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11. 베네치아 화파(畵派)와 르네상스의 미술상 변화
적어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15C 후반부터 시작되는 미술 변화 후기양상을 살펴볼 때, 르네상스 미술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다른 지역을 살펴보자면 베네치아지역을 언급하는 것이 옳다. 베네치아는 15C말-16C중엽까지 이르는 이탈리아반도의 정치/국제적인 요인에 의한 혼란 상황과는 달리 유일하게 경제적인 번영과 공화국으로써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베네치아의 지리적인 요건에서 나오는 해양국가로 출발하였기 때문인데, 당시 유럽에서 강대국인 스페인 무적함대와 맞먹는 함대(해군)을 가지고 있었고, 그 함대로 인해 현 그리스의 섬들을 식민지로 삼는 등 지중해 무역권을 장악하였기에 지속적인 경제적 번영으로 독립유지가 가능했다. 이러한 번영의 영향을 받아서 베네치아의 예술의 성향은 정치/ 경제적 요인으로부터 크게 좌우 되지 않아, 그런 요인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비교적 예술적 자율성이 있는 지역이었다.
베네치아 지역의 미술 전체적인 화풍에 대한 특징으로 애기하자면 흔히 피렌체지역 미술과의 비교로 한다, 어떻게 보면 피렌체미술이 디세뇨 Disegno(소묘), 선, 원근법 강조한 것과는 달리 베네치아의 미술은 색체를 통해 형태를 창조하고, 여기에 다양한 구성 요소를 통합 해 나갔다, 여기서 색체는 그림(소묘)을 그린 뒤에 부가하는 장식류가 아닌 회화의 핵심요소로 발전해 나갔었다,
15C 베테치아의 화파에 있어 가장 중요한 회가이자, 가장 전형적인 화파인 한 사람을 뽑히라고 한다면 아마도 조반니 벨리니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벨리니 家의 공동운영하는 가족 작업장을 운영하였고, 그의 아버지 야코포 벨리니가 이끄는 이 작업장을 물려받아, 거의 평생 동안 거기서 생활하였다. 야코포 벨리니는 젠틸레 디 파브리아노의 제자였고, 그를 열성적으로 따른 것으로 보는데 심지어 큰아들이 태어나자. 그 이름을 젠틸레로 이름을 붙었다.
조반니 벨리니의 형인 젠틸레 벨리니 역시 그 당시 베네치아지역에서 대표적인 유명한 회가 이었다, 이는 1478년 이웃 강대국이자 가톨릭교의 적대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 지도자 술탄이 베네치아정부와의 화친 요청과 함께 뛰어난 초상회가를 요청하자, 그를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파견한 것으로 보아 초상회가로서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대표작인『산마르코 (대성당) 광장의 행렬』『산 로렌조 다리 근처에서 일어난 진실한 십자가의 전설』등으로 보아서 베네치아의 역사와 생활풍속이 담긴 그림 또는 자선제단으로부터 주문받은 (가톨릭의) 행렬과 의식을 담긴 연작들을 주로 제작 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제작한 작품은 대부분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사후, 그의 동생인 조반니 벨리니가 이어 그러서 완성한 그의 작품『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 하는 성 마가』를 포함한 현존작품에서 대형 초상화와 베네치아의 경관을 결합된 그림들이 자주 보인다. 그가 그린 작품의 그림들은 15세기의 베네치아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풍속)과 건축에 관한 기록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반니 벨리니는 아마도 이러한 가풍(家風)적 분위기속에 젠틸레 디 파브리아노의 미술(과정)에 섭렵한 아버지 야코포 벨리니의 교육과정을 받으며, 착실하게 미술적 재능을 키워간 것으로 보인다. 현재에 남아있는 야코포 벨리니의 두 권으로 된 스케치 노트에는 각종 드로잉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스케치 노트에 주변 종교적 주제는 네덜란드의 화파들에서 보았던 배경과 흡사하며 기념물들을 원근법을 적용하는 그림들로 가득 들어있는데, 이는 아마도 아들들의 교육과정에 활용하였을 것이다.
조반니 벨리니 초기에 독자적으로 그린 그림들에서 아버지 야코포의 우아한 양식을 바탕으로 파도바 유파를 접목한 그림으로 나타나는 양식으로 한 기본 틀을 보여주는데, 특히 매부인 만테냐의 수수한 양식의 영향을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1460년 만테냐가 만토바의 궁정으로 떠난 뒤에도 이러한 영향은 뚜렷이 보이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제작된 그의 초기 작품들로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Crucifixion〉·〈그리스도의 변모 Transfiguration〉·〈천사들이 떠받치고 있는 죽은 그리스도 Dead Christ Supported by Angels〉등이 있다.
이 시기와 이전에 제작된 몇몇 작품들이 현재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 곳곳에 전시/ 보관중에 있으며, 그 외의 것들은 베네치아의 코레르 시립미술관에 있다. 또한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3폭 제단화 4점과 밀라노에 있는 2점의 『피에타 Pietà 』역시 그의 초기작품들로 알려진다.
종교회가로써 초기 작품의 특징은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구세주의 피 The Blood of the Redeemer』와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통 The Agony in the Garden 1459』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모두 템페라로 제작되었으며, 그 자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정서와 깊이 있는 종교적인 감성을, 파도바 유파의 장엄함 및·엄격함의 특징과 잘 융합시켰다.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은, 초기의 성모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대부분 표현이 부드럽지만, 장식적인 화려함보다는 자연 관찰에서 끌어낸 감각적인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밀라노의 피나코테카 디 브레라(Pinacoteca di Brera 브레라 미술관)에 있는 그가 그린 초기의『피에타』그림에서 보듯 그는 매우 현실적인 그림으로 성모를 표현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조각처럼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이 없지만, 오히려 이 수수함으로 나타난 현실적인 성모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느낀다.
또 그림의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양감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피렌체 화파의 전통이나 특히 만테냐 양식처럼 선을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많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에서는 선의 사용이 만테냐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우며 무엇보다도 묘사된 대상의 표면이 극적으로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며 드러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인 마사초와 당대에 가장 뛰어난 르네상스 회화를 보여주었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마찬가지로, 조반니 벨리니도 처음부터 자연광을 그린 화가였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통』에서 보듯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넓은 풍경이 이 장면의 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풍경의 정교한 선적 구조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무엇보다도 새벽빛을 받은 듯 그늘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나 찬란하게 반사되는 면을 표현한 색채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에 있어 최초로 새벽녘의 빛을 묘사한 최초의 그림으로 빛과 색체의 관심, 부드럽게 완화된 거친 형태, 분위기 있는 풍경의 탄생을 보여주며, 이후 만테냐의 그림 특징으로 부터 멀어지고, 색체 위주의 감각적인 양식을 전개시킨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뒤 1세기가 넘도록 끊임없이 발전한 베네치아 풍경화의 첫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 형태는 그에 의해 창조되어 16C 대가들 - 그의 제자였던 조르조네, 티치아노 등에게 전수되었는데, 그의 독보적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에게 교육받지 않는 미술가들, 다른 화풍을 내세운 회가들도 그의 풍경화 양식은 깊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 파장은 이어졌다.
특히 1475-6년경 당시 국제적인 미술 중심지였던 나폴리에서 교육받았다는 화가 안토넬로 다메시나가 고향인 베네치아에 방문했다. 그는 나폴리에서 프로방스와 플랑드르의 미술가들, 특히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을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유화기법을 베네치아에 소개했음을 틀림없는 사실이다. 두 사람에게 친분과 만남과정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조반니 벨리니에게 달걀을 주 원료로 하는 템페라 기법 대신 유체물감을 사용하는 새로운 기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조반니 벨리니는 이탈리아 미술사에서 유화기법을 가장 먼저 사용한 거장에 속하며, 그의 미술세계는 이전의 선을 중시하의 양식에서 색체와 빛의 사용을 중시하는 웅장하고 기품이 존재하며 차분한 미술세계로 범위가 넓어진다. 이는 그의 공방에서 배운 제자들 즉, 조르조네, 티치아노 등에게 전수하면서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인 빛과 색체를 중요시하는 기법으로 한층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조반니 벨리니는 국가공식회가라는 공식직함을 받고, 베네치아 총독궁의 역사화 직업에 나선다, 이들 작품은 1577년에 전부 화제로 불타 소실되어져서, 그 예술적인 참모습을 찾기 힘들지만, 총독궁 역사화 과정을 위해 남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인 총독의 초상화『총독 로레다노 Doge Loredano)』를 비롯한 몇 점이 다행히도 남아있어, 조반니 벨리니의 예술에 대한 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다,
이 무렵, 초상화 몇 점도 그렸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남아있는 그의 대표적 초상그림은 그의 베네치아 총독궁의 국가공식전속회가 시절인 1501-2년 무렵에 완성된 작인 『총독 로레다노 Doge Loredano)』를 비롯하여. 『피에트로 벰보 Pietro BemBo 1500년경』등이 있다. 『총독 로레다노』에는 절대군주가 지니고 있는 현명하고 관대하면서도 확고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으며, 영국 왕실(왕립 컬렉션)이 소장하고 있는 『남자(Men)』 또는 『피에트로 벰보 Pietro Bembo 시인 초상화』로 불러지는 작품은 등장인물(시인)의 감수성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여기에도 풍경을 배경으로 3/4 측면상으로 인물상으로 꽉 찬 네덜란드(플랑드로) 양식 유형으로써 나타났는데, 이는 네덜란드(플랑드로) 양식에 대한 그의 높은 관심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의 중/후반기 예술작품 중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종교적인 그림을 그린 제단화인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산 조베 제단화(1480-85년경)』, 『산 자카리아 제단화(1505년경)』등 네덜란드 지역에서 전해온 ‘성스러운 대화‘의 성모자 군상의 그림으로, 그 당시 그가 그린 작품은 가장 인기 있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반 타원형의 건물 또는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성모의 반신상과 종종 난간에 서 있는 아기 그리스도의 전신상을 담은 그의 성모화 유형 그림은 그가 사후에도 그의 작업장에서 배운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경쟁적으로 수 없이 그러져 왔으며, 이러한 현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
다른 이의 이러한 성모화 유형 양식도 지속적으로 이어졌지만, 당시 벨리니의 성스러운 대화 양식의 제단화 그림은 베네치아지역은 물론 페라라 등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기가 있어서, 이와 유사한 그림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는 파급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첫 예는 1867년 무렵에 소실되어 모작만 남아있는『산 조반니 에 파울로 성당의 제단화』이며 『안토넬로의 산 카시아노 제단화』, 『피에로의 브레라 제단화』 역시 그가 그린 초기의 ‘성스러운 대화“를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다.
그가 그린 초기의 유형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 1480-85년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 조베 제단화』인데, 이 그림은 매우 높은 옥좌, 연이어지는 공간의 연출, 인물의 위치와 천사 음악가 등장 등 기존의 양식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배경이 건물의 실내에 위치하고, 강한 빛이 오른쪽에 들어와 후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역병의 수호성인인 성 조베와 성 세바스티아우스의 누드 상을 광채로 감싸고 있는 점은 이 그림만이 나타날 수 있는 특이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그림 이후에도 프라이 제단화 등 성스러운 대화를 주제로 하는 유사한 그림 몇 점을 더 제작한다.
