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및 결론
단데의 시작으로 시작되어, 조토의 그림으로 완성되었던, 트레첸토는 브루니와 알베르티의 이론과 더불어 회화, 조각, 건축이라는 조형예술의 3대 장르가 세분화되어 발전하는 콰르첸로토 시대가 열렸다. 기베르티의 표현방식과 브루니와 알베르티의 인문사상의 미술 이론을 바탕으로 회화의 마사초, 조각의 도나텔로, 그리고 여기서는 따로 그의 작품의 내용을 언급되지 않은 건축의 브루넬레스코의 3대 거장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서로간 협력과 경쟁을 통해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인물이다. 이를 근간으로 이탈리아르네상스 예술이 본격적으로 활짝 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연관이 깊은 네덜란드(플랑드르) 지방의 회화는 자기만의 독특한 특성을 가진 예술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나갔는데, 이에 얀 반 에이크, 로하어르 판 데르 베이던과 같은 대가를 낳았다. 이들은 특히 세밀한 표현을 할 수 있게 한, 유화의 특성을 살린 초상화 및 초상적인 종교 회화부분에서 예술의 빛을 발휘하였다.
15C를 접어들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는 바, 14C말에 발전된 원근법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미술에 적용되었고, 네덜란드 지방으로부터 전래된 유화기법의 소개와 자체 스스로가 만든 화풍의 다양함은 다작의 예술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이 되었다, 여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1번지인 메디치가(家)가 이끈 피렌체의 정치적 요소들과 비잔틴 제국의 멸망계기로 비잔틴 학자들과 예술가의 대거 정치적 망명 등 국제/정치적요소가 더해진다. 또 계속하여 새로운 기술로 인하여 미술기법의 발달과 복잡한 국제/정치 요소는 미술의 다양성이 유럽에 확산되는데 커다란 기여했다.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의 미술은 15C 중엽에 접어들면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중에서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봄의 우이(또는 프리마베라)』 등 작품을 통해, 기존의 종교적 성향인 예술과는 달리 그리스신화라는 새로운 모티브를 통해, 예술의 주제로 다양성을 확보하고, 예술의 질을 높이는데 성공했다.
15C 중엽의 전성기 르네상스 시기 활동하기 시작한 레오나르도는 한가지의 예술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다양한 방면에서 미술을 연구하고, 군사전문가로, 과학자로, 건축가로, 의학(해부학)전문가로 어려 방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생각이 집대성한 비밀노트를 보면 기계설계도의 난잡한 설명, 그림을 위한 스케치, 단상에 대한 메모, 제법 정리된 과학논문이나 그 단편 등이 잡다하게 섞여 있다. 이를 살펴보아도 그는 어떤 한 분야도 관심 있게 관찰하고, 발견하는데, 무한한 흥미를 가져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예술과 과학기술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작품을 그리는 일이 지체된 것도 스케치(예술)의 그림 바탕에 과학적인 설명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그의 고집스런 생각 때문이었다.
화가로서의 레오나르도는 예술에 대해 한 사람의 기술자로서 접근한 사람이다. 거기에는 과학적인 체계가 뒷받침 되고 있는 그의 생각과 노력이 담아 있다,
르네상스의 이러한 개인주의적 측면을 대표하는 생애를 보낸 그는 통속화되어 터무니없이 유명해진 『모나리자』, 흑은 『최후의 만찬』등 그의 걸작들은 그 끊임없는 노력의 방대한 집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노트에 의해 나올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예술가를 시각적 관찰에서 얻은 진실하고, 정확한 체험의 자료들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여겼으며, 그 고귀한 소명을 깨닫고, 자연의 방대한 영역에서 그 비밀을 캐냈다. 그 연구 결과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의 (근대)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아주 참신한 방법의 경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끝까지 시각적 관찰에 의한 경험주의자로 남았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천재성에 힘입어 예술과 과학을 종합시킨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피렌체의 미술은 곧 이탈리아 중부로 퍼져 중세 중심지였던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도 영향을 주는데, 여기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진정한 황금기를 맞게 된다, 피렌체가 로렌초의 사후 사보나콜라의 신정정치와 프랑스의 침략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반면, 로마는 르네상스교황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등으로 이어지는 교황(청)의 정책, 즉, 지속적이고 계속적 이어지며,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진흥 정책과 예술가 보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아 분위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이에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라는 천재적인 인물이 여기에서 예술의 빛을 발휘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끌어 갔다.
