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르네상스에 대해

4장. 르네상스의 중요 예술가와 작품으로 보는 르네상스 이미지와 시각. (10)

홍진영HJY 2016. 2. 21. 09:25

본론9. 르네상스 미술의 완성- 라파엘로

 

라파엘로 산치오( Sanzio Raffaello) 는 아펜니니 산맥의 중부에 위치한 또 하나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요 발상지이자, 문화 중심지이고. 14C1506년경에 세워진 우르비노 대학이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고, 우르비노의 두오모 건물과 두칼레궁전으로 유명한 우르비노에서 1483년경에 출생 하였다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치오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지만, 존경받는 (궁정)화가로, 교양 있는 사람으로 우르비노 궁정에서 유행하는 진보적 미술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 감시 아들 라파엘로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고, 또한 궁정의 인문주의 철학을 소개했는데, 이를 통하여 라파엘로는 일찍부터 과거의 문화적 유산과 16세기를 내다보는 새로운 사상들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우르비노 지방은 뛰어난 군인이자, 교양인으로써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의 지배 이래 르네상스 문화의 신흥 중심지(도시)가 되었다. 그는 교양 있는 군주로서 그가 다스려지고 있는 성읍도시 우르비노를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을 구현한 도시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모든 예술을 크게 장려했고, 도나토 브라만테,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를 비롯하여 뛰어난 인물들을 아름답게 재건한 자신의 대저택으로 초빙하고. 직접 나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궁정 회가로 고용하기도 했다.

 

이런 우르비노의 분위기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이 죽은 이후에도 그의 가계에서 계속 이어가는데, 이는 라파엘로가 이후에 배우게 될 모든 지식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그의 나이 약관 17세로 회가로 등록한 놀라운 예술(회화)의 조숙함 또한 어릴적 초년기에 살았던 이 도시의 문화적 생동감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11세 무렵에 죽자, 우르비노를 떠나 페루자에서 피에트로 바누치 즉 페루지노 문하에서 수련을 받았다.

스승 페루지노는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베로키오 작업장 출신이었고, 교황 식스투스 4세 로부터 시스티나 예배당의 아래쪽 벽화장식을 위임받은 회가단에도 속했다. 그는 감상적인 시각과 풍부한 윤곽선을 이용하여 당대의 그 누구보다 성모와 성인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나타나 보였고, 서정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에서 보듯, 색체의 선택에 있어 섬세한 감정을 가진 예술가이었다. 특히 그가 그린 제단화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난 성모에서 보듯 감미롭고 건전한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한 성모의 모습을 나타난 작품들은 라파엘로에게 그의 미술의 성장에 자극적 요소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것은 후에 라파엘로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찌 되었든 페루지노는 자기의 예술의 관한 대부분을 라파엘로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의 초기작들은 스승 페루지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페루지노공방 기간에서 그린 기사의 꿈(1500년경),마리아의 결혼(1504)등에서 보듯,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의 결점을 피한 반면, 그의 확연한 예술성과 이를 나타나는 기술과 힘을 흡수하여, 이를 자신의 미술에 대한 기초의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미학적이고, 뛰어난 감수성을 가졌으며, 세련된 취향의 소유자이었다.

그가 그림 배경인 신전 프리츠 부분과 모서리 부분에다 자기의 서명과 그린 연도를 밝힌 마리아의 결혼(1504)은 중세 이후 자주 출현하는 주제로 그린 작품이지만. 공간 구성에 있어서는 기존 작품과 다른 참신하고 대담한 시도로 하고 있는 작품으로 르네상스적인 공간출현 및 화풍을 따른 것이 보인다. 그림에서 보이는 로마네스크 풍 건물의 뛰어난 원근법적 표현이나, 전경의 좌우에 일렬(一列)로 나란히 선 것처럼 보이면서도 오행(奧行)을 암시하는 인물 배치 등은 그의 감각적인 면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1503-4년경 아직 페루지노공방에 있을 때, 16-17세 무렵에 어린 나이에 그의 대규모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카스텔로 시에 있는 성 도메니코 성당 내의 가바리 예배당을 위하여 제작된 3폭의 제단화를 그린다. 이 작품은 몽드의 그리스도 책형중심으로 좌우로3인의 사자(死者)를 소생시키는 성 히어로니무스성 히어로니무스 의 기적세 폭의 작품이 그것인데, 이를 그가 혼자 그리기보다는 페루지노의 아틀리에 도움을 받아서 함께 그린 작품이라고 본다. 그는 이와 같은 대작을 그릴 때, 혼자서 완성하기 보다는 아틀리에나 다른 회가들과 어울러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다. 이때마다 그의 특유의 친밀한 사교력이 발휘하였음을 물론이다. 그리고 다른 대가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처럼 완성기간이 넘기거나 미완성으로 끝나는 작품이 별로 없어, 주문자들에겐 인기가 있었다. 이에 그의 부드럽고 친밀한 사교력은 주문자들에 더 호감 있게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라파엘로의 작품의 특징인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차분한 그림으로 주문자와 감상자 모두의 공감대를 사로잡았다.