그의 ‘성스러운 대화‘의 성모자 군상 그림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1505년 그의 나이 75세 노년 때의 피에트로 카펠로를 추도하기 위한 그림을 주문 받아 그린 『산 자카리아 제단화』로 벨레니가 평생을 연구해 것들, 그동안 이루어졌던 실험을 총집결하고, 모든 역량을 쏟은 최고의 결정체인 작품이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에서 그는 특히 색체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동시대의 유명 작품들 비교할 때,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림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살피지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체들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는 옥좌 뒤에 있는 황금색에 빛나는 벽감은 바라보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따뜻한 온기를 불어주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성모마리아가 안고 있는 팔에는 제단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하는 듯, 손을 들고 있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 모습이 보인다. 옥좌 밑에는 천사 한명이 종용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고, 성인들이 옥좌의 양편에 조용히 서 있다. 가장 오른편으로부터 차례로 성 베드로는 열쇠와 책(성경)을 들고 있으며. 성 카타리아는 순교의 상징은 종려 나뭇잎과 부러진 형틀을 들고 있고, 성 루치아는 무언가(물약)이 든 투명한 유리병을 들고 있으며, 성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이 라틴어로 변한 성경을 읽는 듯,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이 성인들의 자세는 서로 대칭을 이루는데, 안쪽의 여성 성인(성 카타리아와 성 루치아)은 성모자를 향하여 마주하고 있고. 바깥쪽의 남성 성인(성 베드로와 성 히에로니무스)은 이 작품을 보는 감상자를 향하여 앞쪽으로 서 있다. 독서에 열중인 성 히에로니무스를 제외한 성인들은 무언가 흘러 있는 듯. 깊은 사색을 빠져 있는 모습이다. 성모자도 그러하고, 밑에 있는 천사는 얼굴을 들었지만. 이 그림을 보는 감상자들을 주시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인 듯, 다들 각자 일을 열중하고 있다. 이렇게 보아서 이 그림의 전체적 구상은 물질계를 벗어난 피안의 영적세계를 나타난다.
조반니 벨리니는 이 작품의 그림에서 성모와 성인들을 전통적인 모습을 지키고 신성함과 위엄을 손상하지 않은 채. 매우 사실적이고, 살아 있는 듯, 한 모습으로 변화를 추구한다, 그 당시 같은 세대인 페루지노의 성모의 모습처럼 조용하고 아름다운 영적 세계를 자연 상태인 빛과 색감으로서 표현해서 나타냈던 것이다.
또한 부드럽고 따뜻한 색체를 사용하여 넒은 면으로 인물을 표현하였다, 기름 있는 유약성분을 사용하여 한층 풍부해진 색체로 입체감을 세심하게 나타나는 데, 이 그림에서 남성성인들의 모습이 장엄하면서도 율동감이 있는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보아서는 주변 비슷한 유형인 색이 넓게 포진하여 견고함이 부족하지만, 이런 것은 윤곽선으로 커버하고 또한 음영으로써 빛의 형태를 조정하면서 초점을 중심인물에 맞춘다.
이러한 작품의 그림 구성과 (유채)색체의 사용이 갖는 성질은 그의 후기적 제단화 작품들의 성격을 결정짓는 한 요소로 작용된다. 그 예가 바로 『산 자카리아 제단화』작품의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이 제단화에 나오는 주변 인물들을 옷은 좀 칙칙한 느낌을 줄 정도로 진녹색, 또는 회색의 상의와 갈색 계통의 하의를 입었는데, 이러한 효과는 중심인물인 성모자를 더 돋보이고 있다. 밝은 흰 색으로 아기 예수의 몸과 화려한 붉은 색 옷과 흰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를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같은 색의 계통인 색체를 보임으로써 초점은 정확히 맞춰지거나. 또는 흐려지게 나옴으로 몽환적이고 영적인 분위기를 고조 시키며, 신성한 이 장소의 경건하고 초자연적인 측면을 나타난다. 아래 밑 부분의 타일바닥은 위에서 내려 보는 시점으로 눈속임 기법을 동원하여 이러한 효과를 강조한다.
그는 격식으로 제단화 형식으로 된 그림 말고도 종교적인 내용을 현실의 풍경과 함께 초상화처럼 그리는 작품들도 좋아했는데, 특히, 단독으로 나오는 성모자의 군상을 좋아해서 끝없이 새로 그리던 주제였다. 이 주제를 다투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산 자카리아 제단화』와 동일한 시기인 1505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초원의 성모』이다.
『초원의 성모』의 주제는 풍경이 있는 성모자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듯 성모마리아와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잠든 아기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보는 관점은 그림에서 나오는 주 배경과, 성모마리아가 잠든 아기인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점과 표정,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당시 베네치아 미술은 아직 비잔틴 미술양식이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범위를 넘지 못하였는데. 특히 성모자를 그린 그림들이나 성인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종교적인 그림이 그랬다. 그림자체가 평면적이고, 달린 장식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성모자 주제로 작품인 『초원의 성모』 그림의 배경은 대단히 입체적인 요소가 자리하면서도 장식적인 요소가 없다. 『초원의 성모』작품의 그림은 생생한 시골 풍경과 현실적인 삶이 자리한다. 목동들은 성벽 바깥에서 소 때를 지키고, 성모마리아 오른쪽에 아마도 선-악의 힘에 서로 간 투쟁을 상징하려고 넣은 듯, 새와 뱀이 싸우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나무꼭대기에는 (일반적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아래의 싸움판을 지켜보는 듯,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그러다하더라도 현실적인 자연의 모습이 작품의 그림 전체 분위기, 대단히 따뜻하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결코 깨지 않으며, 파아란 하늘과 흰 구름, 초원 배경은 그 자체로써 성모마리아와 그녀가 안은 잠든 아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켜보는 양, 다정한 느낌이 난다.
더구나 밑에 있는 황토의 황금색 빛이 도는 부드러움은 이 분위기에 배(倍)가 되어 준다.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표정은 다정하면서도 슬프다. 어쩌면 후대 일어날 사건을 예감하는 양, 안쓰러움의 표정마저 보인다. 더구나 아기 예수가 성모의 무릎 위에 앉아 잠든 모습을 보면 마치 피에타 장면구도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성모의 파란색 겉옷은 하늘과 같은 색이어서, 비록 그녀가 땅에 앉아 겸허한 자세로 취하고 있지만, 후일에 천상의 여왕으로 즉위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조반니 벨리니는 배경을 그릴 때, 종종 수평면을 사용했으나, 여기서는 깊이감을 주기위하여, 삼각형의 구도를 이용했다. 먼저 앉아 있는 성모의 모습이 삼각형 형태를 이룬다. 하지만, 배경을 이루는 들판의 가장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 양쪽 끝으로 향하는 선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이 성모의 손가락과 연결하면 또 다른 삼각형의 구도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은 이러한 삼각형을 따라 배경을 오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소실점의 형성 즉, 초점을 들어내어 깊이감을 더해 준다.
조반니 벨리니가 당시 고령의 나이인 70세를 넘겨 살고, 또한 예술작품을 계속 이어갔기에
베네치아예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주도권을 놓고 피렌체, 로마 등 도시국가들과 경쟁할 수 있었으며, 그가 수용한 유채기법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법의 실험은 다음세대의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조반니 벨리니의 유체기법은 곧 베네치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로 퍼지는데 주로 그의 작업장에서 길러진 아틀리에 즉. 조수나 제자들 활약 덕이 매우 크다. 특히 그의 작업장에서 조르조네와 티치아노라는 베네치아의 르네상스시기 대표적인 거장들이 배출되었다,
회가인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년)는 조반니 벨리니가 이룩한 색체와 빛의 사용법을 전통으로 하는 베네치아 화파에서 가장 혁명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인물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아도 잘 알려지기 않는 인물이다. 특히 유아-청소년기 생애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다보니 신비스러운 인물이고, 갑작스런 흑사병 발발에 32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치고 말았기에 기록의 양이 많지 않아서 그러하다, 또 젊은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그에 의하여 완성된 작품도 몇 작품이 안 된다. 또한 5-6편을 빼고는 그가 그린 것에 대한 정확한 진위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작품의 성격과 예술성이 베네치아의 미술에 혁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에 대하여 많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1488년경 고향인 카스텔프랑코를 떠나 베네치아에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서 온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그는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 들어가 일찍이 그의 수석 조수이자 제자로 활동한 것을 보아, 그의 능력을 지켜본 조반니 벨리니 눈에 들기 위해 경쟁 기간을 두고, 나이를 감안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아서, 그의 나이 17-18세 무렵부터 작품 활동을 한다 할지라도, 예술 창작활동은 불과 15년 안밖에 되지 않는다.
스승인 조반니 벨리니의 특징인 유채의 밝은 색체와 빛의 조화로움을 나타나는데 있어 그대로 받아들인 그에겐 미술의 창작활동에 강력한 무기였다. 여기에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풍경과 자연을 묘사하는 수법은 당대의 미술 회가의 영향력을 미쳤는데, 그 역시 스푸마토의 부드러움을 활용한 회가였다. 다만, 기존과 차이가 있다면,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당대의 회가들은 풍경은 중심인물을 위한 신비롭고 분위기 있는 배경을 형성한 그림의 외적 수단으로 본 반면. 조르조네는 거의 그 반대로 설정했던 것이다. 그는 강렬하고 감상적인 풍경에 사람을 집어 놓기 위해, 인물을 그렸다. 스푸마토의 기법은 그의 인체 누드 상을 좀 더 부드럽게 해주는 요소로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스승인 조반니 벨리니의 영향으로 그는 초기에는 가톨릭의 종교적 그림 특히 성모마리아가 나오는 그림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성가족 1500년경』, 『카스텔프랑코의 성모 Castelfranco Madonna 1504년경』을 비롯해,『양치기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 1505년경』등이 대표적인 그의 초기 작품이다. 특히 고향인 어느 귀족을 위해 제작하였다는『카스텔프랑코의 성모』는‘성스러운 대화‘의 성모자 군상의 그림 발달과정 중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의 스승인 조반니 벨레니의 성스러운 대화 양식인 대표적인 제단화인 『산 차카리아 제단화』와 비교 할 때,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인물의 배치에 대한 간결도와 그림 배경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두 제단화의 차이에서 중요한 한 점은 그는 성스러운 대화의 모든 요소를 사용하였으나 새로운 방법으로 재배열하여 다른 의미를 띄도록 만들었다는 점인데. 스승 벨리니의 작품이 각 요소의 인물들이 후진 안에 모여 있고, 후진의 곡선 의 곡선을 시선을 표면으로 이끌며, 이것이 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특성인 내적조화를 이루는 점인데, 조르조네의 회화에서는 이러한 내적조화를 이끄는 구성원이 없고, 각지 나타나는 그림의 형태들이 표면으로 이끌어지기 않으며 측면에서 단절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할 경우, 그림을 보는 관람자들 입장에서는 밖으로 확장된 공간의 무한함을 느껴지게 한다.
이 그림 화면에서 본다면 공간은 이제 커다란 전제의 일부로써 공간과 인물사이 균형은 기존의 상황에서 크게 바꾸었다. 어찌 본다면 그림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균형을 맞지 않는 배경들이 위치한다. 때문에 온화한 분위기를 나타나는 그림화면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의 성격은 기존의 성기 르네상스의 회화에서 볼 수 없는 낮선 고립성을 갖게 된다.