이러한 로마의 교황청 정책은 크게 르네상스 중/후기 미술이 활성화되어 가는데. 특히 라파엘로에 있어 르네상스 미술은 황금기이자 절정기를 맞는다. 우르비노 출신인 라파엘로는 는 우르비노 궁정화가 출신으로로,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치오에게 그림의 기초를배우고 또한 궁정의 인문주의 철학을 소개했는데, 이를 통하여 라파엘로는 일찍부터 과거의 문화적 유산과 16세기를 내다보는 새로운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가 11세 무렵에 죽자, 우르비노를 떠나 페루자에서 피에트로 바누치 즉 페루지노 문하에서 수련을 받았다.
교황 식스투스 4세 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의 아래쪽 벽화장식을 위임받은 회가단에도 들어간바 있는 페루지노는 당대 최고의 미술가 중 하나였으며, 특히 성모를 아름답게 그리는 데에는 일인자이었다. 그는 감상적인 시각과 풍부한 윤곽선을 이용하여 당대의 그 누구보다 성모와 성인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나타나 보였고, 서정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에서 보듯, 색체의 선택에 있어 섬세한 감정을 가진 예술가인, 페루지노는 자기의 예술의 관한 대부분을 라파엘로에게 전수하였고 라파엘로의 초기작들은 스승 페루지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페루지노공방 기간에서 그린 『기사의 꿈(1500년경)』,『마리아의 결혼(1504)』 등에서 보둣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의 확연한 예술성과 이를 나타나는 기술과 힘을 흡수하여 이를 자신의 미술에 대한 기초의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끊임없이 배움에 몰두하였다. 그의 나이 19세경에 간 피렌체에서 선배격인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의 예술작품을 보고, 그림의 기법을 알아내는데 노력하였고, 그 결과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레오나르도의 환상적 분위기의 표현법을 결합하여, 자기만의 예술적 아이디어를 활용하는데 성공하였다.
웅장하고 조형적인 전성기 르네상스의 양식의 선구자로 자리 매김하였다.
그가 피렌체 머문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 중에서 그의 유명한 작품은 『그란두카(대공(大公))의 성모(1505년경)』와 같은 아름다운 성모상 그림들과『초원의 성모(1505년경)』,『검은 방울새의 성모(1506년경)』,『아름다운 정원사의 성모(1507년경)』,『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테리나(1507년)』등 성모자, 성녀를 표현한 작품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란두카의 성모(1505년경)』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 중 현재까지 피렌체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며, 피렌체에 있는 피터궁(宮)(의 박물관)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라파엘로는 15C 피렌체의 거장들의 영감에서 많이 배우고, 자기의 작품에 형식과 구도를 거기서 얻은 영감에서 따오곤 하였는데 이 작품도 역시 마찬가지이었다. 이 작품의 그릴 때, 도나텔로의 마돈나 조각, 루카 델라 로비아의 텔라코타 조각상의 기본적인 구도를 활용한 작품이다. 또한 스승 페루지노 화풍에 더 장중하고 풍요롭게 보이는 형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도 들어간 듯 하다, 『그란두카의 성모』작품에서 보이듯 단순하고 어두운 배경에 대한 실험적 요소는 이미 레오나르도가 작품의 단순한 형태 구성적 요소 뿐만 아니라, 부조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 사용하였던 것을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의 기술을 차용한 것이 분명하다,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 중 현재까지 피렌체에 남아있는 작품 중 우피치 미술관에도 존재하고 또 다른 명작인 『 (검은) 방울새의 성모 (1506년경)』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모자를 그린 작품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듯 붉은 옷에 푸른 망토를 걸친 마리아의 머리를 정점(頂點)으로 하고 어린 요한과 아기예수를 이용한 종장(縱長)의 삼각형구도를 구성하였다.
