진정국면으로 들어간 14C중반쯤 돼서야 그 동안 숨죽어왔던 인문주의와 무역 및 교류과정의 발달에 힘입어 경제적 가치에서 나온 합리적 사고방안은 비로서야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계기가 확산된 것은 중세 말 기술적인 요인의 진보와 맞물면서, 중세유럽인의 인식이 바로 닥쳐오는 현실적인 미래에 대한 도전의식이 싹 틔어져 있는 요인이었다.
르네상스의 역사와 미술발전에서 15C가 중요한 것은 이 시기가 과학적 선원근법(Linear perspecrive)이 발견되어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조각이나 회화를 다투는 예술가들은 밋밋한 평면에서 마치 생생한 세계가 살아 있는 듯한, 삼차원의 사실적인 작품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요소는 예술가가 바라보는 자연의 모습을 객관화 할 수 있는 시각이 생겼다. 이로써 세상은 예술가의 눈에 의해 분석되고, 이 분석의 결과가 고스란히 예술의 작품이라는 창출물이 된 것이다. 또 이것은 15C 살던 유럽인들의 사고에도 변화가 이루어져 과학적 세계관이 생겨났다. 이는 중세기 동안 잊혔던 고대 그리스시대의 주로 자연주의 철학에서 다투어졌던 과정인 자연을 관찰하고 객관화해서 사실처럼 재현하는 것이 근대 예술로 다시 재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는 미술의 조류현상뿐만 아니라, 철학과 과학, 문화현상, 유럽인의 사고 현상까지 바꾸어 놓았다.
물론 역사의 길에서 이와 같은 과학적 방법론이 만능이 아니며, 때로는 많은 오류와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세기간 상당수 신에 대한 의존하던 능력을 인간의 의지대로 이끌어 간다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이러한 근대의 핵심은 15C의 미술현상의 조류에서 출발하고 있다.
알베르티의 말을 빌러 표현하자면 “회화작품은 그 안에 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을 그림으로 다시 살릴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묘사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차 수세기 동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이처럼 15C 유럽 르네상스의 예술/문화의 가치는 그 전의 흑사병과 신적영역에 대한 어두운 무지(無智)를 벗어나,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자신감을 유럽인에게 가져다주는 메시지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기베르티와 알베르티의 지식과 사상은 곧바로 젊고 유망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조각의 도나텔로, 회화의 마사초, 건축의 브루넬레스코가 대표한다. 이들은 서로 15C 피렌체의 동시대의 공간에 같이 살면서, 서로 간 작품에 대한 평을 묻고, 서로 간 작품에 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간 경쟁자이기도 하였고, 또한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자 친분이 있는 벗이기도 하였다,
도나텔로 Donatello 가 가지는 조각의 예술에 대한 가치는 중세시대에 사라진 고전문명의 입체적인 입상 또는 조각물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고대문명의 그리스나 로마의 중심 도시를 살펴보면, 도심의 광장가운데나 신전 앞 부분 등지에 있는 황제의 입상이나, 또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중심인물들이나 신의 모습을 한 조각상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조각상들은 사방으로 관람이 가능하며, 둘려볼 수 있게 하여, 관람한 자 위치에 따라, 그 시각 효과에 따른 모양새와 조각부분의 크기 등이 다르게 비쳐짐으로, 다르게 보이는 예술의 미적 효과를 나타난다. 그런데 중세기 조각에는 이러한 입체 조각상이 사라지고, 극히 제한적인 예를 제외하고는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평면을 깎아서 그림처럼 보이는 형태인 이차원적인 부조의 형태인 조각이었다. 물론 도나텔로도 부조형태로 조각도 선보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작품에 의해 르네상스(근대) 조각이라는 새로운 형태인 예술장르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작품 은 고전문명의 입체적인 조각의 부활, 즉 사방에서 볼 수 있는 조각상이, 그의 작품에 의해 다시 선보이게 된 것이다.
도나텔로는 1386년에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평민출생이었던 그의 성장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아, 양육과 교육과정을 알 수 없으나,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이었던 코사모 데 메디치가 주도하던 인문주의와 신 플라톤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예술인생에 첫 스승은 피렌체의 청동문을 제작한 기베르티이었다. 기베르티의 완벽한 형태의 조형물제작과 (성경의) 재창조한 그의 예술의 혼은 이탈리아 전역의 예술가들의 길잡이었고, 그의 공방에 제자로써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제작과정을 지켜본 도나텔로는 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의 예술적 기치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피렌체 대성당의 공방에서 대리석 조각술도 배웠다. 그는 조각방향의 재능은 젊은 시절부터 인정받았다고 알려진다.
