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르네상스에 대해

4장. 르네상스의 중요 예술가와 작품으로 보는 르네상스 이미지와 시각. (4)

홍진영HJY 2016. 2. 21. 08:01

본론3. 콰트로첸토 시대 르네상스 (이탈리아 피렌체지역을 중심으로)

 

앞에서 언급되듯이 흑사병의 만연과 국제정치의 혼란은 일어나고 있던 근대적사고와 시각예술의 붐 현상을 가로 막았지만, 당시 인력 부족 등에서 중세인들이 현장에서 삶을 절실하게 느끼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2장에서 언급한 각종 기술의 발달은 이 과정에서 나온 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세기-1세기 반이 지나가야 겨우 이 혼란을 수습하고, 14C중엽 무렵에야 진정 국면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위치상 (동방) 중계 무역의 발달과 과거의 문화유산이 남아있는 곳이라 빠르게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동방으로부터 문물 교환으로 들어온 종이, 화약 등 문물전래와 내부의 기술발전 및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길드성장과 같은 기법, 고리대, 초기은행업과 같은 부()의 수단의 성장은 이를 심화시키면서, 이제 중세 막바지를 알리는 종소리가 되어간다. 이렇게 되자, 부의 축적과 거래가 있는 곳에 문화예술도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슬람권의 흥성으로 인해 비잔틴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대거 이탈리아반도로 망명하면서, 그들이 가진 선진기술과 함께 이탈리아반도의 예술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또한 내세보다는 현실중심사고가 이때 새롭게 유럽인들의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과거 중세 유럽인들은 삶을 즐기는 것에 대해 종교적 최책감에 거부감을 느꼈다. 흑사병의 만연은 종교적인 일방적 믿음에 대한 환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현실과 주어진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를 더 충실하려는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에 대한 미적가치 추구하려는 르네상스의 정신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하면 역시 피렌체가 떠오르듯이 이 시기부터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북중부 이탈리아가 르네상스를 주도하였는데, 그 선두주자 또한 피렌체이었다. 이 시기 피렌체는 중세도시의 성장과정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도시로 몰려드는 적정 인구력 유지를 위한 행정 구역의 확장은 필연적이어서, 일찍부터 주변의 농촌(?)들의 도시로의 흡수가 빠르게 이루어졌으며. 피샤 등 이웃 도시의 강제 병합도 이루어져, 이탈리아 북 중부의 지역에서 제 1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국가였다. 르네상스초기의 피렌체는 어떠한 모습일까? 빠르게 성장한 인구 증가율을 맞추기 위해, 여기저기 신도시 건설착수를 하던 도시였고, 이에 이탈리아 최고의 도시국가로써 걸맞은 도시인들을 삶의 질과 행정력을 유지목적으로 공공시설물과 행정시설 등을 갖추기 위한 대규모의 건축물 등을 짓는 등 막 떠오르는 핫이슈를 가진 도시로 변모 하는 과정이었다. 그 시기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두오모라 부르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주변의 시설물의 공사이다. 사실, 흑사병의 발발 등 많은 이유로 어려차례 중단되기도 했던, 이 공사는 2세기가 지난 시점이 걸려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또한 세례요한 세례당의 동문을 제작하기 위한 공개경쟁을 하여, 우선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포함 7명이 선정하여, 2년의 긴 심사과정을 걸쳐 기베르티가 계약을 따냈다. 사실 세례당의 건축물 동문제작 프로젝트는 앞서 제작한 안드레아 피사노가 제작한 문에 이어 후속작으로써, 새로운 피렌체의 시대, 즉 피렌체의 르네상스 시작을 알리는 사건임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때문에 프로젝트 규모와 비용도 막대해, 결과적으로 피렌체의 군사 방어예산 1년치에 해당되는 22천플로인을 비용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른 7명 후보자들은 네 개의 청동조각에 산 제물로 받쳐지는 이삭그림 도안을 제출하도록 했다고 알려져 온다. 최종적으로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작품이 선정되었는데, 고심한 끝에 기베르티 작이 선정되었다.