1508년 무렵에 피렌체를 떠나기 전에 그린 또 다른 성모상으로는『(아름다운)정원사의 성모(1507년경)』이 있다
이 작품 성모화(聖母畵))는 가련미(可憐美)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지혜의 상징을 뜻하는 책을 든 성모 마리아가 푸른 망토를 반쯤 걸친 채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선 아기들(예수와 요한)들에게 애정이 듬뿍 든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요한은 예수를 바라보고 있고 예수는 성모마리아를 향하여 눈길을 하고 있음으로 우리의 시선은 위 시선 그대로 차례로 옮겨지는 것을 유도하며, 성모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있다
라파엘로의 명작들 특히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마리아상은 마치 르네상스시기에 표현되었던 성모마리아상의 모든 장점을 모아서 표현한 것 같아 보였다. 이런 것들은 스승 페루지노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후 모든 예술가의 장점만 뽑아서 자기만의 색깔로 융화시킨 라파엘로의 천재적인 기질과 그만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특히 동시대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그에게도 엄청난 자극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피렌체 머문 시기에 라파엘로는 아름다운 성모상과 어떤 이야기가 담근 종교화 말고도 피렌체의 관리나, 부유한 상인들을 대상으로 초상화도 그렸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피터궁전에 전시되어 있는 도니 부부의 초상화로 부부를 따로 그린 하나의 세트로 되어 있는 두 점인 작품이다. 『아놀로 도니』와 그의 부인인 『막달레나 스토로치』 초상화가 그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사실주의적이고, 단독직업적인 인물의 묘사가 압도적이게 두드러진다.
1508년경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오2세의 초청으로 갔는데.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 궁에 있는 스탄차(stanza)라고 알려진 방의 벽면에 프레스코들을 맡아 그렸다. 당시 그는 프레스코화의 작업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명의 방“을 맡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자, 결과적으로 나머지 방 즉, ”엘리오도로의 방“(Stanza di Eliodoro)(1512-1514), ”보르고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1514-1517)도 의뢰 받았다. 라파엘로는 이방들의 벽과 천장에 있는 그림들은 방의 기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프레스코에서 완전한 디자인과 균형 잡힌 구성의 탁월한 솜씨로 증명해보였다
특히 바티칸 내부의 서명실에 천장벽화를 그리고, 양면의 커다란 뤼네트 속에『성체논의』,『 아테네 학당』 나타났으며, 그 옆(천장부분)에 있는 작은 뤼네트에 철학(도덕)개념이 강한『미덕 (Virtues)』과 아래 부분에 창문의 틀에 있는 뤼네트에 시/ 문학(또는 음악)개념이 강하게 비쳐지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파르나소스 (Parnassus)』그렸는데, 이는 당시 인문주의로 신플라톤주의의 근간 사상인 진/ 선/ 미를 나타내려고 하였다, 라파엘로는 이것들을 자신의 온화한 화풍으로 그려냈다. 이것들은 각자 지식의 네 분야인 사학(史學), 철학(哲學), 신학(神學), 법학(法學)이 기본 주제로 구성되고, 시(또는 음악)와 삽도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종교적 성격이 강한『성체논의』와 반대 성향을 지니게 되는 바, 이 작품의 그림에서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합리적 진리인 철학(哲學), 그리고 그 속에 인간들이 이루어 내려온 역사(歷史)를 지닌 사실과 사상을 전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안에 근거한 느낌을 주는 로마에 남아있던 고대의 건축물의 미와 기하학의 재발견이라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장엄하고 고전적인 건물을 배치하고, 그린 그림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군상(群像)의 집단들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그림에서 몇 중요 인물들이 라파엘로 자신을 포함한 자신이 살고 있는 르네상스의 시대 실존 (예술가인)인물들의 얼굴 초상으로 표현한 이 작품에서 인물의 인상과 특성을 명확하게 나타나고자 했다. 