도나텔로는 피렌체의 청동문 제작과정을 놓고, 기베르티와 경쟁하던 브루넬레스코와도 친한 까닭에 그가 터득한 (알베르티에 의해 완성한) 원근법의 원리 또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브루넬레스코와 함께 예술에 대한 견문을 목적으로 로마 유학을 갔다가 1420년대 무렵에 피렌체에 돌아왔다. 그 둘은 이제 건축과 조각의 신예로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다. 선원근법이라는 혁신적인 미술의 이론으로 예술가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브루넬레스코는 앞서 설명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제작을 착수 하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으며, 도나텔로 역시 사방에서 관람 할 수 있는 입체 조각상을 제작하면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도나텔로는 로마 유학 당시 고대유적에서 조각상들을 본 경험으로 중세와는 다른 조형미를 가진 조각예술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또한 기베르티의 예술적 가치와 브루넬레스코의 원근법 두 가지를 모두 터득한 그는 초기의 조각 제작부터 그 두 가지의 특징으로 나온다.
도나텔로의 초기 작품들로 대리석상 『다비드 David』와 『성 요한의 좌상』이 있는데, 이것들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 양식을 구사한 후기고딕양식의 대가 기베르티의 영향을 크게 작용 받고 있다. 그가 전성기에서 나온 성숙한 도나텔로에서 볼 수 있는 혁신은 이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첫번째 작품으로 알려진 대리석상 『다비드 David』은 1408년경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전면 피사드를 장식하고자 구약에 등장하는 12명의 인물을 계획하였을 때 만든 것인데, 현존하는 도나텔로 작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성기때 만든 청동 다비드 상과 구도를 비교하면, 대리석 다비상은 앞을 보고 있는 자세로 취하고 있고, 청동으로 만든 다비드 상은 밑의 땅을 내려다보며 숙고(생각)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자세가 다를 뿐이고, 다비드상 다리 앞의 골리앗의 머리를 두고 있는 점 등에서 보듯 같은 구도다. 이 대리석상『다비드 David』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내 성가대 쪽 전면 피사드을 위해 만들어졌고 1416년까지 거기서 전시되었으나. 1416년경 피렌체가 위기 상황일 때,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청사인 베키오 궁으로 옮겨, 오랫동안 애국자의 상징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16세기부터는 같은 목적에 기여한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다비드〉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현재는 피렌체의 도심에 있는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성 요한의 좌상』은 원래 피렌체 대 성당의 서쪽 대성문에 위치되어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입상이었다. 이 입상은 고의적으로 몸의 비율이 왜곡된 비율로 만들어져 정면사진으로 보아서는 지나치게 길고,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도나텔로가 의도한 위치에서 이 입상을 올려다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이 좌상을 보는 이들은 약간 거리를 두고 무릎을 꿇거나 바닥에 앉아 있는 자세에서 봐야, 도나텔로의 의도가 보인다. 거리에서 두고 보는 이들은 견고하고 힘이 넘치는 인간상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왜 이런 모습을 한 조각상인가 하면, 이 조각상은 원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서 피사드의 높은 곳에 위치한 일종의 장식이었다. 그래서 아래에서 본 비율을 맞추려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각한 것이었다.
그가 초기 작품시기에 제작한 대리석상『성 요한의 좌상』은 1588년까지 피렌체 대성당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전면 피사드에 있다가, 현재 피렌체의 도심에 있는 바르젤로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브루넬레스코가 있는 곳에 늘 도나텔로가 가까이 있었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최종 완공 책임을 지었던 브루넬레스코는 내부 조각의 대부분을 도나텔로에게 맡겼다. 브루넬레스코가 추구한 공간의 이미지는 도나텔로가 조각으로 구체화했고, 그 둘의 생각은 거의 일치했기에 이는 가능했다. 또한 브루넬레스코가 건축한 산 로렌초 성당의 내부 구성 또한도나텔로가 맡겼으며, 산타 크로제 성당의 피치가문을 위한 가족예배당을 브루넬레스코가 신축할 때에도 내부 장식과 조각은 도나텔로에게 맡겨졌다.
