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2. 트레첸토~ 콰트로첸토 르네상스의 여명.(프로방스 지역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
위의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세말의 교황권 vs 황제(왕)권에서 결국 패배한 것은 교황권이였고, 그 결과는 교황이 프랑스의 남동부에 위치한 아비뇽의 소도시에서 프랑스왕의 보호 하에 약 100년 동안 지내게 되는 아비뇽 유수의 시련이었다. 아비뇽유수로부터 종교회의로 인한 교회의 대분열은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황권의 약화로 의미했고, 또한 로마 교황청의 위상도 그만큼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서양의 예술사에서 이 기간이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예외의 결과가 낳았는데, 그것은 아비뇽의 초대로 간 시모네 마르티니의 활동이었다. 교황청의 위신과 권력이 견제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종교수장으로써 외교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화려한 외관의 건축을 가지기 원함으로써, 이 지방의 예술이 발달하게 되는 것이다. 시모네 마르티니의 초대도 그런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흔히 시모네라고 불리는 시모네 마르티니는 기존 연구의 성과로 보아서, 두초 디부오닌세냐의 제자임을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그는 두초와 함께 14C 초반의 이탈리아 시에나파의 대표적인 회가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시에나지역 중심으로 이십여 년 간 활동하면서, 그가 내놓은 미술작품의 특징은 두초와는 다른 특성들이 보인다.
그의 대표하는 작품인 『수태고지(1333년)』를 자세히 드려다 보자. 이 그림은 제목 말 그대로 수태고지의 장면을 묘사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늘에서 내려와 성모마리아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의 첫마디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Ave gratia plena)”를 말하는 장면을 임을 알기 위해, 그의 입 주위에 이 문장이 길게 늘어서 옅게 음각해 놔 마치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의 원손에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오른손은 마치 대화를 시작하려고 하는 듯, 한 자세를 하고 있다. 또한 성모 마리아와 가브리엘 가운데는 처녀성을 상징하는 흰 백합이 꽃병에 꽂혀 있으며, 중앙의 뾰쪽한 아치 아래에는, 성신의 상징하는 비둘기가 네 날개를 가진 천사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성모 마리아는 이때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는데, 천사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란 표정이다. 성모 마리아의 당혹스럽고 수줍음을 나타나는 얼굴표정과 마치 떨고 있는 듯한, 곡선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성모 마리아의 몸의 율동과 손의 위치에서 보이듯, 매우 인간적인 반응을 하고 있다. 그 전의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에서 보이는 예수나 마리아 등의 주요인물을 표현한 인간의 모습과 그 표정은 거의 무표정으로 나타나는 반면, 그의 작품 『수태고지(1333년 무렵)』는 주요인물에 대한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첫 시도라 할 수 있다. 중세 시대의 작품은 신적인 위치에서 바라봐야 할 예수나 마리아, 혹은 성인들의 얼굴표정이나 몸짓 등은 감히 인간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은 상상하지 못 할 짓이었고, 회화에서 그런 감정은 다른 사물이나 동물 등 상징적인 것을 나타나는 그림으로 대신하거나, 주변의 사람들의 표정이나 눈물 등으로 그림에 놓인 상황 분위기의 파악하려고 하였다. 앞서 말한 조토의 작품에서도 그러한 특성은 그대로 보이고 있다,
이 그림은 그림 내용과는 별로 사실 바탕의 색을 금박사용으로 인한 후광 효과를 기대하려는 등 매우 진부하고 옛 고딕의 성격을 잘 나타나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주요 인물에 대한 묘사는 사실적인 느낌으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모네 마르티니는 본질적으로 궁정미술을 발전시켰다. 그의 그림 특히 패널에 그린 그림들은 금박을 세공하여, 반짝거렸고, 멀리서도 선명하고도 화려한 색체들로 하여금 빛을 발휘 하였다. 바탕의 색을 마치 장식의 보석을 세팅한 것처럼 화려미를 부여했다. 반면 주요인물의 표현은 사실적이고, 세련되고 우아한 미적 요소가 있었다.
그는 종교화 등 전통적 소재를 다툰 작품을 관습적은 방식으로 나타났다. 후광효과인 금박사용이나 나무 패널을 이용한 제작방식 등은, 그가 아직 중세적인 모습 그대로 인 것을 말해 준다, 그가 제작한 몇 몇의 작품은 그림 속에 표현된 중요/주변 인물의 크기 차이나, 인물과 사물의 배치, 세밀한 묘사의 수준차이도, 역시 그가 아직 중세 고딕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제약하는 현실적 요건 속에서 작품『수태고지』는 색다른 모습으로 그의 작품속의 독창성을 갖는다.