게다가 원근법을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이 그림은 상/하단의 분리하며 성모의 위치상, 성인들과 떨어져 있다. 따라서 성모와 아기예수는 사람들과 접촉으로부터 떨어진 상태이며. 한적한 성 밖의 산길 비경으로 배경의 모습은 성모와 시적의 유사성으로 인해 하나으로 된 모습으로 비춘다. 어찌 보면, 성모의 근심어린 표정과 이 배경을 담아있는 정지한 듯이 조용히 펼친 베네치아 평원을 담긴 숨을 죽인 공간이 하나가 된 느낌을 준다. 따라서 고요한 외부 정경으로 된 배경의 차원이 긴장이 일어나는데, 그림의 주제로부터의 긴장이 아니라, 주제가 융합된 방법으로 긴장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기존의 르네상스 그림과 중요한 차이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관람하는 이들에게 느껴지는 포인트로 작용하면 주요 그림이 주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사건을 객관화된 시선의 낮선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계속하여 조르조네의 작품 성격에서 중요한 요소들로 작용하는 바다.
그는 뛰어난 초상회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유일하게 작품의 그림 뒷면에 남긴 서명과 연도/ 날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의심할 바 없는 귀족의 여인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라우라 Laura 1506』를 비롯한 그와 티치아노, 그리고 몇몇 베네치아 출신 회가들 놓고, 진위가 알 수 없는 『시인 안토니오 브로카르도 Antorio Brocccardo』, 5-6편정도 되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젊은 남자의 초상』등에서 어딘가 신비로움이 존재하고 있는 듯, 그의 예술성이 있다, 이런 그가 그린 초상화 그림들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혹은 우울한 사색의 시선을 던지는 느낌을 받는다.
『폭풍 The Tempest. 1508년경』은 그의 존재를 알리는 대표작품으로 베네치아의 미술에 있어 커다란 획을 긋는 작품으로 뽑힌다.
그는 이 작품에서 분명한 일화와 상징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대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집중한다, 그는 풍경안의인물을 두는 참신한 접근법을 선택했다, 이로써 풍경은 이 그림에서 단순한 배경으로 장식품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요 요소가 된다. 이 작품을 읽는 핵심은 자연적 풍경에서 나오는 인간과 자연의 연계. 분위기가 있는 풍경 속에 자리한 인간의정서나 행위/ 무위다, 작품의 그림에서 뇌우가 쏟아질 듯, 흐린 날씨속에 성 밖의 시골 풍경을 자리한 배경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의 모습은 자연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여신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를 지켜보는 군인의 모습을 한 남자는 여신을 지키는 한 사람의 무사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해석의 내막을 알 수 없다. 그들은 허구의 알레고리의 일부일 뿐이다. 실재로 현대 과학적 방안으로 들어난 작품의 수사에 따르면 특히, X-선을 비추자, 서 있는 군인 남성이 원래 앉아 있는 여성의 누드였음을 밝힌다. 혁신적인 기법으로 변경과 수정을 거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회가가 처음에 의도하였던 원래 여성의 누드의 모습은 또 어떤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끝없는 의문투성이의 질문만 오고 갈뿐, 정확한 내막의 답이 나오지 않는다,
분명한 점은 조르조네의 이 작품에서 인물들을 나타나기보다는 주변의 환경 즉, 배경에 주의를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뇌우를 예고하는 초현실적인 번개와 폭풍을 몰고 오는 하늘의 빛은 이 그림에서 지배하는 핵심요소들이다. 조르조네는 기상학적으로 정확하게 폭풍을 그려낸 최초의 미술가로 하늘의 기상변화에 대한 뛰어난 관찰력이 이 그림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것은 1500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베네치아 방문 영향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레오나드로의 부드러운 형태감을 나타나는 그의 붓 터치와 식물학 및 기상학에 세밀한 관심은 그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빛과 색체(조)에서 나오는 작품에 대한 조명은 그의 작품과는 대비된다. 레오나르도의 종교화이나 단독 인물화등에서 보여주는 배경은 음울한 기운을 띄며, 차분하고, 색상 대비는 감소되었다. 한편, 조르조네와 같은 베네치아 화파 내지 베네치아미술에 영향력을 크게 받은 회가들은 대부분 밝은 배경과 색상에 대한 자유로움을 작품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작품의 색상 풍부하게 나타난다. 조르조네의 작품에서도 그러한 것은 유지된 바, 전경은 갈색과 빨간색 계동, 중경은 다양한 진녹색 계통, 원경은 에메랄드색 또는 청록색까지 뒤섞어 표현한다. 그의 그림전체는 세상의 빛과 색상의 모든 것을 포용한다. 이 작품에서도 대부분 색상에 대한 것은 그의 의도대로 표현이 되었다,
비사리의 기록에 그는 예비드로잉(예비소묘) 하지 않고, 캔버스 위에 바로 물감을 칠하는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고 한다. 또한 색상대비, 어둡고 밝은 정도나 다른 색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부드러운 붓 터치로 작품을 다듬어가는 등, 그 당시는 독창적인 방법을 이용하였다. 이 방법은 티치아노에게 전수가 되어 그의 의해 사용되었다.
또한 그의 기상학에 지대한 관심은 『폭풍』의 풍경(화)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해가 구름사이에 있는 듯, 어두운 적운의 구름사이로 빛이 보인다. 갑작스런 폭풍의 적운이 몰려오면서, 번개가 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번쩍한 짧은 순간을 유려한 그러데이션으로 묘사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온 폭풍의 소나기에 그림속의 여인도 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의 그림을 어떻게 보면 인물이 특별히 특출하게 표현되어 나온 그림도 아니고, 구도의 상에서도 별다른 기교가 엿보이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중요한 내용이 담겨진 그림의 작품도 아니지만 분명 가희 혁명적 편린(片鱗)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화면 전제에 스며든 빛과 공기에 의해 하나의 전체를 융합되어 있는 것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그림속에 있는 작은 번개와 뇌우의 섬뜩한 빛이 그림의 전체를 지배한다.
아마 이것이 시초일 것 같은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배우)들이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되는 풍경이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배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풍경은 그 나름대로 그림 작품의 진정한 주제가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풍경은 그저 중심인물을 위한 배경으로 그려졌을 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조르조네의 『폭풍』은 풍경을 독자적인 그림의 주체로, 새로운 장르인 풍경화로 개념을 새로 탄생시킨 새로운 요소로 작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시켰다. 이러한 요소들은 17세기 후대 미술가에 의해 재평가가 되어. 사실주의적인 풍경화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의 주문자는 가브리엘레 밴드라민(Gabriele Vendramin)으로 1530년에 마르칸토니오 미하엘 (Marcantonio Michael)이 그의 저택에서 이 작품의 그림을 보았다고 언급이 되어있다. 그의 가문에서 대를 이어 이 작품은 오랫동안 소장한 듯하다. 1875년도에 조바넬리(Giovanelli) 공이 베네치아에 있는 자신의 궁을 꾸미기 위해 이 작품을 2만 7천 리라 가격에 구입했다. 이후 이 가문의 후손과 이탈리아 정부(베네치아 주정부)와 계속된 밀당의 연속이었다. 해외로 판매 추진도 하였으나, 매매거래의 과정에서 가격차이와 이탈리아 정부방해로 이루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정부는 이 작품이 진품인 것을 조사했고, 진품으로 인정받은 직후, 해외유출과 (해외)판매금지조치를 위한 입법 활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32년에 가서야 합의를 보았는데, 베네치아아카데미가 어려가지조건으로 이루어진 500만 리라 금액으로 이 작품을 구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원래의 소유주가 불렸던 금액 절반가격이었다.
이후 1984년에 현대적 복원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현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박물관 안에 전시되고 있다.
그 외에도 그의 후기 작품이 확실히 되는 작품을 뽑힌다면 『세 명의 철학자 The Three Philosopher. 1508년』등이 있다. 어느 시골의 풍경 속에 세 명의 남자가 있는 그림을 『세 명의 철학자들』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1525년 무렵에 베네치아 수집상황을 기록한 한 문서에 『풍경속의 세 철학자』로 기록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작품 그림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에 대하여는 어려 가지 추측이 난무 할 뿐, 지금까지도 밝혀 진 바 없다, 각자 청년. 장년, 노년의 상이고, 그림에 나타난 의상도 갖가지이어서, 불가사의한 면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를 고대의 천문학자(또는 과학자)로 보는 시선도 있고, 동방박사라 해석하는 설도 있으나. 모두 석연치 않다. 작품의 그림에서는 장년과 노년의 인물은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고, 청년의 인물은 시선을 작풍의 풍경을 보는 듯, 멀리 보고 있다.
이 작품의 그림이 구도상 비례에 좌우의 대칭이 맞지 않는데. 이는 18C에 왼쪽으로 20㎝가령이 잘라 나가서 그러하다.
조반니 벨리니의 유화 사용 그리고 천 소재의 사용과 어둠과 빛을 효과적으로 이어받은 이가 조르조네였다. 다만, 그는 스승과 달리 밑 그림을 하지 않고, 천 위에다 직접 그림을 그리는 등 색조 그라데이션의 순서를 바꿨다, 밝은 바탕에 투명한 글라시를 칠하면서 볼륨을 만드는 대신 조절된 표면에 입체감을 주는 불투명한 흰색 터치를 상대적으로 짙은 톤 위에 더했다.
1510년 조르조네가 35세 무렵에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았는데, 그가 이 병에 희생되어 사망하였다.
조르조네 말년의 작품인 『전원의 합주 Pastoral Concert. 1509-10년』,『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 1508~1510』등 어려작품들은 그의 제자이자, 조수였던 티치아노가 그의 작품을 이어서 그려 완성을 되었다. 티치아노는 이 그림에 대한 작가 추정을 어렵게 할 정도로 매우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도상과 분위기를 통한 음악의 주제로 삼은『전원의 합주 Pastoral Concert. 1509-10년』의 작품에 대한 상당수의 그림은 조르조네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두 사람의 남성과 벌거벗은 채 있는 두 여인들의 사랑의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작품을 처음 보면 남성을 유혹하려는 여인들의 몸짓을 나타나는 일종의 춘화라고 떠벌리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 실재로 이 작품은 외설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고 한다.
도시에서 멀리 벗어난 아름다운 숲과 시골풍경이 가득한 배경 속에 남성 두 사람이 악기로써 연주를 하는데, 아름다운 여신(요정)들이 함께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두 남성의 눈에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보이는 여인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는 증명되는데 남성들의 눈이 악기에 초점을 맞추며 연주에만 열중하고 있지. 벌거벗은 여인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벌거벗은 여인들의 모습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신 적 존재들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나온 것은 단순히 외설 논란으로부터 피하기 위한 주장은 아니고, 사실 보이지 않는 신적인 요소를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현실을 접목한 결과가 다름 아닌 이상향을 향한 선택의 수단이 아닐는지 .....
베네치아 시민 계층들 그러니까 부유하고 작품들을 살 수 있는 중산 계층 이상들은 이제 옛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고전의 이야기나 고전을 모방한 작가들의 작품을 좋아하였다. 즉, 전원의 사랑과 같은 목가들의 이야기나 비너스와 요정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작품들을 좋아 했고, 이에 맞춘 전형적인 작품이 어쩌면 이 작품일 것이다.