도나텔로의 유명 작품으로 스승 기베르티의 청동상도 있는 오르산 미켈레 성당의 외벽에 있는 대리석 조각상 『성 조지(지오르지오)(1515년)』,『성 마가(사도 마가)(1413년)』의 전신상이 있다. 하지만 현재 오르산 미켈레 성당의 외벽에 있는 조각상은 모두 진품이 아니다. 여기에 있던 도나텔로의 작품들은 모두 후대에 바르첼로 박물관에 옮겨져 소장되어 있다. 오르산 미켈레 성당은 건축가 타데오 가디 (taddeo gadi)가 지은 곡물창고였으나, 그 곳에 걸려 있던 성모마리아상이 기도에 응답하는 신비의 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1380년- 1404년 사이 피렌체의 강력한 상공업 길드들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개조된 건축으로 기획된 14개의 외부 벽감들을 지니고 있는데, 14세기 후반 상공업 길드들은 도시정부로부터 각 길드의 수호성인의 조상(彫象)을 제작해 성당의 파사드를 장식할 것을 의뢰받았는데, 벽감 안의 조각상들은 이 시기로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성 마가(사도 마가)』의 전신상은 피렌체의 직물길드에서 주문 한 것으로 것임으로, 1413년에 완성되었다. 원손에는 자기가 쓴 (마가)복음서를 들고 있고, 콘트라포스토의 여유 있는 자세와 더불어, 대리석 성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이 조각상은 인물이 방석위에 깔고 서 있는 입상인데, 이 방석이 직물길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1415-1420년경에 제작한 대리석 조각상『성조지(지오르지오)』의 경우, 피렌체의 무기를 만드는 길드에서 주문하였기 때문에, 방어무기인 방패를 땅에 딛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무기를 자세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 동상아래 밑에는 부조로 조각된 「용을 무찌르는 성 조지」가 있는데, 앞으로의 도나텔로의 조각에 대한 전개(발전) 방향을 있어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작품이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코가 언급한, 선원근법이 적용된 도나텔로의 첫 작품이다. 말을 탄 성 조지가 용을 무찌르는 장면, 오른쪽 옆 아케이트에는 공주가 기도를 드리면서 아를 지켜보고 있다. 아케이트를 맞은편에 위치한 용의 얼굴에서 사실적으로 부조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는데, 이로써 대리석 판에 회화와 같은 깊은 공간감이 부여되고 있다, 더구나 건축물은 인물과의 비례가 고려되어, 3차원적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회화적 환영을 완벽하게 연출 하고 있다.
또한 대리석으로 표현된 방패를 밑에 둔 성조지의 모습은, 예술작품에서 미적요소라고 하는 추상적 표준을 배제하고, 이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힘이 넘치고 억센 남성적 인간성을 극명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융기한 목의 근육과 굽어진 손목, 중후한 의상, 응시하는 표정은 분명 힘이 넘치는 남성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조각상이 도나텔로가 과거 기존 고딕의 조각상의 모습과 결별하고 새로운 조각상을 선보임을 말해준다. 고딕조각상들은 성당 현관 양쪽에 조용하고도 엄숙하게 열을 지어 서성아고 있는 것처럼 또는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보이는데 반하여, 도나텔로 조각상『성조지(지오르지오)』은 한 치라도 양보하지 않을 결심을 한 사람처럼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박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중세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가지고 있던 망연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힘들고, 활력과 집중감으로 넘쳐흐르는 것 만 같다. 방패위에 손을 얹고, 마치 적을 접근해 오는 것을 주시하는 듯 한 그의 태도는 도전적 결의로 긴장감감을 흐른다, 이 조각상은 젊음의 혈기와 용기를 매우 탁월하게 표현하였다,
또한 성인의 두 손이나, 머리카락. 눈썹 같은 세부 묘사 등에서 보듯, 전통적인 모델에 의존하지 않고 인체의 실제모습을 참신하고 확고하게 연구한 것이 보인다. 이는 현재 회가들도 그러듯이 작업실에서 모델이나 동료에게 자신이 원하는 자세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인체에 탐구가 시작되었다,
위에서 말한 도나텔로의 회화적 환영 및 깊은 공간성을 강조한 부조형식이 절경에 달한 것은 시에나의 산조반니 성당에 세례반(洗禮盤)에 있는 여려 부조 중, 그가 그린 한 부분의 그림조각의 부조로 1423~27년경에 완성된 『헤롯의 축제(연희)』로 그가 완성한 부조 중 가장 절실하게, 극적 효과를 보인 뛰어나고, 환영적 공간에 아름다움이 선보인 작품이다.
사실 도나텔로는 예술가들과 공동 작업 중에 독자적인 의뢰도 받아 시에나의 산조반니 성당에 세례반(洗禮盤)을 위한 몇몇 청동작품들을 비롯해 건축과는 무관한 순수 조각도 여러 점 만들었다. 이 세레반 즉 세례당의 성수반의 역사는 복잡하다. 원래 1416년쯤에 이름 없는 군소 조각가에게 처음으로 의뢰하였고. 기베르티의 조언을 구한 것이 1417년이다. 이후 기베르티와 도나텔로, 야코포 델라 퀘르차, 3명 조각가와 2명의 시에나 금세공업자가 작업을 분담했다고 알려진다.