아비뇽의 교황청이 그토록 그를 원하는지 알기 위해, 그가 남긴 그림의 위상에 대하여 설명과 평가를 나타나기 위해 그가 남긴 작품 몇 점을 간단하게 마 더 설명할까 한다.
1315년에 시에나 시청을 위해 주문받아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화『마에스타』는 그가 최초로 그린 작품으로 시에나 대성당에 있는 그의 스승인 두초가 남긴『마에스타』(1311년에 완성) 에 비견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그림은 옥좌에 앉아 천사에 둘러쌓은 성모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이탈리어 maesta 의미의 뜻은 “장엄한“ 대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습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두초가 남긴 『마에스타』는 평면적인 비잔틴 양식으로 이 그림에서 그가 표현한 인물들은 세련되고 우아하지만, 실상 인물 표정 등이 사실적이지 못하고, 너무 고정적 위치여서, 입체감이 떨어지고. 공간의 창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반면, 그의『마에스타』는 꽉 차있지만, 공간의 여백이 있는 듯 보이며, 인물 표정과 손짓 등으로 표현한 율동감은 그림에서 입체감을 돋보이고 있으며, 그가 관찰력에서 나온 사실의 표현하는 능력이 한층 세련되고, 인간적인 반응이 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시모네는 1317년에 초상화이자, 정치적 목적으로 그린 툴루즈의 주교이었던 『성 루도(이)바쿠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가 그린 성 루도 바쿠스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자이었지만, 동생 로베르를 위해 왕권을 포기하였으며, 자신은 신부가 되었고 후에 툴루즈의 관구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사치스런 관구의 주교궁에서 살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진다.
성 루도(이) 바쿠스의 초상화를 주문한 인물이 동생인 로베트이었고, 시모네가 그린 그림에서 보이듯,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있고, 옥좌에 앉아 있는 성 루도(이)바쿠스가 동생 로베르에게 왕관을 수여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는 로베르가 물러 받은 권력이 합법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 그림은 중세 고딕의 특성을 말해 주는 듯 성 루도(이)바쿠스를 동생 로베르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렸다. 상징적이고 신성한 인물을 크게 나타난 전통적인 중세 그림의 특성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보듯 치밀하게 구성된 인물 묘사는 여기에서도 그만이 가지는 그림에 놀라운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시모네의 작품에서 가장 생기 넘치고, 율동적인 장면으로 뽑으라고 하면, 대다수가 시에나시청사에 있는 프레스코화 『폴라아노의 귀도 리치오』를 선택한다. 이 그림 장면은 시에나의 장군이었던 구이도리초 다 폴라아노가 멋진 마구를 세운 말을 타고, 요새로 둘러싸인 언덕 꼭대기의 도시와 부대의 야영텐트가 있는 불모지로 달려가는 모습을 담겨져 있는 기마초상화의 그림이다. 실제로 말이 움직이는 듯, 기마초상화의 그림에서 철갑무장을 장수의 말을 탄 멋진 자태는 이 시기 중세의 기사도를 내비친다.
또한 그는 이전의 치마부에, 조토 등 당시 저명한 미술 대가들이 참여한 아시시의 산 프렌체스코 성당에 뛰어난 프레스코화 몇 점을 남겼는데, 산 프렌체스코 성당의 상원에 있는 성 마르티누스의 생애를 담긴 그림 몇 점은 그의 그림인 것이 분명하다.
그 외에도 그의 유명 작품에는 『장엄』, 『성모와 성자들』, 『성고』 등 제단화와 프레스코화 등에서 알려진 다수의 작품이 있다.
1339년 교황 베네딕투스 12세의 초청을 받아들어, 아비뇽에서 말년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거기에서는 회가로 일하지 않고, 주로 공무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머무른 동안, 그림 몇 점을 제작한 것은 확실하나, 아쉽게도 그 그림들은 유실되어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향으로 마테오 조바네티 등 프로방스지역 아비뇽의 화파가 나타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그는 시에나 및 프로방스지역 아비뇽의 화가들에게 준 그의 영향은 크다.