『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 1508~10년』작품의 그림은 1507년에 마르챌로의 家 결혼식을 위해 이 작품을 주문 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르조네가 1510년에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미완성된 작으로 남을 뻔 했으나. 그해 티치아노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다, 하단의 비너스의 나체와 누어 자고 있는 비너스의 밑에 붉은 천, 밑에 있는 땅 부분은 그가 그린 것이 맞으며, 상단의 비경 부분이 티치아노가 그려 넣어, 완성시킨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마르챌로의 家 결혼 관련과 의한 추측에 이를 증명해주는 현대 X-선 찰영 기법이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X-선을 비추면서 드러난 비너스의 발아래, 조르조네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랑의 신 큐피드의 모습이 증거로 아마 티치아노에 의해 붓칠로 없어진 것 같다. 티치아노는 아름다운 여인의 나체 모습을 하고 있는 비너스가 있는 풍경을 돋보이기 위해. 또한, 내재된 빛의 광택에 밝게 빛나는 비너스 몸의 볼륨감을 더하기위해, 조르조네의 작품을 수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비너스의 모습은 그 당시 혼인화의 전형적인 그림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여 나타난다. 잠에서 깨어난 비너스는 혼례식이 진행된 동안, 신부를 돕기 위해 어려가지 준비를 할 것이다.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의 이 누운 젊은 여인(비너스)의 나체에 풍경을 담은 이미지를 주제의 재해석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피렌체의 모든 예술에는 미켈란젤로가 있듯, 이러한 베네치아의 화파, 특히 조반니 벨리니와 조르조네에 이어지는 벨리니 공방 화파는 마침내 티치아노라는 거장을 낳는다.
티치아노(티치아노 베셀리오 Tiziano Vecellio)는 베네치아의 후배지인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악지대인 피에베디 카도레, 돌로마테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베네치아로 옮겨갔다. 로도비코 돌체가 기록한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의 가문은 당시 종교계에서 명망이 있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출생 연도(날짜)에 대한 증명할 서류가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1576년 사망할 때 나이가 99세였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1485년에서 149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지만, 최근에 이르려 1488-1490년 사이로 보는 그의 생년설이 가장 유력한 정설로 떠오르고 있다.
그의 나이 8-9세 무렵, 베네치아에서 모자이크 장인인 세비스티아노 주카토 곁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주카토가 처음에 몇 번 직접 가르쳤는데, 어린 제자의 보기 드문 미술적 재능을 명확히 감지하고는 당시 조반니 형인 젠텔레 벨리니가 이끌고 있던, 베네치아에서 대표적 화실인 벨리니 家로 인도 했다고 한다,
그의 어릴 적 스승인 세비스티아노 주카토와 젠텔레 벨리니는 베네치아에서 회가들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명성이 높은 자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 총독 궁(宮)의 장식 및 왕족의 초상화를 당담했던 젠텔레 벨리니의 위상은 베네치아에서 제일가는 국가공식회가였고, 주카토 역시 베네치아 시(市)의 국가성당이며, 중요 종교 기념관인 성 마르코 성당의 모자이크 작업장을 이끈 당시 예술계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또한 두 사람은 베네치아 정부와 직접 거래하고 있었으니, 어린 티치아노로써는 이보다 더한 정치적 배경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공식적인 후원을 받는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젠텔레- 조반니를 잇는 벨리니 家에서 도제활동은 유화 기법의 기본적으로 배우며 그의 스승의 장/단점을 파악하였다. 돌체에 의하면 데생의 대담성과 신속하게 그리는 걸 원하였던 그는 스승의 건조하고 피곤함을 느끼는 방식에 있어, 성격엔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결국 그의 나이 20세 무렵, 벨리니 家 화실에서 그와 마음에 맞았던 조르조네와 함께 작업하러 떠남에 따라 조르조네의 제자 겸 조수로 활동한다.
그러나 스승- 제자의 관행으로 기본적으로 조반니 벨리니의 밑에서 일자리를 얻게 됨으로 벨리니 家 화실과 관계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현재 베네치아의 산 로코 대신교 회랑(Scuola Grande di San Rocco)에 소장되어 있는『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1506-7년경으로 추정)』를 비롯한 아주 오래된 티치아노의 작품들은 1505년경 벨레니 家 화실에서 도제생활을 마치고 나온 직후의 작품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건조한 화풍은 벨리니 家 화실에서 받은 교육과 조반니의 매형인 안드레아 만테니의 작품에서 나온 특징이 반영되었다. 계속하여 나온 『베네치아 귀족의 초상』(1507년경), 『(누비 소매 옷을 입은)남자의 초상(1509-10년)』 등 초상화 그림은 분명 조반니 벨리니의 초상적 그림의 특징인 데생과 접했고, 특히 조르조네의 작품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조르조네의 유체 기름의 묻은 유동적인 데생의 영향은 그의 초기작품에 계속적인 특징으로 나온다.
그 후로도 조르조네의 조수로써 그와 협동하여 작업 활동을 하였는데 그 예가 1505년에 베네치아시에 있는 리알토 다리의 근처에 있던 대형건물인 폰타고 테레스키 의 건축건물이 불에 타서 재건축할 때, 건물(내부) 정면에 장식할 벽화를 조르조네에게 의뢰하였는데 여기서도 티치아노를 조수로 고용해 함께 작업한다.
그중 『유티드』혹은『정의의 승리』라는 작품은 조르조네가 구상하고, 밑그림을 그렸으나 으나, `밑그림을 따라 작품을 완성하는 건 진적으로 티치아노의 재량에 맡겼다. 돌체는 이 작품에 대한 감상에 대해 “티치아노는 데생과 체색 있어 모든 표현을 넘어선 놀라운 유디티를 그렸다,.”고 적고 있다 이 그림이 공개되자, 조르조네의 친구들이 조르조네가 그린 그림인줄알고 조르조네에게 “조르조네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이라고 축하했다고 한다. 조르조네는 “애석하지만 그 작품은 제자인 티치아노가 그린 작품.“이라고 대답했다. 그 사건 이후 조르조네는 며칠 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하였는데, 자신의 예술에 대한 신뢰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기록한다, 어쩌면 이 기록이 16C 역사적 시각에 내포된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의 통상적인 시나리오 속에 극화된 예술의 발달에 믿음을 반영되고 있음이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스승과 제자 사이가 여전히 지속되었던 것을 봐서는 서로 친숙하게 지냈던 모양이다.
사실 접근법과 (인물과 풍경에 대한) 구도 및 구성 면에서 유사성 등으로 작품의 명확한 구분이 안가는 초기의 티치아노와 조르조네의 작품을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등장인물(특히 여인들) 스타일로 구분하는 방법이 쉬운 방법일 것 같다,
설명하기 쉽게 굳이 예로 들자면 조르조네의 작품『 전원의 합주』에 등장하는 서 있는 여인의 나체와 비슷한 스타일로 티치아노의 『천상(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에 나오는 붉은 천을 뒤로 한 채, 나체로 서 있는 여인으로 비교하겠다.
두 여인이 그림의 구도상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조르조네의 여인은 좀 더 복잡하고 내적인 움직임으로 인한 폭 넒은 다양성을 추구한다, 따라서 조르조네의 여인은 주변 환경 즉 아름다운 풍경에 동적인 움직임을 창출한다. 반대로 티치아노의 여인의 나체는 저부조의 주위 인물보다 좀 더 철저하게 정면성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이것은 (여인의 나체를 포함한 풍경에 비해) 가장 완만하게 자세의 수정이 구성에 증가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나체의 여인은 관객들 바라보고 말을 건네는 모양새로 있을 뿐만 아니라, 사치스러운 옷을 차려 입은 옆의 여인과도 대화를 하는 것이다. 여인의 실루엣에서 보인 리듬감 있는 윤곽은 조르조네의 그림에서 그림의 형태를 에워싸고 있는 음영을 넣는 테두리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정확성을 지니며, 또한 미묘한 뉘앙스를 결정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갖는다.
이는 조르조네가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스승의 미완성작품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올 때도 조르조네가 보여준 섬세한 붓놀림을 무작정 쫒지 않았다. 윤곽의 투명성에 대한 그의 초기적 회화의 특징은 어찌 보면 각 요소에 있는 윤곽들을 잘 나타나게끔 간결한 기법을 요구로 한다.
1510년, 베네치아에 흑사병이 돌아, 그 당시 30대 초반이던 조르조네가 갑자기 사망하자, 두려움에 그는 파도바로 피신을 했고, 그곳에서 성 안토니오 성당에 있는 스쿠올라 델 산토(Scuola del Santo)에 프레스코화 3점를 남겼다. 일찍이 조토가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린 연작이 있는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이 많은 곳 중 하나다. 특히 성 안토리오의 삶과 전설이 담아져 있는 작품 2점이 있는데, 하나는 도나텔로의 주제단위에 장식된 청동부조 이고, 산토예배당의 롬바르도가 제작한 저부조의 작품이다.
여기서 티치아노의 작품들은 이 거대한 고전적인 분위기를 깨지 않으러 노력을 하였는바, 전반적으로 좀 더 정체된 스타일로 향하는 그의 고전적 경향을 보여 준다. 작품의 표현면 뿐만 아니라, 작품의 내용면에서도 고전적 경향이 드러나는데, 특히나, 그가 그린 프레스코화 『질투하는 남편』이 그러하다.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난폭한 이야기와 그 작품 뒤를 잇는 회개와 용서라는 연결시키는 방식은 지극히 고전적이다. 작품에서의 흉기를 들고 여인을 찌르려고 한 남편의 모습의 표현에서 격렬하게 역동성이 존재한다.
폭력이후의 고행과 치유의 이야기가 담긴『잘린 다리가 담긴 기적』의 작품은 티치아노의 숙달된 회화적 언어표현로 씌어졌음을 잘 나타난 작품이다 티치아노가 이 그림의 모델로 삼은 조토의 『피에타-슬픔』작품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그 분위기가 마치 경건하다, 여기서 티치아노는 동작과 시선교환의 화합을 통해 서사적인 흐름을 한층 더 조화롭고, 이해가기 쉽도록 만들었다,
계속하여 이어진 작품인 『신생아의 기적』에서 작품 그림 표현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고전주의를 마음껏 드러난 작품이다. 그림에서 구성의 배열과 정학한 계산속에 있는 인물들의 자세에서 마치 이 장면은 지어진 한편의 옛 명화의 연극을 보는 듯. 불후성(不朽成)의 느낌을 들도록 한다,
흑사병이 진정되자, 베네치아에 돌아왔고, 그곳에서 1514년경쯤 자신의 작업장을 만들고 독립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티치아노가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후 첫 대규모 작품이 아마도 베네치아의 총독궁 대평위원회방에 장식된 『스폴레토 전투』일 것이다, 이 작품은 1577년에 일어난 총독궁 화재로 인해 불에 타버려. 오늘날엔 그 진면목을 찾을 수 없으나, 그가 남겨 논 작품의 준비과정인 데생 스케치와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복사판으로 대강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 사실 이 그림은 중세의 1177년 베네치아조약의 계기가 되었던 교황 알렉산더 3세와 프레데릭 바르브루스의 마지막 전투인 스폴레토 전투(또는 1508년 사건으로 혼동하여 카도레 전투라고도 함)가 그러넣은 엣 프레스코화가 훼손되어 가는 걸 안타까워하는 티치아노가 이 전투의 장면을 다시 그리겠다고 먼저 총독궁의 위원회에 제안을 하여 이루어졌으나, 댓가로 원한 국가공식회가가 이미 스승인 벨레니가 있어 취소되었다. 2년 후 벨레니의 죽음으로 국가공식회가로 된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538년에 완성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미술관측이 소유로 하고 있는 『스폴레토 전투』의 그의 그림을 위한 스케치에는 말과 인간의 어지럽게 펼쳐진 전투장면이 격동적이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가리아 전투』의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우피치의 복사판의 그림 장면에서 볼 때, 중앙부분의 놀라운 인물들의 전개는 그가 그린 1515년경에 완성되어 공개된『홍해에 빠진 파라오』의 중심부분과 거의 일치한 구성을 보인다. 이것은 이 그림의 구성이 후대에 다시 한 번 드러났음을 의미하는 바, 그에 의하여 작품의 구성법으로 귀착, 성공하는 좋은 사례이다.