그 중 시에나의 산조반니 성당에서 도나텔로 작품 중 가장 초기의 작품이며, 이 세례 성수반의 부조 작품 중에 가장 예술성이 높은 작품 중 하나로 뽑힌 (건축적인 배경에) 극적인 인상이 강렬한 부조 『헤롯의 축제(연희) (1425년경)』의 작품 내용은 헤롯의 연희 중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담아 바쳐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은 기존 부조와는 전혀 새로운 기술로 주목 받았고, 장면은 극적인 순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헤롯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서고 있고, 한 손님은 이를 보고 훈계하고 있는 듯 탁자를 잡고 일어난 자세로 있고, 한 명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또 한 세 번째로 있는 한명은 동료에게 매달리고 있는 듯 옷깃을 잡고 있으며, 그 옆에 있는 인물은 이 끔직한 장면에서 벗어나려고 도망가려고 하고 있다. 이 일을 벌인 살로메조차 당황하고 있는 장면도 나온다, 연회 식탁 뒤의 공간에는 아케이드가 있고, 그 뒤로 악기로 연주하고 있는 악공의 모습도 나온다, 그 너머 아치가 있는 공간의 방에 있는 다른 손님들도 보인다.
도나텔로는 이러한 부조의 그림 장면에서, 장면의 공간은 연속되어 있고, 또 공간자체와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은 정확한 비례로 따른다. 환영은 미세하고 차등을 둔, 부조의 높낮음과 탁월하게 구사한 중앙투시 원근법에 의하여 완성되고 있다. 또한 전경에서 펼쳐지는 드라마틱 장면과 아무것도 모르는 뒷 공간의 인물들간 대비는 긴장감을 증폭시키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시각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 기베르티 또한 앞에 설명한 청동문의 부조에서 높낮이로 미세하게 나타나는 원근의 앝아지는 부조를 선보이고 있으나, 도나텔로의 이 작품과는 비할 정도는 아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으로 어느 한 장면을 드라마틱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기존의 고딕 에술의 명확하고 우아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에겐 도나텔로가 나타난 이런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를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그림은 정돈되고 유쾌한 문양을 형성하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갑작스러운 혼란의 효과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기 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거친 움직임은 이런 효과를 배가 되도록 하였다. 이 끔직한 이아기를 완화시켜줄 어떠한 장치(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작품을 본 당시의 사람들은 기분 나쁠 정도로 머리에 생생하게 각인 되었을 것이다.
그는 1430년대 초반 3-4년 남짓 로마에 체류하며, 고전(고대 로마의)유적연구에 몰두한 듯하다. 이는 로마의 여행 이후에 나온 그의 조각 작품에서 고전적인 주제가 등장하거나, 조각의 상이 고전을 닮은 듯, 모방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러하다. 2세기 안티노우스 대리석상서 영감을 얻어 만든 청동상『다비드』 및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상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가타멜리타 가마청동상』 또 부조의 기술에서 고전 건축의 주두(柱頭)와 장식물 사용 등이 그 예로 든다.
그는 1443년- 1453년 약 10년간의 파도바에로 거처를 옮겨 지내게 되는데, 이때 주문으로 만든 두 점의 그의 작품을 남겼는데 성안토나우스 바실리카 중앙제단과 그 제단 앞인 파도바의 산 탄토니오 성당(앞) 광장에 있는 베네치아의 용병대장 『에라스모 다 나르니 (일명 ‘가타멜라타‘이라 부른다.) 장군 기마상』 그것이다.
그가 로마에서 보았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본 떠 1453년도쯤 완성된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을 만들었다. 승리를 거둔 용병대장의 육중한 인물상은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서, 당당하게 정복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 이는 궁극적으로 로마황제의 초상 조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성이 넘치는 얼굴의 모습에서 로마 장례용 흉상의 경탄 할 만 사실주의에 의거 한다.
초기 르네상스에 있어서 군상(群像)의 안정과 정밀이란 고전적 효과는 양괴성(量塊性)과 평형감으로 표시되었다. 말 탄 자의 수직선, 장군이 가진 칼과 지휘봉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대각선, 커다란 말의 수평적인 중량감 및 말의 네 발이 만드는 삼각형이 기묘한 교차를 보여 주고 있다.