이리하여 이 작품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이 차분하고, 균형 잡힌 질서를 느끼게 하는 하나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 또한 원근법의 사용은 물론 격자 문양의 바닥과 계단의 관례를 탐구하여, 그림에 보듯 (넓은)광장과 계단에 인물들을 배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인물들을 전경에 밀집시키기보다, 계단주변에 분산시켜, 시각 상으로 더 많은 인물들 보이도록 그려 넣었다.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최대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적어도 1512년경 무렵에 그는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탈리아 예술가의 최고 반열에 오른다, 그는 교황청의 내부 작품외에도 교황청 내 사람들의 초상화나 로마에 사는 귀족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도 많이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쉬지 않고 계속하여 작품을 냈으며, 죽을 때까지 밀려드는 주문에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라파엘로가 이때 그린 그림은 성모 등을 그린 종교화 말고도 프레스코화, 초상화, 등 장르를 따지기 않고, 어려가지 작품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성모는 영광의 존재로 나타나며 소박한 인간상은 천상의 버전으로 충만한 장엄함으로 그려져 완전히 내재된 속성으로 그려지게 되고 하나의 기준으로써 어려가지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고상함과 여유로운 우아함을 나타난 『폴리뇨의 성모 마리아 Madonna di Foligno (1512)』성모를 나타난 작품의 종교화는 물론 초상화를 많이 나온 시기이다. 『교황 레오10세와 추기경들(1518-19년경)』을 비롯하여 『아라곤의 잔르 초상(肖像) (1518년)』, 『발터자르 카스틸리오네의 초상(初喪) (1515-16년)』, 『배일을 쓴 여인 (1516년경)』, 『젊은 여인의 초상(肖像)(1518-19)』, 『외뿔송아지를 안은 여인 연대추정불가』등이 있다. 그는 남/녀, 또한 계급을 가르지 않고. 모두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는 라파엘로가 가장 성숙한 예술로 나아갈 30대초반 대로 라파엘로의 후기 시대인 그림이다, 특히, 작품『교황 레오10세와 추기경들(1518-19년경)』의 그림에서 보듯, 르네상스기 교황 레오 10세와 메디치가 중심인물을 그렸는 바, 인물의 사실적 묘사와 그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기 라파엘로는 성모상 및 이와 분위기와 모습자체가 비슷한 여인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배일을 쓴 여인 (1516년경)』를 비롯하여, 『젊은 여인의 초상(肖像)(1518-19)』, 『외뿔송아지를 안은 여인 (연대추정불가)』등 많은 작품이 나타나고자 하는 그림은 진위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 여인 상이 라파엘로에 가슴 속에 내재된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냈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동일한 시대작품인 『시스티나의 성모』, 『작은 의자의 성모』 등 그의 후기 작품에 나타난 성모의 모습이 이 여인과 가깝다는 사실도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리된 조용한 아름다움을 나타나고 있는 얼굴과 복잡한 옷 주름의 사실적인 의상표현, 콘트라스트 색의 대조는 이 작품 여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킨다.
라파엘로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변화산상에의 그리스도(1520년)』은 사실 1520년 4월에 그가 열병으로 급사해 라파엘로의 미완성작으로 완성부분인 상단그림과 하단의 밑그림만 남긴 채 있던 그림을 제자가 완성시킨 이 그림은 두 장면을 교묘하게 S자형의 동적구도(動的構圖)로 결합되어 성공적으로 감정을 고양시킨다. 소년에 대한 사람들의 흥분과 그 놀라움은 그 산상(山上)에서 떨어지는 기적을 본 장면의 충격과 결합되어 이룬 강한 동태의 전류가 형성된다. 빛에 의하여 더 부각되어진 그리스도의 상승력은 여전히 강한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하단의 떠들썩함에 대한 상단의 엄숙함이 이 그림이 주제 표현의 의미이기도 하다. 명암이 강조된 동적인 구조에 있어서, 바로크 양식에 가깝다는 평을 들기도 한 그날이 만37세인 라파엘로의 마지막작품은 그가 완성한 르네상스 고전양식을 스스로 해체하고 승천하고 말았던 안타까움이 더 해진다.