중앙부분의 구성은 베네치아화파 특히 조르조네의 도식화된 구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비대칭배치는 베네치아화파에서 주요한 사안으로 떠오른 작품의 그림에서 배경과 극적 긴장감부여 사안을 더 가치 있게 표현되는 역할을 당담함으로써, 한 가지 축으로 떠오르게 된다.
티치아노의 전반부 생애에서 또한 베네치아의 생활(국가 공식화가의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절정을 말해 주는 작품으로 뽑히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1518년경에 공개된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자 데 프라이 성당의 중앙제단을 장식한 『성모승천』을 뽑아들 것이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글로이오사 데이 프라이 성당의 중앙제단을 위한 것인데, 그의 인생에 첫 번째 종교화로는 대작이다. 1506년에 의뢰받아 1518년 3월에 봉헌된 작품으로 이 작품으로 그는 죽은 조반니 벨리니의 후계자로 또한 그 뒤로 잇는 국가공식회가로 명성공헌하게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대부분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로 티치아노가 이해한『성모승천』작품에 대한 구상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먼저 작품이 안치한 장소 및 감상자가 이 작품을 바라보는 환경조건을 상당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작품『성모승천』이 있는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자 데 프라이 성당은 중앙의 신랑과 측랑이 육중한, 12개 기둥으로 구획된 상당히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측량의 ⅔되는 곳에 대리석 칸막이로 둘려 싸인 성가대석이 자리하고, 가운데 반원아치가 있다. 이 작품은 성가대자리에서의 반원아치를 통하여 중앙 제단의 이 작품의 중앙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의 제단화는 칸막이의 아치를 그대로 반영하는 반원형 대리석 테두리를 둘려 에어 싸인 채 있다. 실내 집회 장소인 종교화의 특성상 그림의 구성과 특색이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해야 되고, 그 위상에 알맞도록 깊은 인상을 주어야 했다. 이 제단화는 실제 크기가 600×360㎝의 상당히 큰 초대작에 속한다.
감상자는 이 작품의 그림으로 진행되는 드라마를 벽의 창문을 통해 실재로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작품의 그림 구성은 위에서 아래까지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에 따라 3부분으로 나눠진다. 먼저 맨 위의 하나님의 공간이 있고, 그 아래 승천하는 성모마리아의 공간이 있으며 맨 아랫부분인 땅위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성모마리아를 지켜보며, 이를 찬양하는 사도 및 군중들 모습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한 이 그림의 구도는 사도 및 군중들과 성모마리아는 하나의 삼각형 구도로 이루어져있고, 또 승천하는 성모마리아와 위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은 또 다른 삼각형의 구도가 형성되어진다.
성모마리아가 있는 구름 양 옆으로 늘어선 많은 천사들의 등장은 천상과 지상의 영역을 가른다. 따라서 이 그림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는 인간의 드라마로 제시된 종교적 실화 작품이며, 보는 이들에게 환영적인 그림 분위기에 빠져 들게 한다,
이 그림의 시간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건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이 주제를 신성하고, 상징적이며, 미리 예정된 것으로 다투는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다. 성모마리아의 승천모습의 부각이 한층 격이 높아진다. 성가대에서 이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은 밑의 많은 군중 사이에 마치 신성한 분위기의 성당에서 이 사건이 일어나, 현실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그림 속 전경에 있는 사도들과 군중의 모습이 이와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증대시켜 마치 예배시간의 성당에 있는 아래 군중의 모습과도 비칠 때, 그 시각적 혼란과 생동감이 이 그림과 비추어 본다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성모마리아의 거룩한 느낌은 증폭되어 진다. 이러한 혁신성이 감상자들 마음속의 동요를 불러온다.
티치아노는 이 작품의 그림 배경을 의도적으로 추상적 배경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형태인 자연적 풍경도, 세부적 장치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공간이나 시선을 소실점으로 인도하는 원근법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전경의 행위를 뚜렷하게 부각하고, 이를 통해 극적효과를 높으면 되는 쉬운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는 전경의 행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아래 부분의 인물 구성과 이에 알맞은 색채 배치, (아랫)인물의 단축법의 조정으로 효과를 부각하였는데 인물들의 실재로 이 작품을 보는 이들은 그림을 올려다보는 느낌이 난다고 한다.
반면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단축법이 제대로 이용되지 않았다. 만약 제대로 된 단축법으로 성모마리아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작품의 그림에서 성모마리아의 턱 위로는 벌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 그림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해도, 성모 마리아의 (천상의) 여인 모습으로 완벽한 재현한 곡선미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에게 방출되는 황금색의 빛에 의한 실루엣 부분이다. 사실 이전의 성모마리아의 표현은 인간의 여성에서 보인 곡선미를 대부분 감추어 버리고 밋밋한데, 티치아노는 이 법칙을 깨고, 여인의 곡선미를 성모 마리아에게도 적용하여 엄청난 파장을 불려온 작품이 이 작품이다.
거기에 성모마리아가 입은 맑게 칠한 붉은 옷은 위에서 내려온 황금색의 배경에 의해 눈에 띄일 만큼 성모마리아가 이 그림의 주인공임에 부각해주는 아주 중요한 장치이다. 또한 성모마리아의 붉은 옷은 아래 두 명의 붉은 옷을 입은 사도와 함께 삼각형의 구도를 형성되며, 또한 위의 하나님의 옷도 마찬가지로 붉은 옷임으로 화면이 3층으로 구획이 나누어있음을 확실히 구획 짓는다.
그 후 티치아노는 10여 년 동안 이러한 양식에 의거한 작품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연구를 하였다. 그는 성당의 장식화에 표현된 감정의 다양성을 넓혀갔으며, 그것들의 기능을 좀 더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또한 종교화의 의미를 분명히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1514년경 페라라의 공작인 알폰소 테스테 공작의 성인 에스테성 내 개인의 방을 꾸미고자 한 작품인 벨리니의 『신들의 향연』 완성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스승-제자간 사이로 벨리니의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직접 그림을 수정하면서 도왔다. 아마 벨리니는 친분으로 성사된 이 작품이 자신의 전문분야인 종교적인 작품분야가 아닌, 자신의 기질에 맞지 않는 이와 같은 비종교적인 작품인 다툰 주문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비종교적인 주제에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옛 제자인 티치아노의 도움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티치아노는 이 작품의 풍경을 그리면서, 구도를 손질했다고 한다.
페라라의 방문은 그에게 뜻하지 않는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알폰소 테스테 공작의 에스테家와의 친분은 그로 하여금 작품들을 선보일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다. 티치아노는 1516년경 『테라리우스 화폐를 받는 그리스도』를 넘긴 사실을 비롯해, 그의 작품이 에스테 성안에 개인적으로 꾸며진 방안에는 그의 작품이 총 3개가 있었다고 알러진다.
지금은 유럽각지로 흩어버린 에스터 성안의 카메리노 방에 걸려있던 작품은 지금은 소실된 알폰소 공의 궁정회가이였던 도소도시(Dosso Dossi 1486/7-1542)의 『주신제』. 조반니 벨레니 『신들의 향연』과 함께 티치아노의 『베누스(비너스) 숭배』, 『안드로스인들의 주신제』,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3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알폰소의 통치 및 그림의 주문과 관련된 당대 사료가 빈약하긴 하지만, 카메리오 방안의 작품의 그림들이 군주의 공간을 장식하기 위한 주문이었다는 점, 소실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도소도시 작품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작품들이 모두 고전 신화와 관련된 고대의 문학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알폰소 궁정의 인문학자 마리오 에퀴콜라 (Mario Equicola 1470-1525)가 프로그램 구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정황,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라라의 선대통치자들이 궁의 중요 공간을 궁정의 인문학자가 고안한 고전 신화의 주제로 장식 해 온 전통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 작품 그림들의 성격은 알폰소 공의 에스터 家가 특정 목적을 가지고 주문한 연작으로 보아야 헌다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 중 조반니 벨레니와 티치아노의 작품들은 카메리노 서쪽 벽부터 차례로 『베누스(비너스) 숭배』,『신들의 향연』『안드로스인들의 주신제』 남쪽 벽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가 걸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티치아노가 에스터 家를 위해 창작한 작품 3가지를 중심으로 그의 전설 및 신화적 내용들을 담긴 그림들의 성격을 알아본다.
『베누스(비너스) 숭배』의 작품 그림을 보자. 오른쪽에 높은 壇(단) 위에 서 있는 비너스(베누스) 여신상으로 보이는 조각상이 서 있고, 아래에 이를 환영하는 많은 인파의 쿠피드와 두 님프가 있다. 베누스에게 향한 봉헌과 숭배를 중심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그림은 고대 그리스 大(대) 필로스트라투스 ((Philostratus the Elder A.D 190)의 작품 『이미지들 (Eikonei)』 중 에로테스 (Epotse) 라는 글을 테스트로 하여 회가의 상상력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그림은『이미지들』의 내용을 마치 그림으로써 수사학적인 글로 묘사된 환경 및 이미지가 독자로 하여금 실재 그림을 눈앞에 보는듯한 효과를 낳는 엑프라스시(Ekphrasis 효과에 해당된다. 회가는 베누스(비너스)의 과수원/ 숲에 있는 쿠비드의 외양과 행위를 통해 플라톤이 찬미한 천상적 사랑(Amore Ceritas) 강조하고 있는 엑프라시스를 바탕으로, 에퀴콜라의 기독교적 자애(Caritas)개념이 들어있는 융합된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오는 “신성한 사랑”의 내용을 구현하도록 그림을 고안하였다.
이 작품 그림 속의 베누스(비너스) (조각상의) 자태는 정숙함을 나타나는 베누스 푸티카 (Venus Pudica)유형이다. 천상의 베누스임을 명시하는 조개를 쥐고, 높은 좌대위에 위치해 과수원(세계)의 통치자로써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풀밭에 가득 모인 아기 형상의 큐피드들은 천상의 비너스기 상징하는 근원적 아름다움을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또한 그들의 누드형상과 황금빛 화살과 날개는 우리의 영혼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끄는 천상적 큐피드의 역할을 나타난다. 전경에서 서로 사과를 던지며, 화살을 쏘고, 또는 입맞춤과 포용하는 세 쌍의 큐피드들을 모습에서 신성한 사랑의 각 단계마다 그것에 대한 인식과 사랑에 대한 상응하는 향동을 의미하며, 또한 영혼이 베누스(아름다움)에게 향한 상승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밑의 가운데 부분을 살펴보면 베누스에게 바칠 봉헌물로 사과와 산토끼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신성한 사랑”에 대한 기쁨과 무한함을 의미한다.