1459년경 만든 청동상『다비드』은 그가 만든 최고의 걸작이자, 르네상스 최초로 사방에 볼 수 있는 입체적인 청동 조각상이라는 평가와 함께, 15C를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청동작품이고, 그의 청동상『다비드』은 고전 고대이후 사라져갔던 청동누드상의 부활이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주인공의) 편안하고 느긋한 자세, 부드럽고도 매끈하게 흐르는 형태의 모델링, 기이한 뾰쪽 모자 밑으로 흐르는 음영, 발밑에 있는 골리앗의 잘린 머리에서 나불려는 풍성한 머리카락은 로마조각상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현재 이 작품은 바르젤로 박물관에서 정기적인 복원 작업 중인데, 워낙 인기가 많아 작품의 복원 과정도 관람객들에게 공개되어진다.
그의 다비드청동상은 르네상스 문화에 다음 같은 과제를 남기고 있다.
1. 전통은 단순히 모방이 아니라, 전통을 넘어서 비견되는 대등한 창조를 해야 한다는 점, 2. (예술가가) 예술의 헌신하는 목적이 다르더라도 예술의 사상이나 예술가의 감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말년에 갈수로 그의 예술의 특징이 사실적인 인물상과, 참혹하고 감정적인 주제에 더욱 심취하고 있는데, 목제에 부분 도금으로 해서 만든『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연도 미상)』가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가히 충격적이다. 그 동안 도나텔로의 인간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대단히 참혹하고도 비참하고, 한 여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성서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아 이야기 중 한 장면인 예수를 만나 과거를 참회하는 모습을 담아진 장면이다.
그녀는 간통과 매춘을 마다하지 않고,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창녀이었고, 이를 안 마을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때려 죽으려 하였다. 이 때 예수가 나타나 이 여인을 용서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종교적인 내용이고, 이 장면은 사람들이 던진 돌을 맞고 피 흘리고 있는 여인이 자신의 저질렀던 잘못을 회개하고 있는 모습을 도나텔로가 순간 포착하였다.
따라서 인제의 아름다움과 관능미를 나타나는 데 적합한 대리석보다는 중세 때부터 종교적인 조각에 쓴 목재가 적합했으리라고 같다. 즉, 마리아 막달레아가 느낄 심신의 고통과 위화감의 표현은 견고하고 질긴 목재가 적합했다. 도나텔로는 (이 작품을 목재로 만듦으로써) 성녀가 느낄 고통과 또한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도나텔로는 평민 출신이었고, 결코 사치하고 않으며, 평생 동안 일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메디치家에서 주는 연금을 받아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 메디치의 家 공동무덤이 있는 산 로렌초 성당의 그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 옆에 묻었다.
도나텔로가 조각의 15C를 나타난다면 회화에는 마사초가 있었다. 마사초와 도텔델로의 관계는 1426년경 피샤에서 만남이후 계속 교류하고 있었고, 도나텔로의 친구이자 당시 최고의 건축가인 브루넬레스코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들의 미술 이론적 생각은 기베르티의 표현과 알베르티의 선원근법에 대한 논리에서 나온 것임으로 이것을 각자 분야에 맞게 적용하고 있었다.
마사초의 본명은 톰마소 디 조반니 카사이( Tommaso di giovanni casai)이며, 아레초의 인근 마을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관련 일에 종사하였으나, 미사초가 어릴 적 일찍 죽었다. 마사초가 화가로써 기록의 첫발은 스물 한 살때의 1422년에 피렌체 길드의 가입한 기록에서 나타난 사실이지만, 그가 누구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 무렵은 도나텔로와 알베르티와 같은 예술가와 예술이론학자들이 활동하는 시기라 15C 피렌체에서 르네상스의 태동하는 것을 느껴질 시기이고, 그 주역으로 성장하여 나간다.
후대의 비사리에 기록에 따르면, 1423년에 그는 피샤와 로마를 방문하고, 그곳의 고대예술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그의 예술의 활동기간은 그가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약 5-6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그 짧은 생애기간동안 엄청나게 혁신적인 것을 그의 예술작품에 도입하였고, 그 때문에 15C에 위대한 회가, 미술가로 대열에 들어갔다.
증거 문헌이 있는 그의 첫 번째 작품은 1426년 피샤에 있는 카르멜회 성당의 대형 다폭 제단화이다. 불행이도 이 제단화는 18세기경 해체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대부분이 유실되어 그 혼적을 가지고는 그의 초기 예술작품의 진면목을 보기가 어렵다. 다만 배경에 금박의 넣는 등에서 기존의 제단화와의 기법을 따랐으며, 그나마 제단화에서 남아있는 성모자의 그림에서 보듯 전통의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마사초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를 다투어 넣는 그만의 작품의 성격을 보아서, 당대의 예술작품과 다른 차별성을 강조한다. 이 작품의 성모자의 그림을 자세히 들어다보자.