시모네가 정착한 전후의 시기에 형성된 프로방스지방 아비뇽의 화파 1세대들은 주로 익명이어서 잘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로 인하여 프로방스지방에서 이탈리아 예술이나 이탈리아풍 예술의 보급에 다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12C-14C 프로방스의 지역 예술에서 아비뇽 외 르네상스의 정점다리의 역할로 중요한 역할을 당담하는 지역이 제 3장에서 언급된바 있는 프랑스의 디종 지역 중심으로 한 부르고뉴 지역의 예술인데, 그 중 부르고뉴의 예술 창시자인 클라우스 슬뤼터르의 조각예술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브뤼셀에서 북유럽(네덜란드지방)의 사실주의에 입각한 예술을 배워 프랑스 동남부지역에다 그 지역의 문화에 맞게 배운 기술을 적용시켰다. 이는 큰 반항을 얻어 곧 프랑스의 고딕 말기-르네상스 문화 예술의 특징이 되었다.
클라우스 슬뤼터르(클라우스 더 슬뤼터르 판 하틀림)는 1379년경 브뤼셀의 석공길드의 회원으로 역사에 첫 등장한다. 그는 일단 네덜란드의 하틀림에 있는 그의 가족 공방에서 채석공의 일을 배운 뒤, 브뤼셀의 정규미술교육을 받은 다음, 조각술의 미술방향으로 진출 한 것으로 보인다.
1385년에 프랑스 동남부의 도시 디종에 가서 궁정조각가 장 드 마드빌의 공방에서 일하였는데 그곳은 부르고뉴의 공작 대담공 필리프를 위한 조각을 제작하여 공급하는 곳이었다. 당시 회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른 조수들보다 보수를 더 많이 받으면서 일을 했음에서, 아마도 그의 재능이 특별했음을 알 수 있다. 1389년 드 마르빌이 죽자, 그는 수석 조각가가 되었다.
첫 번째로 주어진 중요한 일은 디종에서 멀지 않는 거리에 있는 샹몰의 샤르트뢰즈의 수도원의 정면 현판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그는 현판 제작하는 일의 감독관이 되어, 정면 현관을 다시 설계하면서, 자신의 조각들을 포함시킨다.
슬뤼터르가 새로 설계한 최종 설계도에는 대담공 필리프대공과 그의 부인이자 플랑드로(플란더즈)의 왕녀인 마르가레트가 무릎을 꿇은 모습의 인물상이 현관의 양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들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과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가, 트뤼모에 자리 잡은 성모자에게 그들 부부를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조각을 하였다. 여기에 슬뤼터르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예언자들의 조각상을 포함시켰다. 이 조각상들은 모두 아스니에르에 있는 채석장에서 새 돌이 도착한 뒤, 1390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해 완성 뒤에 제 자리에 놓였다.
트위모에 자리한 성모상은 전통양식으로 만든 반면에 무릎을 꿇은 필리프대공과 그의 부인 마르가레트의 실물 크기의 조각상은 혁신적이게도 단독으로 세워놓았고 자연주의적인 처리법을 보여주고 있다. 샹몰의 샤르트뢰즈의 수도원은 프랑스 대 혁명기에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그 현관만이 온전히 보존되어 남아 있다가, 19C에 그 자리에 세워진 (정신)병원의 예배당에 결합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는 1390년부터 1397년까지 샹몰의 샤르트뢰즈 수도원 예배당을 위해 성모마리아, 세례자요한, 성 안토니우스 등 많은 조각상을 제작하였으나, 후세에 파괴되어 전할 길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현재 샹몰의 샤르트뢰즈의 수도원에서 슬뤼터르가 구상하고 제작한 작품 중 지금까지 온존하게 그 자리에 남아있는 작품은 『모세의 샘』뿐 이고, 나머지는 파괴되거나, 공과 공비 묘비와 제단화등과 함께 디종 시립미술관에 옮겨져 있다.
현재에도 그의 이름이 조각가로써 유명하게 된 이유는 1395-1406년경 제작한 『모세의 샘』이라는 세례용 성수반의 아름다운 조각품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샤르트뢰즈 수도원 회랑의 정중앙 가운데에 두기위한 거대한 세례용 성수반이었다. 육각형 틀의 돌 위에 놓인 성수반의 꼭대기에는 원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재현한 그리스도의 수난상이 있었으나, 프랑스 대 혁명기에 이 수도원이 파괴되면서 손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과 함께 존재하였던 수난상에 속한 여려 인물상은 1399년에 조각했으나, 지금은 파편의 일부만 남겨져있다. 성수반의 받침대 위에 있는 육각형 기둥의 모서리마다 작은 기둥이 하나씩 있는데 그 위로 흐느끼는 천사가 조각되어 있다. 천사들의 활짝 피는 날개는 관람하는 이들의 눈이 저절로 위로 향하여 보는 듯 예수의 수난상을 놓아져 있는 곳으로 향하도록 설계한 의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밑의 육각기둥의 각 벽면에는 제각기 실물크기로 한 예언자들 모습으로 된 상이 각자 개성이 있게 조각되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모세, 에레미야, 다윗, 디니엘, 이시야, 사가랴 이다. 여기서 표현된 각기의 예언자들의 자세와 특징은 그들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에 적힌 예언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슬뤼터르가 가지는 조각예술의 특징인 인물의 얼굴과 옷의 주름등에서 보이는 사실주의적 표현이 드러난다. 마치 손과 몸이 움직일 것 같은 세밀한 옷의 주름과 개성이 넘치는 얼굴 표정에 수염의 땋은 잔 모발까지 어느 하나에도 사실적인 관찰 경험의 토대로 만들어 졌음을 틀림없다.