라파엘로가 회화부분의 한 부분 르네상스 예술대표자로 선출일 수 있다면 조각의 세계에서의 16세기의 대표자이며. 르네상스 건축/ 조각/ 회화 3대 (시각) 예술의 완성자이자. 종합 자는 바로 미켈란젤로임을 단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역량과 존재가 너무나도 뛰어나 있기 때문에 후대 오랫동안 제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진 예술가들도 모두 그의 영향과 존재의 그늘에 가려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각 부분에서 미켈란젤로야말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르네상스기 예술, 조각 전부이며 상징자체이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대단히 이 부분에서 후대 어느 예술가들도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완전한 예술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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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는 인간 정신이 일제히 중세 봉건적 지배의 세계로부터, 눈을 떠서 인간 개인의 힘과 지성이 크게 발전한 시대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온갖 의미에서의 힘과 힘과의 경쟁이 전개되었으며 또 미지의 것에 대한 발견, 중세 시대에 경시되고 있던 것에 대한 재인식에 쏟는 정열과 노력도 급격히 높아 갔다. 그래서 성숙한 인간의 능력이 그 전개를 억제당하고 있던 낡은 제도나 조직에 대한 반발이며 작이어서 인간의 능력이 이만큼 격동하고 이만큼 힘차게 진전한 시대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아는 것, 발견하는 것의 가까움을 알고 또 아는 일, 발견한 일을 너무나 많이 경험하게 되자 르네상스의 사람들은 되도록 많은 일, 온갖 것이 가능한 사람, 즉 '만능의 사람'이 되는 것은 이상으로 여겼다. 이러한 왕성한 인간의 발전 속에서 나온 최대의 인간이 서로 라이벌로 대립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였다.
오늘날에 와서 미켈란젤로를 그가 실현한 업적의 분야에서 다루어 보더라도 그 위대함에 충분히 수긍이 간다. 가령 바티칸궁 내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대벽화'의 화가로서의 일면, 또 로마의 '성 피에트로 대성당'이나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예배당인 산 로렌초 성당에서 보는 건축가로서의 일면, 더욱이 시인으로서도 뛰어났고, 고향 피렌체가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그 방위를 위해 크게 봉사도 하였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웅대하면서도 심오한 이상주의이며, 힘과 정열과 거대함과 궁극의 상을 본 인간상이다. 더욱 그의 깊은 주관성에 격렬한 내적인 힘의 강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에 의해 대표되는 전성기의 르네상스 예술에 직접 연결됨과 동시에 16세기 이탈리아 조각의 전형이 되었고, 그 조각 자체로 예술의 지배력이 되었다.
대표적인 그의 조각 작품으로는 역동감이 있는 남성의 미로 상징하는 초기의 『다비드』상, 중기에서 원숙기에 걸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를 위해 만든 깊은 지혜 담은 거대한 『모세』의 상과 복잡한 육체의 뒤틀림 속에 분노와 체념을 담은 듯한 많은 『노예』상, 생명의 깊이와 그 속에 내재든 한들과 현실에의 비판을 남녀 나체의 나체상에 상징하였다고까지 일컬어지는 메디치家 영묘가 있는 산 로렌초 성당(예배당)의 조각 등이 가장 유명하다.
이와 같은 미켈란젤로의 출현 때문에 다른 많은 조각가들의 존재는 역사상 아예 가려져 있다. 그들은 가령 미켈란젤로에 압도당하기는 했어도, 혹은 의식적으로 반발하였다고 해도 어떻든 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시대의 추이 속에서 더욱 격정적인 동세로 바뀌어 간 것처럼 16세기의 이탈리아 조각가 전체가 그런 길을 걸어서 고전적인 명쾌함에서부터 보다 현실적인 복잡함으로 바뀌어 갔다.