로렌초 기베르티는 1403년부터 청동문의 제작에 들어가, 20년간의 간 제작 끝에 북문이 완성되었다. 그는 대단히 양심적이고 편집중적이었으며, 완벽주의자이었다, 그는 그 문의 청동 한 조각의 주물형틀 하나. 하나를 그의 손으로 제작했다. 그는 작품의 완벽한 질적 예술을 추구하여 속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 성 세례요한을 위해 세워진 산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문 작품 주제는 구약적인 내용이었다. 산 제물로 받쳐지는 이삭이 작품 샘플로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제작에 들어가려고 하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측이 작품주제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였다. 성 세례요한 세례당의 동문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입구와 마주하고 있어, 신약적인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베르티는 세례당의 동문 주제를 신약적인 내용을 하여 총 28개의 패널로 청동문을 완성한다. 정확히 하자면 구약의 내용들로 장면을 계획하려고 했던 것을 정면 수정하여 20장면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담긴 내용들로 그렸고, 4점은 아우구스티누스, 고레고리우스, 히에로니무스, 암브로시우스, 4명의 교부들의 생애를 그렸고, 나머지 4점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4명의 복음서 저자들을 그려 넣었다. 여기에 기베르티는 각 부조의 사이의 테두리 공간에 자신과 아들인 비토리오의 초상도 그려 넣었다.

기베르티는 이 작업을 하는데, 어려명의 조수들과 제자들 그리고 피렌체의 젊은 미술가들 도나텔로, 파올로 우젤로, 베노초 고츨리 등을 고용한 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작업하였다. 이들로써는 기베르티의 공방에서 함께 작업하였고, 특히 기베르티의 설계는 그 당시로써는 최신식 회화제작기법을 도입하였기에, 그들은 기베르티와 함께 일한 경험이 자신의 작품 제작기술에 밑바탕이 되었다.

 

산조반니 세례당의 동문이 20년 기간 동안, 긴 기다림에 드디어 완성되자, 피렌체 사람들은 이에 감동을 받았고, 남아 있던 세례당의 북쪽의 청동문도 그에게 제작을 맡겨졌다.

그는 이 북문을 제작하는데, 1425년부터 (실질적인 제작은 1429년부터 한 것으로 알려진다.) 1452년까지 27년간에 공을 들어 완성시켰었다. 그가 사망한 것은 이로부터 3년 후이었다. 그는 실질적으로 반세기가 넘는 기간을 피렌체의 그 당시 (중세시대) 상징이자 수호성인인 성 세례요한을 위한 산조반니 세레당의 문을 제작하며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가 만든 북문으로 제작된 (현재 세례당의 동쪽의 청동문) 청동문이 바로 후대에 미켈란젤로가 보고 천국의 문이라고 감탄했다는 문이다. 그가 맡은 첫 번째로 맡은 세례당의 문의 제작과정과는 달리, 이 두 번째로 주어진바 원래 북문에 설치하도록 되어있는 문은 기베르티가 원하는 데로 제작할(설계할) 환경을 주어진 까닭에, 그의 예술 진면목을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설계 시에 거의 정사각형을 띤 양쪽으로 다섯 개씩 패널 열 개와 그 사이에 놓일 장식 테두리에 더 많은 인물상과 두상을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바깥 테두리에 그가 제작한 북문과 마찬가지로, 동물과 새, 식물의 그림장식으로 하여금 화려하게 장식한다.

/우 다섯 개씩으로 된 양 패널은 천지 창조로부터 솔로몬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주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좌측 패널으로는 위에서 아래로 천지창조, 노아. 이삭. 모세, 다비드( 다윗)의 주제가, 우측 패널은 위에서 아래로 카인과 아벨, 아브라함, 요셉, 여수호아, 솔로몬의 주제가 양각되어 있다. 기베르티가 작품샘플로 제출했던 산 제물로 받쳐지는 이삭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우측에서 위에서 두 번째 패널에 있다.

기베르티는 이 문의 작품에서 좌측 패널 문잡이 부분에, 두상을 돌출한 조각물이 설치하였다. 그 두상이 자신의 얼굴모습인데, 이를 내비쳐서 이 문의 제작자임을 알리고 있다.

 

기베르티의 진면목을 보기위해 제작한 문의 부조(기법)를 자세히 보자. 그는 후대의 미사초, 프라 안젤리코 등의 피렌체의 르네상스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혁신적 기법을 부조에 적용했다 이 패널들은 이전의 북문을 제작할 때, 각 틀의 장면에 보이던 제한적인 사업 패턴에서 벗어났다. 기베르티는 실내 외 공간을 함께 묘사하기 위하여, 원근법을 더 명료하게 사용하였고, 작품에서 심지어 원경에 있는 사람들보다, 근경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입체적인 묘사를 통하여, 도드라지는 효과를 낼 수 있게 하였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과 건물들의 모습은 분명 과거의 고전 시대 풍들의 관찰 또는 그가 실재 관찰한 작품에서 연관된 영향이 각자 장면에서 세부사항들과 동작이 다양하게 했음에 기여 하였다.

기베르티는 여러 패널에서 그 패널의 표현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일화를 하나 이상씩은 반드시 포함시켰다, 이것은 상당한 이야기를 다툴 수 있는 기술력과 또한 그 장면을 강조할 수 있는 표현력이 필요했다. 이는 각자 일화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어야 했고, 동시에 장면의 전체적인 조화도 고려했기에 그렇다.