사실 이런 조각부조는 프랑스 내 대성당의 조각 부조에서도 그런 기교가 나타나 보인다. 그러나 슬뤼터르는 이런 것들의 더 심화하여, 조각으로 한 차원 다른 예술을 보임으로써, 프랑스의 동남부중심으로 한 고딕형태의 마지막 결정인 국제양식이 형성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 국제양식은 프로방스 지역에서 그 지역 지배자인 부르고뉴공의 성을 본 따, 부르고뉴 양식이라고도 한다. 회화부분에서는 마치 조각부조를 본 느낌이 들도록 하는 세밀한 묘사와 치밀한 감정표현 그리고 채색술의 발전영향은 크게 보아 국제양식의 한 부분으로 발달한다.
이런 양식은 프랑스 내뿐만 아니라, 독일남부지역, 이베리아반도, 이탈리아 북부지역으로 펴져 나갔다. 직접적으로 이탈리아 롬바르리아 지역의 국제양식에 영향을 끼친다.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분명 르네상스의 앞 시기, 쿠아트로벤토의 양식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후대 르네상스 예술가의 선배격인 금속세공업길드의 장인집단이 활달하게 발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청동부조의 대가인 안드레아 피사노의 활동시기도 이 무렵 일이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안드레아 피사노의 작품에 대한 기록은 피렌체 세례당의 남문 제작일자이다. 이 문에는 그의 서명과 함께 1330년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문이 완성한 것은 1335년이다.) 1330년 그는 그 문을 주문을 받고 일련의 청동부조를 만들기 위해 밀랍으로 주형을 떴고, 그 이후 베네치아의 주종사 레오나로드 아빈치(L Avanzi)와 그의 아틀리에가 주조 작업의 일이 전담하였다, 그 다음 청동의 얕은 돋을새김의 세밀한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해 성공리에 끝나면서 완성되었다.
그가 제작을 주도한 피렌체 세례당의 남문에 대한 구조와 주조 방법에 대한 것을 자세히 알아보자.
세례요한의 이탈리어 표현인 산 지오반니(San Giovanni)세례당인 피렌체 세례당은 피렌체에서 현존 가장 오래된 종교건축물이고 종탑, 성당건물인 피렌체 대성당(두오모) 그렇게 한 세트를 이루고 있으며, 피렌체 대성당(두오모) 건립되기 전까지 성당으로 사용되는 바, 원래 중세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건축시 파사노에게 정문인 남문현관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요청 받았다. 이에 피사노는 문에 요한 생애를 담긴 28장면을 청동 부조를 만들어 넣음으로써, 이를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남문의 전면적 이미지는 독립적으로 서 있는 조각의 형태는 아니지만, 평면적인 배경에서 돌출한 (28개의) 청동조각의 부조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조각의 형태를 부조(relief scuipture)라 한다. 밀랍으로 다양한 형태의 틀을 만들고 그 후 밀랍모형을 석고나 테라코타의 점토를 덮는다. 이것이 완전히 굳으면 뜨거운 청동 녹인 물을 붓는데, 이를 통해 밀랍이 녹으면서, 따로 뚫려 논 구멍사이로 녹인 물이 흘려 나온다. 그 상태로 액체인 청동이 굳으면 석고나 점토를 때어 내면 청동모형이 드러난다. 이것이 녹인 밀랍의 주조법인 로스트왁스인데, 이 방법을 쓰면 언더컷의 구애를 받지 않으므로, 정밀한 제품의 주조가 가능하다. 그는 전문 금세공사답게 이 방법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문을 청동으로 주조한 후 문을 문질려서 거친 면을 없애고, 또한 이 단계에서 아주 섬세한 묘사를 금박으로 세기는 도금 작업도 이루어졌다. 지금은 오래되어 그 때 새긴 금박이 모두 닮아 없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지금도 보면 전체 작품에서 하나, 하나 장면이 눈앞에 튀어 나올 듯, 입체적인 영상처럼 보이는데 금박을 붙인 상태로 만들어져 공개 하는 시점인 사람들은, 이 뛰어난 작품을 보고 아마 놀라지 않을까 생각된다.