마사초가 여기에서 나타난 성모의 모습은 이상적인 성모의 모습은 아니다. 기존의 여성스럽고 너그러운 성모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살이 아주 단단한 그리고 억척스럽기까지 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성모가 입은 푸른 겉옷이 그녀의 무릎을 넉넉하게 덮도록 그렸는데, 이것이 마치 성모의 다리가 우리 쪽으로 돌출하여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또한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예수는 한 손으로는 성모가 준 포도를 움켜쥐고 있으며, 다른 손으로는 포도를 자기의 입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식탐이 많은 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분명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인간의 아기들을 닮은 모습이다. 또한 그의 머리는 몸집에 비해 상당히 큰데, 이것은 아기들의 실제 몸의 비례를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당시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이와 같이 몸의 비례를 반영하지 않아, 대개 성인과 비슷한 비례를 가진 몸으로 묘사해 (동일한 몸을 가진) 어른스럽게 그리곤 하였다.
성모의 얼굴색이 이상한 데, 이는 그림이 손상 되었기에 그러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얼굴의 색은 초벌한 부분으로 그 위에 칠한 나중의 얼굴색의 물감은 대부분 지워져 버렸다.
성모가 앉아 있는 옥좌는 마사초가 분명 고대 로마의 유물에서 영감을 얻어 표현 한 것이 틀림없다. 분명 돌 또는 대리석으로 만든 옥좌 같은데, 둘씩 짝을 지어 지은 고전적인 기둥들로 장식되어져 있으며, 고딕 양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치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편 옥좌도 그려니와, 그 위를 앉아 있는 인물들도, 모두 그림의 왼쪽 꼭대기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고 있다. 그림자는 모두 오른쪽으로 같은 방향으로 나 있고, 옥좌의 한쪽으로는 빛이 비추면서 다른 쪽은 그늘이 져 있다. 또한 아기예수를 빛이 비추며, 그의 사지에 입체감을 주어 삼차원적으로 보인다. 빛은 이 그림에 극적으로 적용한 원근법을 강조하는 역할도 한다, 밑에 있는 천사들의 악기들 하여금,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는 시각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원근법을 가장 잘 적용되는 부분은, 그리스도의 머리 위의 후광부분이다. 이 그림의 후광은 기존방식의 머리위에 그려진 원을 형태가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바라본 형태로 그러졌다. 과거(중세)에는 이런 형태의 후광은 그려본 적이 없다.
마사초가 로마에 갔다 와서 1425-28년경 프레스코 전문회가인 마솔리노와 함께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프레스코화 연작을 그렸다 이것이 1424년경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자 정치가였던 펠리체 브랑카스(치)가 주문하였던, 또한 그 이름을 따서 『브랑카치 채플』이라고 부르는 프레스코화의 연작이다.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은 피렌체의 도심에서 아르노강을 건너 남서쪽방향으로 외곽에 있는 작은 성당에 불과하다. 이 성당은 외관상으로 정면 파사드가 미완성된 채 남아 있는 등 남루하고, 짓다 만 것 같아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이 성당은 “르네상스 회화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마사초의 『브랑카스 채플』 있어, 이를 보려온 미술 애호가들과 관람객들로 부적거리는 곳이다. 물론 실내공간도 협소해 한번에 20명 정도밖에 입장이 가능 할 수 없기에 줄을 서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브랑카스 채플』의 프레스코화의 연작 중에서 가장 가치가 있고, 주목 해야 할 작품은 왼쪽상단에 그려진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당시의 인식 기준으로 보아서는 가히 혁명적인 그림이었다. 이전의 그림에서는 누구도 아담과 이브를 이렇게까지 참혹하게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낙원에서 추방되는 거라 할지라도, 기존 중세의 가톨릭 인식 세계가 가지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이 제2의 아담을 가르치기에 아담은 예수그리스도의 고귀하고 신적 이미지를 겹쳐져야 되는 거였다. 즉, 아담은 예수의 ⌜구약⌟의 성서모델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이었던 이브는 성모마리아의 원형적 모델로 둘 다 신성하고도 거룩함의 표상이었다.