 

작품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요셉이야기의 장면 패널이 현재 복원하여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요셉의 인생 이야기의 중요한 몇 장면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이 패널의 장면 특징은 화면 공간의 정도가 원형 케이트의 건물로 채우고 있는 점이다. 그 건물의 아래에서 자루를 이용하여 곡물을 어디론가 나르는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틀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시대가 고전시대를 증명하듯 고전의복인 토가차림의상을 갖춘 사람들에서 우아한 주름과 흘러나오는 선율들로 하여금 기품 있는 자세와 동작(움직임)을 강조하고 있다. 오른쪽 꼭대기의 한 장면에서 요셉을 질투한 형제들이 상인들에게 (요셉을) 파는 장면도 그려져 있다. 기베르티는 그들 무리들을 아주 얕은 부조로 묘사하여, 그 일화들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거리가 먼(오래된 시기) 세계에 있음을 알려 준다.또한 이런 이야기의 배경이 가파른 언덕이어서 패널 위쪽에 배치한 것이 적절하여 보인다.

왼쪽 맨 아래에서 보면 요셉의 은잔이 그의 동생 벤야민의 자루에서 나오는 일화를 보여주고 또한 그 위 공간 (왼쪽 중간에 보이는 공간)은 요셉이 형제들과 다시 만나는 마지막 일화가 그려져 있다, 왼쪽에도 건물이 대두리 역할을 해서 윗 장면과 아랫 장면을 나누는 패널의 다른 장면이 각자 연출하고 있다.

 

부조의 섬세함과 모델링의 정교한 묘사는 기베르티의 숙달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부조패널과 조각상들을 로스트 왁스법으로 주조했다. 기베르티는 점토 주형에 밀랍으로 디자인한 후 열을 가해, 밀랍이 흘러나온 빈 공간에 용해된 금속을 부었다. 주물구조는 주조소에서 만들어졌고, 주조된 작품을 조각가들로 하여금 다듬고 윤을 내도록 하였다. 그다음에 세례당의 문에 자리 잡은 청동부조들은 마지막으로 금박을 입혀 화려한 장식을 하였다.

 

이처럼 만들어진 산조반니 세례당의 기베르티 두 번째 문은 원래 북문이었지만, 그 작품의 주요 주문자였던 모직매매업자 길드는 그 문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가치에 매료되어, 인근 성당측과 협의하여 이미 설치 한 바 있는 기베르티의 동쪽문과 교체하여 달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원래 북문에 있어야 할 천국의 문이 현재까지 동문에 위치하는 이유다.

사실 이와 같은 결정은 신학적으로는 커다란 논란거리이었고, 이와 같은 결정내리기까지의 결정과정 또한 쉽지 않았다. 부속시설인 산조반니 예배당의 주인(主人)이었던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동쪽 문이 세례당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에 따라서 그 청동문의 주제는 가톨릭중심인물인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신약적 주제이어야만 했지만, 기베르티의 두 번째 만든 청동문인 천국의 문은 주제는 구약의 내용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구약을 내용을 주제로 제작한 문을 두오모 성당 맞은편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의 반유대적 전통이나, 신약의 주제와 예수그리스도의 우위를 강조하는 가톨릭교회 입장에서는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기베르티의 작품의 탁월함이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었다. 오늘날 이 청동문 천국의 문을 보려고 많은 이들이 이 장소로 찾아오지만, 세례당의 모든 청동문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산타마리아 델 피오네 성당 뒤에 있는 두오모 박물관에 있다.

 

오르산 미켈레 성당의 외벽에 장식하는 커다란 조각상중 초창기의 세 개상이 기베르티의 대표하는 작품이다. 성 세레요한상은 1412-1414년정도에 완성되었고, 성마태상은 1419년 무렵에, 성 스테판상은 1426-1428년무렵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중 성 세레요한상은 청동작품으로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강력한 길드인 모직 매매업자 길드에서 주문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것의 높이는 무려 250cm가 넘는 이 청동상이 르네상스 초기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이것은 고전시대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만든 청동상이었고, 기베르티는 이런 성인상을 한 덩어리로 주조하여 기술력을 나타냈다고 한다, 두상의 강렬한 모델링과 체중을 한쪽 다리에 싣고 서 있는 자세에서, 고전조각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들 수 있다. 또한 패턴과 우아한 선에 대한 기베르티의 감각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망토의 주름에서 잘 드려난다고 할 수 있다.