1499년에 완성한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걸작이며 그의 여러 피에타 상 중 가장 초기의 것으로 해부학적인 정밀함과 우미한 고전적 품격을 고루 갖춘 2인상이다. 그리고 『다비드』상은 도나텔로의 영향이 보이는 나체의 남성 입상으로 체구와 근육의 율동을 통해 남성의 美로 생생한 역사적 교훈과 당시의 현실감을 나타내고 있다. 본문의 글에서 언급 하지 않는 작품인 브뤼지 대성당의 『성모자』는 앞 시대의 성모자가 가졌던 온화한 유희성이 비감을 띠어 여기서는 성모의 얼굴이 우수에 차 있는 모습이다. 성모의 자태는 非(비) 개성적이며 중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얼굴 모습이다. 육체는 의상에 의해 완전하게 표출된다. 또한 『모세』상은 1505년에 만든 대리석 거상인데 좌상 조각이며 당시 지혜로써 '무서움'이라 일컬어지던 힘을 풍기고 있다.
또한 그의 중/후기 작품인 『승리』상은 극단적인 신체의 비꼬임을 보여 준다. 두부는 신체보다 훨씬 작고 그 우미한 인체의 비례가 매너리즘적인 인상 표현의 특징이다. 매너리즘 고뇌는 미켈란젤로 후기의 '피에타' 세 가지 작품과 초기의 청동제 작품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기존 가톨릭의 부패 등에 의하여 종교 개혁기이라는 불신과 회의의 시대에 산 가톨릭 신자인 미켈란젤로는 그가 만든 조각의 상들 속에 시대현장에서 오는 자신의 환멸감과 좌절감을 불어넣었다.
미켈란젤로의 초기의 군상은 분명 고전적인 작품이며 전성기 르네상스적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중년이후 작품들 특히,『피렌체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그리고 만년의 작품인 『론다니의 피에타』, 미켈란젤로 후기의 ‘피에타의 3가지 작품‘의 특성과 모양 형태만 보더라도 고전 형식의 부정과 육체나 물질의 공허함과 취약함에 대한 체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이들 작품에 병행하여 만들어진 그의 시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조각이나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많은 걸작을 남긴 미켈란젤로의 혼은 마지막으로 '피에타'에 담겨져 있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머무르는 동안 양감적인 내면의 감정을 가득 담고 있는 근육적인 헬레니즘 조각 등에 심취하였으며, 이것은 그의 양감적인 독특한 형상을 이루는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특질은 그의 회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인 '천지창조'의 인물 형상들은 나체의 ‘근육적인‘ 표현을 잘 보여 준다. 건축적인 틀 속에 수백 명의 율동적인 인물이 묘사되어 있는 이 천정화는 그의 뜻대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인다. 그 후 25년이 흘러 위기감을 극적으로 드러낸 듯하며, 천지 창조의 생명력 있는 표현과 대조적으로 『최후의 심판』에서 보듯 종교적 환상에 비추어 비극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가죽이 벗겨져 처형당한 인물의 모습이 미켈란젤로의 얼굴로 표현되어 있어서 예술가로서의 무가치함에 대하여 자조적인 고백을 그리고 있다.
그는 또한 건축에 있어서도 일가견을 선보이고 있다. 산 로렌초 성당 부속 건축물인 메디치家 영묘가 있는 신성구실내부건축물과, 메디치 도서관을 건축공사를 맡기도 하였으며, 또한 브라만테가 착공한 성 베드로 성당건축과정에서 특히 『 지붕(돔)틀 설계안』과 『파샤드 설계안』으로 그의 영향력을 동시대뿐만 아니라, 후세 건축에도 오랫동안 미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사 특히 회화부분을 언급할 때, 또 다른 중요한 지역인 베네치아 화파를 언급해야 옳은데, 베네치아 미술선구자격인 벨레니 家(가)로부터 시작되는 벨레니의 공방에는 베네치아의 예술적 인재들이 창조되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전통적인 미술 大家의 분위기를 이어받은 조반니 벨레니는 초기에 독자적으로 그린 그림들에서 아버지 야코포의 우아한 양식을 바탕으로 파도바 유파를 접목한 그림으로 나타나는 양식으로 한 기본 틀을 보여주는데, 특히 매부인 만테냐의 수수한 양식의 영향을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초기 작업의 특징은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통 The Agony in the Garden 1459』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모두 템페라로 제작되었으며, 그 자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정서와 깊이 있는 종교적인 감성을, 파도바 유파의 장엄함·엄격함과 잘 융합시켰다.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은, 초기의 성모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대부분 표현이 부드럽지만, 장식적인 화려함보다는 자연 관찰에서 끌어낸 감각적인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가 그린 초기의『피에타』그림에서 보듯 그는 매우 현실적인 그림으로 성모를 표현하고 있다.