뒤에 있는 큐피드는 원무를 추며, 신과 영원한 합일에 이른 상태를 보여주고, 이 개념은 원경에 푸르스름하게 드러난, 작은 교회의 철탑이 상징하는 기독교(가톨릭)적 사랑을 통해 한층 강조되어진다.
오른쪽으로 가면 두 명의 님프가 거울과 책을 봉헌물로 바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거울과 책은 각자 신성한 사랑을 인지하는 방편인 명상과 지성의 작용을 의미한다. 거울의 모티프가 전달하는 명상은 신플라톤주의에서 강조했던 것이고, 책은 필로스트라투스의 글문에는 언급되지 않는 물품으로써, 상상력으로 회가가 그려 넣는 봉헌물로 성서, 또는 신적이 지식의 상징이므로 이에 거울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림에도 원경에 이 가톨릭교회를 상징하는 철탑이 있고, 우연히 일치된 지 아니면 의도가 담긴 것인지 잘 모르지만, 원래 이 작품이 걸려 있던 에스터성 카메리노의 방에서 베누스가 바라보는 방향이 페라라 대성당이라는 점은 이러한 뜻을 강조한다.
15C 이탈리아 전역에 인문학자들 특히 신플라톤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고대의 엑프라스시 문헌의 담겨진 뜻을 사랑의 한 개념으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것들은 가톨릭의 신적인 사랑이나 자애 이러한 사상과 결합되어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해를 하였는데, 이 작품은 이러한 사고를 잘 담고 있다. 또한 알폰소 대공 궁정의 정치적 방향으로 연결되기도 하는데, 에스터家가 1329년에 시뇨레(Signoro)에 선출되는 동시에 교황의 사제직과 겸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적 사랑이나 자애라는 측면을 담긴 이념을 강화해야 되는 입지였고, 일반적으로 중세에 있어서 이런 굳어진 이미지를 대중에 널리 알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일폰소 공에 고용된 회가는(작품의 그림을 통해) 형상화 되어진 “신성한 사랑에 대한 인지”라는 개념을 정치적인 입지에서 말하고자 하고 있다.
『안드로스인들의 주신제』역시 마찬가지로 필로스트라투스의 글문에서 나온 『안드로스 섬 사람들 (Anapioi)』에서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서 타치아노는 바쿠스 신이 안드로스 섬 안에 있는 강을 포도주의 강으로 바꿔주자, 사람들이 포도주를 찬양하는 축제를 벌인다는 내용을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 완벽하게 시각화 하였다.
작품의 그림에서 오른쪽의 언덕에 있는 의인상에서 시작된 포도주의 강은 언덕의 아래로 흘러 잠든 님프를 거쳐 어린 아이로 보이는 인물이 보태는 물로 희석되어 왼편으로 흐른다. 나무아래의 두 명의 남성은 포도주를 퍼 올려 풀밭에 누운 여인에게 따라준다. 이 여인은 인물들과 악기를 연주하던 중에 받고 있어 절제 하며 마신 포도주는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뒤에 있는 남성들은 음악에 맞추어 춤과 노래를 즐기는 모양새다. 전체적으로 방탕한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양새지만, 이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른쪽 남성이 만지고 있는 담쟁이에서 “절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차가운 성질의 담쟁이는 독한 포도주를 중화시켜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화관의 둥근 형태로 연결은 결합과 영원성을 의미하는데, 담쟁이 화관은 따라서 적당히 (포도주를) 마셨을 때만 좋은 자질과 그 효과를 지속되어 지는 것을 암시하는 바이다.
또한 그 무리들은 숲의 그늘 속에에서도 움직이는데. 원쪽의 나체와 오른 쪽의 흰색- 붉은 색을 입은 남-녀간의 춤 사위(움직임)은 잠이 든 듯, 거의 움직임이 없는 아리아드네와 좋은 대비를 이운다. 밑에서 가운데부분의 종이에 적은 것을 낭독하는 (혹은 노래하며) 있는 두 여인은 티치아노의 연인 비올란데가 모델이라고 한다.
이 그림서 보여주는 모든 것들- 춤이며, 음악이며 즐거운 모양인 축제의식이 그냥 축제 형식이 아니라. 바쿠스의 신을 찬양하는 일종의 의식을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의 그림 가운데에 있는 남성이 포도주의 잔을 하늘로 높이 들며 기쁨의 원천인 포도주와 기쁨을 주는 자인 바쿠스를 찬양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그들이 마시는 자주빛의 포도주는 원액인 포도주에 물과 희석되어 마심으로 욕망과 이성이 서로 조화로 절제된 상태를 상징한다.
이러한 것은 페라라 지방의 농업 발달상을 나타나주는 우수한 품질인 포도주가 있는 배경과 알폰소 통치하 그리스신화에서 나온 포도주에 따른 의미인 “절제“ 덕목을 내세워 이상적인 군주상을 티치아노의 이 작품의 그림에서 제시하고 있다,
에스터家 성안의 카메리노 방 서쪽에 장식되어져 있던 티치아노의 작품인『베누스(비너스) 숭배』,『안드로스인들의 주신제』는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카메리노 남쪽 벽에 있던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작품의 그림은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술 Ars Amatoria』및『담력』에 묘사한 바쿠스와 아리아드네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와 『카르미나 Csrmina』에 기술된 바쿠스와 그 수행원의 묘사 또는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다.
작품의 그림 화면 중앙에는 酒(주)의신으로 유명한 바쿠스가 인도에서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낙소스 섬에서 아리아드네를 만나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바쿠스는 아리아드네를 보고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그의 마차를 갑자기 멈추고, 황급히 내리고 있으며 이 장면을 본 아리아드네는 정색을 하듯, 뒷걸음질하며, 오른손을 하늘 쪽으로 뻗어오려, 방어하는 자세를 취한다. 마차 앞에는 그를 경호하고, 애완동물인 맹수 치타 한 쌍이 있고, 마차 뒤에 염소의 발을 한 시티로스와 수많은 마이나스(바쿠스의 시녀들)들이 급히 그를 따라오는 모양이다.
이 그림 장면에서 보이는 바쿠스는 청년의 몸으로 흰 피부에 매끈하고 빛나는 몸매를 드러내며, 급히 뛰어 내리는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마크로비우스에 의하면 청년의 몸으로 된 바쿠스는 하지의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밝은 나신을 드러내며 큰 동작을 취하는 바쿠스는 강렬한 태양의 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회가는 바쿠스를 인도정복이라는 사건과 주변의 수행원과 모티브를 통해 강렬한 힘을 발산하는 통치자, 혹은 정복자로 그려졌다, 바쿠스가 걸친 자주빛 망토는 통치자의 평화로운 상태를, 머리에 쓴 담쟁이화관은 승리의 화관을, 또 치타는 인도에서의 승리를 알리는 전리품의 직접적인 상징물이다.
당시의 신화 해설서는 바쿠스를 지상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포도주와 평화를 퍼트림으로 정복민에게 지지와 사랑을 얻은 진정한 승리자로 기록한다. 그 와중에 바쿠스와 아리드리네가 만나 결혼하는 것은 바쿠스의 신화의 마지막 사건으로 그의 최후의 승리를 의미하게 된다. 이 작품 그림에서 두 인물이 만나는 장면은 역동적으로 힘차게 그려진다. 갑작스럽게 놀란 아리드리네의 위에 떠있는 흰 구름이 있는 파아란 하늘에는 마치 이 두 인물의 만남과 결혼을 예건하는 듯, 왕관모양의 성좌 인 별이 떠 있다. 신화에는 바쿠스는 인간인 아리드리네가 죽을 때, 결혼식 때 함께 쓰던 왕관을 하늘로 던져서 북쪽 왕관 (별)자리 성좌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알폰소 공의 두 번째 부인인 루크레치아 보르차에게 바치는 헌정작품이었다. 1519년 그녀가 8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뒤에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즉위 초반에 교황인 율리우스2세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알폰소 공의 에스터 가문이 지속되고 안정된 왕권을 바라는 정치적요소도 들어있다.
작품의 그림을 통해 바쿠스의 마차를 끌며 수호동믈의 역할로 나온 동물인 치타는 실제 알폰소 공이 애완동물로 길러지고 있는 궁 안의 동물원에 있던 동물로 직접 보고 그린 것이다. 고대 이집트 등 고대왕국에서도 종종 애완동물로 그림에 등장하는 치타는 맹수로써 강력한 왕권을 상징물로 기록된다. 또한 에스터 家의 문장인 독수리를 바쿠스의 마차에 그러넣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그림은 현재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다.
그 이후에도 그는 그리스/로마신화와 전설/ 우의화 같은 주제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나타났는데. 이 인문/ 철학에 대한 그림은 당시에 인문주의 붐이 일어나 많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요가 많은 美의 여신 비너스에 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처럼 누드 자태로 된 아름다운 여성의 인체를 나타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비너스 주제인 그림 작품 중 대표적인 것들은 현재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경』이다. 이 작품의 그림은 비너스가 누어있는 자태로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형태와 거의 비슷한데, 조르조네가 아직 잠에서 깨지 않는, 편하게 누어 자는 비너스를 그렸다면, 티치아노는 잠에서 막 깬 비너스를 그린 듯 하다. 작품의 그림에서 보듯 잠에서 깬 비너스는 아직 누어있는 자태로 고요한 눈으로 마치 관람하는 우리를 보는 듯 응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그림과 이전의 비너스 주제로 하는 작품 그림과 비교로 할 때, 다르게 표현한 점은 그림에서 보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는 풍경이나, 바라보는 시선과 같은 요소로 만들어낸 신화적 분위기(틀)를 이 작품의 그림에서는 그 점이 거의 보이지 않거나, 과감히 없애 버린 것이 특징이다.
최조의 여성누드화로 할 수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는 비너스를 조각과 같은 피부와 허공에 끈 시선으로 다른 세상의 신화적 비너스를 그렸다. 이런 신화적 요소의 그림 작품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와서 깨지기 시작하였는데, 신화적 비너스를 현실적인 여인의 나체로 재탄생을 시킨다. 조르조네는 비너스를 나체로 누어있는 자세로 그린 최초의 회가였고. 그의 작품 그림에 나타난 잠든 비너스는 남자의 시선을 끌만한 현실적이고 흐트러진 자세를 하고 있다. 또한 그는 비너스그림에서 서양풍의 몸매와 얼굴 모양 특징으로 봐서. 이탈리아의 여성을 모델로 하고 있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르조네가 그린 비너스의 그림에는 신화적 분위기가 남아있다. 멀리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보이는 풍경이 있기 하지만, 사람들의 세상이 아닌 신들의 정원과 같은 산속에서.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는 채. 잠든 모습에 현실이 아닌 듯하다.