마사초의 이 그림에서 보듯, 아담은 수치침에 사로잡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며, 이브는 부끄러운 나선을 웅크리며, 절망의 탄식을 뱉어내고 있다. 20대 마사초는 왜 당시의 신성모독 같은 표현의 그림을 그렸을까? 낙원에서 추방된 절망의 세계로 막 추방되는 한 남성과 여성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다.
수치를 당하고 심한 좌절감을 경험한 인간을 솔직하게 표현한 그림에서, 이 프레스코화가 왜 <르네상스 회화의 요람>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당시 르네상스의 예술은 이러한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의 발견과 그 심정에서 오는 감정표현에서 촉발한 것이었다.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그림 바로 옆에 있는 왼쪽의 상단그림『세금을 바침(세금을 내는 성 베드로)』도 마사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그림이다. 이는 성서 신약인⌜마태복음⌟ 17장 24절의 이야기를 시각화하여 표현하였다.
“베드로야, 호수가로 가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인데, 그 입속에 한 세겔의 금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너 와나 의 세금 한 세겔이 되므로 그것으로 세리에게 주거라.”
이 그림 안에는 세 장면이 동시에 포착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가운데 장면은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 유대인 관리가 세금을 낼 것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 작품에서 왼쪽의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은 성 베드로가 갈릴리호수에서 잡은 생선의 입에서 동전을 꺼내는 장면이 보이고, 오른쪽 장면에서는 관리에게 세금을 바치는 성 베드로의 모습이 보인다. 베드로에 의해서 나타나야 할 3가지 장면이 한 번에 여기서 포착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군상의 중심을 이룬다고 하겠다. 그는 하나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면서도 시선이 옆으로 이동하거나 변화하면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이는 조토의 시대 이후, 회화에서 완벽한 일관성이 다시 등장하는 첫 사례이다. 동일한 위치에서 전체의미를 손상시키지 않고서는 부분을 제거하거나,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혁신적인 점은 인물과 풍경이 원근법으로 처리하였다는 점이다, 가깝거나 먼 느낌이 이 그림에서 들어 난다.
이 그림의 주요내용인 예수가 세금을 냈단 사실은 사실이 아니며 또 이와 같이 장면을 나타난 작품의 제목이 어떻게 보자면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인데. 피렌체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세금납부의 중요성을 깨달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런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사초의 섬세하고도 돋보이는 표현력이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브랑카치 채플 정면의 오른쪽 상단에서 보면, 마사초의 또 하나 걸작인 작품인 『세례를 베푼 성 베드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이야말로 르네상스의 정신이 무엇이고, 르네상스 회화의 진정한 의미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예술작품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세례를 베푸는 성 베드로의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봐서는 추운 겨울철에 해당하는 날이다. 세례를 받는 남자는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까지 올라온 시냇물에 다 벗고 앉아 세례를 받고 있다, 알몸으로 벗고 고개를 숙은 남자의 모습과 몸의 상태인 온통 긴장한 상태이다 세례의 물이 흘려 내려오는 그의 목 주위에 근육을 바라보면 찬 기운에 움츠리고 있는 걸 알게 된다. 마사초는 거룩한 베드로 앞이라 할지라도, 추운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쓴다면, 몸이 떨리기 마련임을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낸다. 세례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이러한 장면을 보고 있는 옆에 있는 알몸의 남자는, 손으로 온몸을 감싸 안으며, 매우 추운 듯,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처럼 마사초가 그린 그림은 인간의 진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나 보는 이들에게 전달하는 목적이 있다.
감정의 본능에 충실하고 솔직한 인간의 모습이 비쳐지는 이러한 일상의 거룩함이 결코 종교에 밀리지 않는다는 인간의 가치가 시각화되어 평가를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정신이다.
마사초는 1426년경 피샤로 주 작업장을 옮겼다. 피샤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중앙 제단화 작업이 그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에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코를 만나 교류했다.