또 그림의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양감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피렌체 화파의 전통이나 특히 만테냐 양식처럼 선을 주로 사용하는 표현이 많다. 그러나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에서는 선의 사용이 만테냐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우며 무엇보다도 묘사된 대상의 표면이 극적으로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며 드러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통』에서 보듯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깊고 넓은 풍경이 이 장면의 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풍경의 정교한 선적 구조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무엇보다도 새벽빛을 받은 듯 그늘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이나 찬란하게 반사되는 면을 표현한 색채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이는 빛과 색체의 관심, 부드럽게 완화된 거친 형태, 분위기 있는 풍경의 탄생을 보여주며, 이후 만테냐의 그림 특징으로 부터 멀어지고, 색체 위주의 감각적인 양식을 전개시킨다.
이탈리아 미술사에서 (플랑드로)지방에서 들어온 유화기법을 가장 먼저 사용한 거장에 속하며, 그의 미술세계는 중반이후 유채사용으로 인해, 이전의 선을 중시하의 양식에서 색체와 빛의 사용을 중시하는 웅장하고 기품이 존재하며 차분한 미술세계로 범위가 넓어진다. 이는 그의 공방에서 배운 제자들 즉, 조르조네, 티치아노 등에게 전수하면서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인 빛과 색체를 중요시하는 기법으로 한층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의 중/후반기 예술작품 중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이 종교적인 그림을 그린 제단화이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산 조베 제단화(1480-85년경)』, 『산 자카리아 제단화(1505년경)』 등 네덜란드 지역에서 전해온 ‘성스러운 대화‘의 성모자 군상의 그림으로, 그 당시 그가 그린 작품은 가장 인기 있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반 타원형의 건물 또는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성모의 반신상과 종종 난간에 서 있는 아기 그리스도의 전신상을 담은 그의 성모화 유형 그림은 그가 사후에도 그의 작업장에서 배운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경쟁적으로 수 없이 그러져 왔으며, 이러한 현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
그가 그린 초기의 유형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 바로『산 조베 제단화』작품으로, 이 그림은 그림의 배경이 중요한 위치로 건물의 실내에 위치하고, 강한 빛이 오른쪽에 들어와 후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역병의 수호성인인 성 조베와 성 세바스티아우스의 누드 상을 광채로 감싸고 있는 점은 이 그림만이 나타날 수 있는 특이점이기도 하다.
또한 후기 대표작으로써 그의 ‘성스러운 대화‘의 성모자 군상 그림에 최종적인 결론인 1505년 그의 나이 75세 노년 때의 그린 『산 자카리아 제단화』는 벨레니가 평생을 연구해 것들, 그동안 이루어졌던 실험을 총집결하고, 모든 역량을 쏟은 최고의 결정체인 작품이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에서 그는 특히 색체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동시대의 유명 작품들 비교할 때, 매우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림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살피지 전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체들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뛰어난 색체 감각으로부터 나오는 그의 유채 화풍은 제자인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에게 전수되었다.
조르조네는 35세의 짧은 삶이 애통스러울 정도로 그의 예술은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살린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의 미술 기법은 현대 미술과 비교해도 무방할 만큼, 매우 혁신적이었으며, 자연과 인간의 美적 표현을 매우 세심하게 표현을 한 회가이다.