 

성 마태상은 피렌체의 은행길드가 성 스테판상은 모직 직조 상공인 조합길드가 각자 주문해 설치되었다. 성마태상 같은 경우, 허리를 약간 비튼 자세를 취하게 하였으며, 그의 저서인 마태복음을 들고 있다. 또 그는 성마태의 청동조각상을 설치할 벽감의 구조도 설계하여 설치했다.

이처럼 77여년 생애 가운데 대부분 일생을 피렌체에서. 그리고 피렌체를 위해, 두 개의 문과 세 개의 조각상을 제작했던 기베르티는 1456년 피렌체에서 사망했고, 그의 시신 역시 피렌체의 산타크로체성당에 매장되었다.

기베르티는 미완성된 미술이론서 코멘타리를 남겼으나. 대부분 내용이 미술사소개서이고,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미완성된 이론서에 불과하다. 이제는 예술가들의 미술에 대하여 설명하는 이론이 필요한 시대가 왔고, 또 후대 예술가들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 종합된 저서가 필요했다. 이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였다. 더구나 원근법등 과학적 소재가 회화나 조각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되면서,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체계적인 이론서가 필요로 하는 시대이었다.

 

일명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로도 부르는 브루니와 알베르티는 이론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르네상스의 미술에 영향을 미친 사람 중에 가장 커다란 기여한 인물이었다. 알베르티는 초기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생활의 선구자였다. 그는 다재다능한 자질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건축이나, 회화 등의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사상이라든지 법률분야, 또는 인물의 형성연구 등의 철학 분야 등에서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화의 형성에 기여 한 인물이다.

 

아버지 로렌초에게 수학을 어릴 적부터 배운 알베르티는 매우 영민한 아이로 자라고, 그중 수학을 가까이 해 모든 문제를 수학에 입각하여 풀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인문학을 학교에서 정식 학문으로 선택하여 배워 왔고,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하면서 1428년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의 관심과 활동은 기기학과 수학이 주요 관심사로 아주 현실적이었고, 인문주의적이고, 전문적인 일련의 눈에 띄는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알베르티는 이 연구와 증명을 무언가 유용한 일에 응용할 수 있을 때, 기기학과 수학이 중심이고, 이는 실용적 학문에서 더욱 그랬다. 알베르티는 수학에서 그림의 원리(원근법)와 무게 변화에 관한 놀라운 명제도 이끌어냈는데, 후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알베르티도 수학 때문에, 겉으로 보면 무관한 몇 가지 학습과 실천 분야에 매력을 느꼈다.

그가 피렌체의 우주구조론 학자인 파올로 토스카넬리와 맺은 교류에서 얻은 지식은 실용과 과학에서 상당히 중요했다. 또한 알베르티는 지리학보다 천문학에서 그와 함께 연구한 듯하지만, 당시 두 학문의 연구 특징을 보아서 당시의 연구기초인 고대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글에서, 재발견한 기하학적 지도제작의 관점과 방법에 의해 나온 지식들은, 알베르티의 원근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에우게니우스 4세의 교황청 법정과 함께 피렌체, 볼로냐, 페라라 등지를 여행하면서 알베르티는 그와 같은 생각으로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결실이 있는 교류를 가졌다.

특히 피렌체에서는 조각가 도나텔로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가깝게 사귀면서, 그의 주요업적 가운데 하나인 화가의 원근법을 체계화했다. 1435년에 쓴 회화에 관하여 De pittura , 회화론에서는 판넬이나, 벽의 2차원 평면 위에 3차원 장면을 그리는 방법을 처음으로 설명했다. 이 저서는 이탈리아의 미술(특히 회화분야), 공공시설의 건축에 즉시 깊은 영향을 끼쳐 원근법적 르네상스 양식의 정확하고. 널찍하며, 기하학적으로 질서 있는 공간을 낳았다. 그 뒤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등 예술 대가들과 이론의 연구자들이 알베르티의 이러한 원근법 연구를 정교하게 가다듬었지만, 그의 원리는 에우클레이데스가 평면기하학에서 이룩한 업적처럼, 원근법에 관한 투영과학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여기에서 알베르티는 회화의 필수적 개념으로 과학적 요소를 언급한다. 그는 회가 또는 조각가들에게 불가결한 지식으로 수학적 기본적 개념이나, 원근법적 표현을 위한 기하학 지식을 갖추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베르티와 알베르티의 지식과 사상은 동시대의 젊고 유망한 예술가들 예로 들면 조각분야의 도나텔로, 회화 /건축분야의 미사초, 건축분야의 브루넬레스코 등에 아주 큰 영향을 주어, 동시대에 펼쳐지고 있는 15C 전반기 피렌체 중심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영양분으로 또는 밑거름으로 충분히 반영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