위에 글에서도 언급한바 있듯. 티치아노가 조르조네가 죽은 후에 이 작품을 완성시켰고, 그 후 28년 후에 다시 한 번 누어있는 자태로 하는 같은 주제의 비너스를 그렸다. 하지만 그림에서 보듯, 신화의 비너스를 깨우고. 나체 그대로 집안으로 모신 듯하다. 비스듬히 누어 우리를 관망하는 비너스의 뒤편으로 집안의 정돈하는 하녀(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또 일하는 하녀(여인) 바로 옆 창문과 분위기는 어느 부유한 집안인 듯하다. 꽤 값이 나가게 생긴 듯, 고급스런 빨간색의 천위에 누어있는 비너스 옆에는 귀여운 애완견이 잠들어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한, 집안풍경의 사실적인 묘사는 네덜란드 풍 그림영향을 많이 받은 베네치아 풍속화나, 종교화 등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림속의 신화적 분위기를 배제하고, 고대의 新(신)인 비너스를 그렸단 점에서 당시 인문주의 영향분위기를 넘어선 과히 혁명적인 작품이다.
티치아노는 오티디우스 작품 등 고전 모티브의 내용을 하여, 전통적인 신화적 그림인 깊은 산속이나 들판 등 아름다운 풍경배경을 하여 누어있는 자태의 비너스의 그림을 작품 속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켜, 많이 그리곤 하였는데, 『비너스와 큐피드』, 『파르도의 비너스』등 상당수가 존재한다. 이러한 비너스의 그림은 꼭 누어있는 자태만 그린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림에 들어가는 畵布(화포)의 낭비를 막기 위해 미완성의 데생 위해 그린 비너스의 그림인 상반신의 누드를 노출한 채, 최고급 비단 옷을 입고 있는 과정중인 앉아서 자신의 몸을 만지는 모습을 한『거울 앞의 비너스』, 서서 옷을 붙잡고 사냥을 하려는 아도나스를 말리는 『비너스와 아도나스』등 그의 비너스가 취한 자세는 점점 갈수록, (표현이) 다양해지고 과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작품의 특징은 조르조네의 초기 모티프를 미화시키며, 암시의 폭이 확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어떻게 보면 기법이 좀 더 유연해지면서. 그의 화풍이 관능을 가진 인물들로 만들어 감에 따라. 테마의 에로틱한 매력이, 직접적으로 작용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결혼과 사랑에 있어서 여러 가지 측면들- 즉, 순결과 관능을 결합시키는 (비너스의 주제로 한) 그림의 메시지는 사회적 현실뿐만 아니라, 비너스의 이상적 특성을 공인한다.
그 외에도 그가 그린 비너스의 관련 작품들은 베네치아 자연의 숲 풍경과 인간의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비너스와 아도나스』,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한 고대그리스 아펠레스 그림을 완벽하게 복원한 『비너스의 예찬(또는 몸을 씻는 비너스) 』등이 있다.
또한 티치아노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꼭 비너스로 한정하지 않았다. 아르테미스/디아나 주제로 하는 작품이나, 그의 작품인 『인간의 세시기』에 나온 남성의 누드도 인간의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에 나타나고 있는 대안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티치아노는 비너스처럼 아르테미스/디아나(다나에)의 매혹적인 단독 누드 상을 잘 표현하여 그렸을 뿐만 아니라,『디아나와 악타이온』장면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목욕장면을 목격한 악타이온과 여신이 서로 소스라쳐 놀라는 장면을 그렸는데, 그리스신화에서 사냥과 순결의 여신 아르테미스/디아나의 매혹적인 누드는 베누스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대안이 되었다. 아르테미스는 정결의 상징이며 처녀성과 순결을 지키는 여신이기에 더욱 그러했으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 여신의 지위를 모독하는 자는 무섭고도 혹독한 처벌을 받았는데, 그 뒤에 이어질 이야기를 하자면 사냥꾼 악타이온은 그 여신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사슴으로 변하게 하고는 악타이온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사냥개들의 먹잇감이 되었다고 한다. 티치아노는 디아나 여신의 목욕장면과 훔쳐보는 악타이온의 모습 또는 활을 쏘려는 디아나와 도망가는 악타이온 모습 등 이러한 그리스/로마신화에 내용을 담긴 페이지 내용의 작품을 몇 개 더 그렸다.
그의 아르테미스/디아나 그림 중 가장 풍만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디아나와 黃金(황금)의 비』는 티치아노의 말년에 그린 역작이다. 그리스신화의 아버지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에 의해 탑 속에 감금된 아름다운 다아나 곁에 제우스신이 황금의 비로 변해 몰래 들어가 결국 영웅 페르세우스를 낳았다는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의 그림은 풍만한 醇厚(순후)한 나체화 매력을 나타냈으며. 황홀하고 관능적인 경지로 묘사한 명작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화려한 홍색의 장막이 드러워진 침대에 陶然(도연)하게 몸을 누이고 있는 다이에의 모습은 그의 나체화 중 가장 매력적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반이 그늘진 아름다운 얼굴은 황금의 비가 내리는 것을 반기며, 윤기 있는 표현을 하고 있다. 반면 다이나의 아름다운 情念(정념)의 희열과 반대로 화면 오른쪽 바른쪽에 앉은 노파의 얼굴에는 이 황금의 비를 두 손으로 입은 치마를 벌려, 많이 받으려는 物慾(물욕)의 천박한 표정을 짓는다. 암회색의 그림 배경으로 하는 여신의 아름답고도 늠름한 누드모습의 장면은 이미 17C 바로크 회화의 출현 예고하고 있다.
티치아노는 또한 일찍부터 초상화 부분에서도 두각을 나타났다. 티치아노의 베네치아공방을 운영하던 시기 무렵인 초상화 초기작품은 남/녀의 가릴지 않고, 모델들의 독특한 특성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위치와 그들의 성격을 잘 드러난다.
‘라 사아보라(또는 라 스키아보나)’ 이라고 호칭으로 부르는 베네치아에 있는 슬리브여성(러시아의 여성)을 그린 그의 여인 초상화에서 슬리브의 여인만 갖는 특색인 동글동글하면서도 통통한 매력을 선보인 그녀의 모습을 그린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고대양식의 조각의 여성 부조 옆모습을 나타나기 위해 난간을 높게 자리하고 그렸다.
또한 그의 『화장을 하는 여성』은 초상화의 규약을 내밀한 양식의 무대로 변화시키는 데, 은밀하게 자신의 매력을 내포하고 있는 당시 여성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 작품의 그림에서 나타난 여성의 모텔은 한 남자에 의해 들려진 거울 앞에 머리를 손질하는 아름다운 여자로 그녀의 뒷모습이 볼록 거울에 비친다. 이 작품의 그림은 차분하면서도 육감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당대의 티치아노가 구사한 전형적 스타일 형식이었다.
그의 여성 초상화의 백미는『플로라』라 부르는 작품이다. 거대한 가슴 한 쪽을 풀어 헤치고 유혹하는 듯한 눈길로 꽃을 내밀고 있는 여인의 그림은 그리스신화에서 따온 여신을 이름을 따온 것만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 그림은 사실 베네치아에 있는 유명 유녀(遊女)의 중 한 여인을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어쩌면 이 초상화를 보는 초점은 관능적 선물의 유력한 모델로 여성의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이다. 작품의 그림 속에 있는 그녀는 자신의 은은한 매력을 이 작품의 그림을 보는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앞에 조르조네와 작품과 비교로 언급된 바 있듯, 티치아노의 여성 초상화 그림들은 감미롭고 명상적인 멋을 갖지 않는다. 대신 보다 당당한 고전적인 골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새롭게 가미된 심리적 동태와 보다 개방적인 형식에 의해 티치아노의 개인적인 화풍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도달된 자유로운 화풍은 무엇보다 색체가 우선 빛나고 찬란한 관능미가 화면에 구석구석 비추어진다. 그의 작품『클로라』등에서 보이는 희미하게 비쳐지는 얼굴의 홍조나 벗은 가슴에 드리워진 금발...... 등에서 기존 회가들 특히 피렌체 회가들이 도달할 수 없었던 완전히 해방된 자유로운 감정의 표출을 볼 수 있다.
그는 초상화 부분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그의 전성기 작품들은 『젊은 영국인』이라고 명칭이 붙은 어느 한 남자 초상, 이탈리아 나폴리의 국립미술관에 있는 『교황 바오로(파울투스) 3세와 조카들』. 스페인 톨레드 대성당 안에 있는 『교황 바올로 3세』의 단독 초상 등이 존재 한다.
티치아노는 1545년 10월부터 그 다음해인 1546년 6월경까지 로마에서 머문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이때 미켈란젤로도 만났다. 사실. 로마에 떠나기 몇 해 전부터 서서히 그의 그림 방식에 변화를 추구한다. 인물들의 형상화 방식을 좀 더 역동적이면서도 기념비적 스타일로 변화해가는 것으로 로마방문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기법을 본받았다, 브레시아에 있는 산타 나자로에 셀소 성당에 장식하고 있는 『아베롤디의 병풍』의 아랫부분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그린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노예상 중 하나를 본 따,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도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그린 그림표현을 가장 만족했다고 자평했다,
로마의 다른 예술가들 마찬가지로 그도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 궁전의 一室(일실)을 장식화 하는 일 하였다고 한다, 아마 교황 바올로 3세와 만남도 이루어져 위에서 말한 초상화를 그린 것 같다. 이 때 그린 작품『교황 바오로(파울투스) 3세와 조카들』의 그림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림의 가운데 앉은 가톨릭교회의 늙은 통치자 바오로(파울투스) 3세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려는 젊은 나이인 친척(조카) 알렉산드로 파르네세를 돌아보고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알렉산드로 동생인, 오타비오는 조용히 (이 작품의 그림을 관람하는) 우리를 지켜본 듯, 눈을 그림의 정면 앞으로 바라본다.
사실 이 그림이 나오기 20년 전 라파엘로의 작품『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 그림을 그린 것과 설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움직임과 인물들의 생생한 특성을 강조하여 라파엘로의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 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로마함락 직후. 어려운 제정문제와 가톨릭 수장으로 교황(청) 위상이 떨어져 있을 시기임으로 서로간 갈등, 음모 등이 일어나고 있은 상황에서 교황자신도 조카(추기경)들 사이에서 이러한 것을 느낄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위의 추측이 맞는다면 (거짓으로)경의를 표한 충성맹세와 흔들리는 눈동자들은 그러한 것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위의 근거 없는 애기가 되어 있긴 한데, 아무튼 당시 교황청이 큰 위기가 초래한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 그림은 교황청 내 갈등이 봉합된 채 마무리한 것처럼, 그가 로마의 채류기간 내 또 하나의 미완성작인 교황바오로(파울투스) 3세 단독 군상 그린 작품이 남겨진 것과 함께, 결국 카를 5세의 초청으로 티치아노가 로마를 떠남으로써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초상화부분 제일은 초청받아 당시 아우부르크의 궁에 머물고 있던 신성로마황제인 카를5세(또는 카얄5세)의 기마상과 그에 대한 초상화 몇 점으로 뽑힐 수 있겠다.
『카를 5세 기마상』또는『뮐베르크의 황제 카를5세』라 불러지는 이 작품은 카를5세가 이끈 군대가 뮐베이크 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위해 제작한 것으로 카를 5세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잘 담아져 있는 단독 가마상의 그림이다. 이러한 구성과 표현방식은 후대의 가마상의 그림에 기준이 되었다.