청동으로 만든 부조에서 28개 장면 중 한 장면인 「세례자 요한의 시신 운반」장면이 나온 부분을 한번 보자. 이 그림에서 보듯 세례자 요한은 죽어서 머리와 발만 빼고, 천으로 온몸을 덮고, 반듯이 누인 자세이고, 그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을 나르고 있다.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의복의 조화로운 선들이 부드러운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
전체적 분위기와 어울려서 이에 나타난 곡선 패턴의 어울림은 조각의 전체모습에서 시신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약간씩 흔들리는 움직임을 보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조화가 잘 되어있다, 또 한 일부는 머리를 숙이고 슬픔을 속으로 삭이며, 흐느끼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의복의 주름에서 한 발짝씩 내딛는 한 몸과 발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우리와 가까운 앞의 세 명의 사람의 부조는 뒤통수의 머리와 의복을 입은 뒷모습만 보여주지만, 뒤에 있는 사람들보다 움직임이 더 입체적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부조의 다양한 깊이를 활용한 조각 형태는 마치 실제 공간을 묘사한 듯, 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의복의 자체도 중요하지만 의복 안에 우리 몸의 작용이 숨겨있다는 알아야 그림의 부조에서 그만이 가진 예술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정면을 바라보자. 그리고 우리들에 가까운 정중앙의 위치한 사람을 바라보자. 시신의 무게 때문인지 구부정하게 굽힌 어께의 모습을 보이는가? 이것은 인체 몸의 움직임과 작용에 대한 대단한 관찰력이 없이는 묘사하기 힘든 것이다. 또한 그런 율동을 청동으로 부조하기란 대단히 힘든 것이었다.
이처럼 인물들의 묘사 형태의 변화, 특히 주변 인물들을 장식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볍게 묘사하였던 고딕 미술에서 초기 르네상스 미술로 넘어 가면서 나타난 기본적인 변화중 하나이었다. 초기 르네상스 때부터 예술가들은 옷 아래 있는 인체의 활동적이고 유기적인 육체를 묘사하기에 관심이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의 예술가로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 또 하나 착수했는데, 피렌체 세례당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피렌체대성당과 종탑 건설이다. 건설 책임자인 조토가 1437년 무렵에 사망하자, 1340년 그는 조토이어 건설공사의 감독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성당 종탑의 아랫부분에 설치할 조각들과 조각상들을 설치하였다. 이 공사는 그의 아들인 니노를 포함해서 총 8명의 조각가가 고용되었다. 서명은 하지 않았지만, 안드레아 특유의 작품에 대한 느낌이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표현한 인물상, 세밀한 묘사에 사실적인 공간 설정 등에서 그의 작품의 설정이 보인다.
그러나 종탑 건축과정의 처음인 조토의 설계안에 너무 벗어난 그의 생각에 대한 마찰 때문인지 완성하지 못하고 결국 해임되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의 의도가 종탑의 공사과정에서 계속 중심을 잡고 있다.
그 후 그는 피샤로 가 공방을 차리고, 종교적인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1343년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 1340년 추정되는 『성모자와 함께 있는 성인들 모습을 담긴 조각상』을 만들어냈으며, 피샤 대성당의 파사드를 위해 『성모자』상을 만들어냈다. 인물의 자연스러운 비례는 그의 작품의 보는 눈의 핵심이며 이를 중점을 두고 봐야한다.
안드레아 피사노는 피렌체의 회가이자 건축가인 조토의 영향을 받았으며, 조토가 그림으로 이룬 것을 그는 조각으로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양식적이고, 평면적이며, 장식적인 미술양식인 전통고딕양식이나, 비잔틴양식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자연스럽고, 입체적이며, 사실적인 것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조토와 같은 생각을 가진 조각가이었다. 그런 이유로 피렌체의 조각 창시자라 불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고, 로벤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등 르네상스조각가들은 그의 작품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특히 기베르티는 그에 이어 만든 피렌체 세례당의 문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여 평생을 다 바치어 현재 위치상으로 북문과 동문 (일명 천국의 문이라 불려진다.)을 만들었다.
그는 1345년 정도에 당시 이탈리아반도를 죽음의 몰살로 만들었던 흑사병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유럽대륙에서 살던 유망한 예술가들도 그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다수가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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