피샤와 피렌체를 바쁘게 오가며, 피샤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중앙 제단화 작업과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랑카치 채블 프레스코화 작업을 하던 중에, 로마에서 연락을 와서 갔으나, 거기서 갑자기 급사했다. 후세의 비사리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실력을 시기하던 동료회가에 의해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는 그의 대표작인 『성 삼위일체』는 마사초가 임종하기 한해 전 완성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알베르티와 브루넬레스코 등이 고안한 선원근법을 회화에다 최초로 적용하였다. 물론 이를 브랑카치 채블에서 개별적으로 사용된 바 있긴 하지만, 회화의 그림에 가상의 깊은 공간까지 폭 넓게 확대한 것은 이 그림이 최초다. 미술혁신을 가져온 선원근법의 새로운 법칙은 그로부터 입체주의가 등장할 때까지, 약 450년간 서양 미술을 지배하였다. 평범한 이차원적 벽면에 고안하여 그려진 것에 불구하고, 네 개의 차별적인 삼차원적 공간이 각자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 삼위일체⌟의 원래 놓인 자리는 왼쪽 통로 세 번째 베이(bay) 에 자리했다. 하지만 16C경 성당을 개조하면서 『성 삼위일체』를 완전히 가려 버려 미술사에서 가장 걸출한 이 작품을 300년 넘게 모습을 감추었고, 벽화의 하단 대부분이 이때 제단을 제거할 때 훼손되었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서 복원되었으나, 많은 부분이 그 당시의 빛이 아니다.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부활과 속죄라는 중세 가톨릭교 상징을 근대적이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근대초기인 르네상스적인 형식을 선보이고 있다. 인류와 하나님의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화로운 우주는 과학적 조화로 나타난다.
환영적인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예배당의 공간속에 깊숙하게 자리함으로써, 성삼위일체 신비는 마치 현실이 되는 듯하다. 또한 마사초는 이 벽화를 평범한 표면에 그렸음에도 벽면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환영적 공간감을 연출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성 삼위일체』의 그림을 자세히 들어다 보자. 그림속의 인물들이 사실적인 르네상스시대 건축 안에 피라미드식으로 구성으로 배치하고 있다. 격자무늬가 있는 원형천장은 이오니아식 원주가 받치고 있으며, 옆의 코린트식 벽주위로는 고전적 엔타블러처(entablature)를 두어 마치 개선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형식은 평평한 이차원 벽면에 그러진 프레스코화임에 불구하고, 마치 4개의 차별적인 공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의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작품의 주문자 두 명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아래 공간, 성모마리아와 세례요한이 존재하는 가운데 공간, 그 위로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그리스도의 공간, 그리고 성부인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두팔로 잡고 있는 위쪽 공간이 분리되어, 서로 아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작품의 하단인 무덤으로 그려진 부분도, 마치 해골과 뼈가 실제 존재하는 듯, 입체적으로 보인다. 이는 십자가 아래를 소실점으로, 작품의 상단과 하단의 시점이 모아져, 완벽한 선원근법이 구현되기에 그러하다. 하단의 명문 글씨는 이탈리아어로 “ 지금의 내 모습처럼 당신도 이리될 것이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건물의 앞 기둥 때문인 듯 하단의 봉헌자들이 공간이 앞으로 더 배치해 논 것처럼 표현력을 지닌 사실에서 감상자가 있는 현실세계와 그 넘어 있는 영적세계상 경계라는 표시로 해당이 되며, 봉헌자들은 경계선 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천장(또는 예수그리스도)을 항하여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단축법 으로 묘사한 세례요한과 성모마리아는 감상자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있다.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손으로 가리키는 단순한 제스처는 엄숙한 이 그림 전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이기에 대단히 웅변적이고, 인상적이다.
이 그림의 인물상들은 마치 조각상처럼 보인다. 마사초가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아래 배치함으로써 강조한 것은 이런 효과였다. 우리는 손으로 그들을 만져 볼 수 있는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느낌이 이 인물들과 그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르네상스의 예술의 거장들에게는 예술에 관한 새로운 방법과 발견이 언제까지나 그것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런 방법과 발견을 매개로 하여, 그 주제가 갖는 의미를 보는 이를 하여금 친근하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마사초는 이처럼 현실과 같은 환영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정확하며, 수많은 기법들-주로 원근법을 적용하였는데, 그가 이 그림에 주요기법으로 나타난 것은 그림 표면에서부터 후퇴하는 평행선들을 만나는 I점 투시원근법을 이 그림의 주요 기법으로 사용하였다. 더구나 체계적 비례에서 만들어진 체계적 원근법도 같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연적인 광원마저 이 그림의 부조 효과로 삼았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에 두 곳에서 자연광이 들어왔는데, 이 중 하나는 전면의 원형창이며, 또 하나는 지금은 막혀버린 아벨라거리로 난 입구에서 들어 온 광원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마사초는 후자를 기본 광원으로 삼아 부조효과의 대변자로 『성 삼위일체』에 사용된 능숙한 색조와 명암 처리에 씌어져 입체감을 살려냈다.
이러한 명작들의 남긴 마사초의 짧은 생애가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는 비록 짧은 삶을 마감하였지만, 이런 마사초의 독특한 표현과 과학적인 원근법, 단일한 광원등 새로운 기법을 이용한 작품들은 프리 필라포 리피, 피에로 델라 프린체스카,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후대 르네상스회가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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