티치아노는 카를 5세의 모습을 잘 담기 위해, 홀쭉하게 야횐 황제의 턱을 되도록 드러나지 않게 표현하고, 엄격해 보이는 얼굴로 표현했다. 또한 해가 질 무렵, 황혼의 풍경이 황제의 금속 갑옷에 두른 빨간 휘장과 조화를 이루며, 고독한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하이라이트와 반사광을 이용해 금속 갑옷이 더 빛을 발휘하게 하며, 황제로서 위엄을 보여준다,
더불어 가톨릭의 수호하는 기사로서의 모습도 보여주는데, 황제가 들고 있는 창은,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며, 14성인 가운데 한명인 성 게오르기우스의 무기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카를 5세가 이끄는 제국 궁정의 전속회가로 인정받고, 후작의 작위까지 주어진 그는 카를 5세의 초상화 몇 점을 선보였는바, 이 때 카를 5세를 그린 대표 작품이 『개를 데리고 있는 카를5세의 초상(Charles V Standing with His Dog)』, 『갑옷을 입은 카를 5세 Charles Ⅴ in Armour』둥이 있다.
현존하는 티치아노 작품들이 전 세계 미술관/ 박물관에 있지만, 베네치아와 로마, 나폴리 등지 이탈리아 외에 그의 많은 작품들이 오스트리아 비인 미술관에 30점을 비롯하여,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독일 뮌헨 미술관 등 주로 카를 5세가 다스렸던 합스부르크家 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에 있는 사실은 비인이나 뮌헨이 이와 같은 작품을 사올 수 있는 (티치아노 공방이 존재하는) 베네치아에서 가까운 지리적인 여건 외에도 카를 5세와 티치아노의 두 사람 인간적인 관계사이가 친밀했다는 이유도 후세 합스부르크 왕가의 인정 또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제기이다.
티치아노는 전통적인 중세 종교화나 종교적인 그림에도 훌륭한 역작들이 많다.
티치아노의 종교제단화인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작품의 그림은 조반니 벨레니의 일반적인 성모화 즉 성모를 중심으로 성인 두 명의 좌우로 배치하는 형태를 따랐으나, 시중드는 성인들을 단순한 대칭적 배열 형태로 배치하지 않았다. 그는 성모를 그림의 중앙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로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바, 이 전의 가톨릭의 종교 제단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계단이 있는 옥좌의 옆으로 십자가의 성혼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성 프란체스코와 왕좌 아래의 있는 열쇠를 놓고 있는 성 베드로가 성모 앞에 나오면서, 이 일을 적극적으로 맡아서 하는 듯하다.
성인들 아래의 제단화의 헌납자를 그려 넣은 전통의 관례는 그대로 따르지만,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을 묘사하였다, 이 작품의 그림은 베네치아의 귀족인 야코포 페사로가 오스만제국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으로 감사를 표하는 성의로 제작되어졌다. 그러므로 작품의 그림에서 페사로는 성모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있고, 그 뒤에 수하 한사람이 오스만 제국의 포로 한명을 끌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성모와 성 베드로는 인자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고, 성 프란체스코는 그 좌측의 구석에 있는 페사로의 가족들을 소개한 듯, 아기예수의 시선을 돌리게 하고 있다.
이 장면의 그림배경은 마치 큰 고대의 노천 궁정 건축물로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그 기둥 가운데, 떠있는 작은 구름위에 아기 천사들이 장난치듯, 십자가를 세우고 있다.
이 그림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 티치아노는 그림에서 전통적 구도와 오래된 규칙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그 예상치 못할 과감성과 대담성은 어쩌면 그 당시 사람(회가)들에게는 전체 그림구도가 한쪽에 치우친 결과를 낳을 것 이라는 예상할 것 같다.
그러나 전체그림을 완성되자. 그 예기치 않는 구도는 그 예상과 달리 전제 그림에 조화를 이루며 그림을 오히려 생기 있게 활기찬 모습으로 만들어 주었다. 티치아노의 빛과 색체로 의해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 했다. 또한 우측의 펄럭거리는 깃발 하나로 좌측 성모와의 대칭을 이루며 균형을 잡는 그의 기막힌 생각에 그 당시 회가 세대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양쪽의 그림 구도는 오늘날 베네치아 아카데미 건물 일부로 사용하고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 카리타 성당에 있는 그의 또 다른 대형 종교 제단화인『성전을 방문하는 성모마리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림의 이야기 속에 담아져있는 배경의 다양한 건축물과 그 내부가 구도를 이루고 있으며, 도시 풍경을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
여기에서 보이고 있는 오른편 세밀하게 묘사된 건축물들은 왼편의 산이 있는 풍경과 높은 건축물과의 일정한 균형을 잡으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또한 티치아노는 대규모의 종교 제단화의 그림 말고도, 종교적인 인물이야기나 성인 인물이 나오는 단독 군상 그림의 작품에도 능했다.
그러한 대표작품인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작품의 그림은 신약의 루카복음 내용에서 나왔다, 예수가 일곱 마귀에게서 구원해 준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일곱 마귀에 시달렸다는 특징이 죽음에 이르는 7개의 죄악과 연관되면서,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으로 인식되어오다가, 종교적인 중세를 넘어와 여러 가지 내용이 더 붙어나 성적 간음죄를 진 창녀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는 중세 6C말엽 교황인 고레고리大帝(대제)가 (예수가 그녀를 구원한 직후)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발을 눈물로 닦고, 회개한 죄인과 막달라 마리아가 동일 인물이라고 공표함에 따라, 죄인이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정체성은 확고해지기에 이른다.
그 이후 나오는 이야기인 막달라 마리아의 운둔 생활은 9C경에 운둔생활을 했다는 이집트의 마리아의 이야기가 각색되어 성인전에 실려 유행함에 따라, 이 이야기가 막달라 마리아의 전설에 흡수되면서, 은둔수도자라는 것도 함께 덧색되기에 이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적인 (간음)죄를 지었지만. 고된 참회 생활을 통해 용서 받은 여인“의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는 12C경 탁발수도회에 의해 신자들에게 참된 신앙적 표본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것이 16C초 중반에 이탈리아에서 재유행되면서, 막달라 마리아는 여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인물로서 중요한 경배의 대상으로 추앙받는다. 이 작품의 주문자인 비토리아 클로나는 1520년 크게 일어나기 시작된 종교개혁 분위기 속에 단체생활을 통한 개혁보다는 개인의 신앙적 실천으로 인한 개혁으로 나아가겠다는, 무엇보다 예수의 신봉을 강조하였던 복음주의교(evangelism)개혁자로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죄를 참회한 여인이자 개인의 영적인 개화를 분명히 나타난 성인으로 보았다.
따라서 티치아노의 작품『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콜로나가 생각한 막달라 마리아 모습을 완벽히 재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거기에 콜로나를 위해 티치아노에게 작품을 주문한 것(그림 값의 치룬 것)을 알려진 페테리코 곤차가는 막달라 마리아를 “아름답고, 눈물을 모금은 모습” 으로 그려달라고 당부했다. 실제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두드려진 특징인 부인할 수 없는 성녀의 아름다움과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움은 덕스러운 기독교 정신의 상징으로 성녀의 눈물은 참회의 증거물로 제시한다, 따라서 성인인 막달라 마리아는 죄를 지었지만 예수의 사랑과 참회를 통해 성인으로 거듭난 본보기로 나타나고자 하였다, 이 작품의 그림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마주한 성도들은 동질감과 친근함을 느끼고, 나아가 참회하는 성스러운 모습을 봄으로서, 참회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티치아노는 작품의 그림에서 죄와 참회를 구분하고 (죄를 진 우리에게) 참회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신도들에게) 전달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오자, 엄청난 비난을 쏟아졌다. 그들이 생각하는 성인으로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다. 상체 옷을 벗고 가슴을 내놓은 채 있는 나체의 모습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미 완성되어 주문자에게 간 작품을 고칠 수 없는 노릇이고 해서 그냥 두었는데. 티치아노의 노년인 70세에 이 작품을 다시 그려 몇 가지 수정하여 내도록 한다. 즉, 이 작품의 수정판을 따로 제작한 것이다. 보기에 수정판의 그림은 원본과 다를 바 없다, 상체에 옷을 입은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다, 다만 땅에서 해골의 모습이 추가되는 등 몇 가지 내용이 더 추가되었으나. 처음 보는 감상자들의 눈에는 크게 차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원본은 피렌체의 피터 궁전에 있고, 수정판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있는 에레미타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세례자 성 요한』, 이 작품 역시 기독교의 초기 성인 인물이 나오는 단독 군상으로 된 티치아노의 대표적인 그림 작품이다. 원래는 베네치아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 안 사제석의 오른 편에 위치한 예배당에 걸려 있던 작품으로 배경과 인물의 율동감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이 작품에 단독군상으로 나타난 남성은 그의 기념물적인 십자가를 들고 있으며, 웅변을 하고 있는 몸짓의 모습에서 성 요한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 수 있는데, 중세이후의 고통스럽고, 거칠게 묘사되는 성 요한의 전형적인 도상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티치아노는 이 작품에서 매우 강하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성 요한을 그렸다.
작품의 그림에서 전체적인 율동감이 살아있는 성 요한의 모습은 정교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것임을 눈치 챌 수 있는 바, 특히 우측의 팔 동작은 티치아노의 인체 해부학적인 뛰어난 면을 말해 주는 바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실례와 고대 조각 작품들을 떠오르게 한다. 실제로 적외선 사진의 분석으로 보면,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한 스케치를 했음을 안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회파들은 색체에서는 뛰어나지만, 인물의 데생 능력 면은 그렇지 못하다는 토스카나 지방의 예술가들의 평을 비판하는 반론의 증거로 제시하는 듯하다.
이를 본 동시대인들은 이 작품 그림의 스케치와 색체에 대해 감탄했으며, 곧 이 작품은 유명해졌다. 현재 이 작품의 실물은 베네치아에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 또한 티치아노는 1565년경 새로운 기법(바로크 풍)으로 이 작품을 한 차례 모사했는데, 모사 작품이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에스로레알 궁에 보관이 되어 있다.
티치아노는 일생동안 그의 아틀리에를 이끌며,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각지에서 약 600점의 넘는 작품을 제작하여, 그가 살던 르네상스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아주 생산적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 종교적 주제를 담은 작품들, 초상화, 일반적인 풍속을 담아낸 풍속화나 풍경적인 소재. 우의(寓意)화, 역사적 소재나 그리스신화와 같은 전설 및 신화적 소재 등 많은 양의 소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자유로이 다루고. 그 소재들을 특징에 따라 완벽하게 다르게 소화하면서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의 회화의 기본적 특징으로 (당시 네덜란드 지역 미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베네치아미술의 특징적인 요소가 담아져 있는데, 이는 안정적인 구도와 꼼꼼한 세부, 매끈한 마무리가 특징인 15세기 회화 전통과 근본적으로 다른 16세기적 미술, 즉 활기 넘치는 혁신적인 구성과 색채와 붓 자국이 살아 있는 회화적인 회화(painterly painting)로의 이행을 확실히 보여주고, 이후 서양 회화의 기본 매체가 되는 캔버스에 유화 기법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회가로 평가 받는다.
티치아노의 이러한 그림(기법)은 당시의 르네상스 말기의 한 화풍으로 나아가, 틴토레토, 카날레토, 베로네제, 카르파초 등 르네상스말기 회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또 초기 바로크시대 화풍의 선구자로 작품의 (그림의 배경 등에서) 미적구성으로 일구어 놓은 회가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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