특히 그가 그린 대표작『폭풍』은 그야말로 그의 작품 중 백미로 근대 풍경화의 시초로써 알리는 작품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나오는 지붕위로 나타나는 번개 치는 광경은 자연현실에서 세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결코 나타낼 수 없는 작품의 그림이다. 또한 어느 메시지를 담긴 것인지 통 알 수 없는 아이를 젖 물린 여인의 모습에서 그의 예술의 신비로움이 담아져 있다.
티치아노는 베네치아/ 로마/ 아우부르크 등지의 유럽각지에서 그의 삶과 예술적인 그림은 한 세기가 다가도록, 단지 회가로써 예우 차원이 아니고, 군주이나 황제들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종교화, 전설/신화적 그림. 우의화, 초상화에 이르기에 다양하고도 광범위한 주제를 그의 붓칠로 신성적인 작품으로 재탄생시키었다,
그의 초기 작품『성모의 승천』로부터 위의 글에서 언급이 안 되어 있는 말기의『피에타』에 이르기에까지 그의 종교적인 제단화에서는 하나님과 성모마리아와 예수그리스도, 그리고 성인들에 참모습을 그의 그림에 다양한 주제로 담아 놓았는데, 그 작품을 본 종교적 특성을 많이 받은 당대의 중세/ 르네상스인들은 아마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성모마리아 또는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듯, 저절로 회개하는 마음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많이 그렸던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신화에 관한 주제였다. 특히 여신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는 바, 그 중에 관능적인 모타브로 한 비너스로 한 주제에서 그리스 신화/ 전설화에 커다란 획을 남겼다. 그의 아름다운 배경과 함께 빛나는 여성 누드의 비너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인문주의가 반영된 정치적-문화적 특색과 르네상스의 참모습인 자연과 인간의 美적 요소의 재발견이라는 명제를 한 번 더 기억나게 해준다,
또한 초상화 / 초상적인 그림 분야인 베네치아에 사는 어느 여인들의 단독 초상화에서 카를 5세의 가마상 및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인물적인 특성들을 잘 표현하였는바, 여기서도 그의 세밀한 면이 잘 나타나 보이고 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지역 영향을 받은 스위스-독일 지역에서 16C 초부터 본격적인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지만, 이 지역의 특성- 게르만 전통에서 오는 중세 봉건 질서 영향으로, 또한 지역의 개방성과 특수성이 존재해서, 전통적인 르네상스적인 미술이 발전하지는 못하고, 뒤에 오는 매너리즘 및 바로크 예술적 특징들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지역의 르네상스 미술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이 지방의 대표적 예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북유럽의 레오다르도“ 라고 불릴 정도로 광범위한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그가 그린 유채 스케치나 초상화 분야에서, 또는 그의 전공분야인 판화 예술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을 연달아 내 놓았다.
그러나 그가 북유럽의 미술사에서 가장 큰 공로는 그동안 이루어지고 있는 예술적 특징들- 마티스 그뤼네발트와 소(小) 홀바인의 작품을 놓고, 양 극단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예술적 특징과. 각지 나누어져 있는 양식들을 조화라는 틀 안에서 통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둔다. 물론 1500년경부터 그의 예술이 인간과 자연세계의 드로잉과 세부에만 몰두한 경향을 보여 한계점이 있었다.
흔히 르네상스 예술이라고 불리는 시각 예술- 미술적인 점진적 변화는 길게는 중세말기, 짧게는 르네상스시대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14C이전부터 무려 2-4세기 걸친 시대상의 변화와 함께 오는 긴 역동적인 인류역사의 한 흐름의 부속물로 시대변화를 나타나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 사료들이다. 따라서 르네상스시대의 보는 관점에 따라, 그 해석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르네상스의 예술, 특히 미술적 특징을 가지고, 굳이 공통분모로 설명하자면. 다양하게 전개되는 (예술의 美적인) 흐름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나타나는데 관심으로부터 표현하고자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의 한 의식으로, 이전의 신(神) 중심의 사고 가진 종교적 위상에 부속되어 있던 미술이 (세상) 앞으로 나와. 인간세상과 연결하는 매기체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 것이 의의를 둔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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