 

아무튼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그의 초기작품 특징인 페루지노의 영향이 많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몽드의 그리스도 책형에서 십자가 위에 책형당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아래에 있는 그림의 상/. /우 로 양분되어 있는 (인물상) 구도의 형식이라든지, 인물들의 입은 옷 등에서 나타난 밝은 색상과 질감 및 (애도하는 슬픈) 인물 표현 등에서 그와 유사한 면이 보인다, 그래서 이 제단화에서 중심이 되는 이 작품만큼은 그가 그린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몽드의 그리스도 책형작품의 내용상으로 그리스도의 책형상 밑에는 좌/우로 성모와 복음서를 쓴 성 요한이 경건한 자세의 입상으로 보이고 있고, 이들 사이에는 역시 좌/우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성 히어로무스와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애통하고 있는 모습이다, 십자가형의 예수그리스도 양옆에는 하늘을 나는 두 명의 천사는 슬픈 표정으로 이와 같은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도식적인 구도형식으로 십자가상이 중심이 되어, 화면을 양분하고, 똑같은 각도에 대각선을 좌우로 만들어 인물을 둘씩 배치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예수책형이 진행되는 작은 언덕을 위시로 하여, 위에 있는 배경인 멀리 있는 산과 강이 있는 자연 풍경이 존재하며. 또한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맑고 푸르게 표현된 하늘은 이 작품의 그림에 공간성의 여지를 남겨 주고 있다.

 

1504년경에 라파엘로는 우르비노 공작의 계승자인 어머니가 써준 추천장을 가지고, 피렌체로 떠났다. 그 당시 피렌체의 미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라는 거장중심으로 양분되어 있고, 그 두 거장의 중심으로 한 (라파엘로의) 어려 선배격인 미술가들이 많이 존재 하고 있는 예술의 중심지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떠오르고 있는 신흥 라파엘로에게 기회이자, 위기로서 작용된다. 많은 작품들의 보고, 그 기술들을 배우는 기회로지만. 라파엘로에게 작품의 판매가 초기에 피렌체의 예술길드(조합)의 시장 독점이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되었다. 그는 피렌체시절 초기에는 친밀한 사교성으로 인한 인연과 추천장등에 많은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곧 알려지게 된다. 특히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배울 시기부터 미술 대가들의 특징을 차용하는데, 능력이 뛰어난 그의 실력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해결책과 기술양상을 스스로 익히게 되는 바, 웅장하고 조형적인 전성기 르네상스의 양식의 선구자로 자리 매김하였다.

그가 피렌체 머문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을 면면히 분석해 보면,십자가에 내려지는 그리스도(1506-7년경)처럼 예수의 수난과 피에타모습을 담긴 장면을 그린 종교화를 그린 것도 있지만, 그의 유명한 작품은 그란두카(대공(大公))의 성모(1505년경)와 같은 아름다운 성모상 그림들과초원의 성모(1505년경),검은 방울새의 성모(1506년경),아름다운 정원사의 성모(1507년경),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테리나(1507)등 성모자, 성녀를 표현한 작품들이 대다수로 스승 페루지노의 성모화처럼 비슷한 이미지로 나타나는 그의 편력을 채우는 작품들이 많다.

 

그란두카의 성모(1505년경)라파엘로가 그린 작품 중 현재까지 피렌체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며, 피렌체에 있는 피터궁()(의 박물관)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그림이 대공의 성모라고 붙인 이유는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공 페르디난트 2(Ferdinand II, 1578~ 1637, 재위기간 1619~ 1637)가 이 성모상을 워낙 좋아해서 어디 가나 성모상을 항상 휴대하고 다녔다는데서 이름의 붙었다,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자의 그림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그려졌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라파엘로의 작품 중 모든 이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검은 배경을 뒤로하고, 자애로운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성모는 시선은 비스듬히 아래로 깔고 있고, 성모의 팔에 안긴 아기 예수는 관람객을 향해 응시하는 예리한 화면으로 압도 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15C 피렌체의 거장들의 영감에서 많이 배우고, 자기의 작품에 형식과 구도를 거기서 얻은 영감에서 따오곤 하였는데 이 작품도 역시 마찬가지이었다. 이 작품의 그릴 때, 도나텔로의 마돈나 조각, 루카 델라 로비아의 텔라코타 조각상의 기본적인 구도를 활용한 작품이다. 또한 스승 페루지노 화풍에 더 장중하고 풍요롭게 보이는 형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영향도 들어간 듯하다. 그란두카의 성모작품에서 보이듯, 단순하고 어두운 배경에 대한 실험적 요소는 이미 레오나르도가 작품의 단순한 형태 구성적 요소 뿐만 아니라, 부조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 사용하였던 것을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의 기술을 차용한 것이 분명하다,

 

현재 피렌체에 있는 피터궁()(의 박물관) 에는 그란두카 성모(1505년경)외에도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이 몇 점 더 있는데, 의자의 성모,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교황 레오 10세와 추기경들이 그것인데, 이는 모두 1508년경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이주한 후에 제작한 그림으로써, 이는 후일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결정으로 로마에서 피렌체로 옮긴 것으로 안다.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 중 현재까지 피렌체에 남아있는 작품이 우피치 미술관에도 존재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또 다른 명작인 (검은) 방울새의 성모 (1506년경)그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라파엘로가 피렌체의 직물상이었던 로렌초 나시 (Lorenzo Nasi)의 결혼 기념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후 나시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16C 바사리의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에 기록 되어 있다.

자애로운 모습의 성모가 지혜의 의자에 앉아 아래의 어린 세례요한과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고, 세례요한은 예수에게 검은 방울새를 건네주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아기 예수가 쓰쓰다듬고 있는 검은 방울새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받을 수난을 상징한다. 발음상으로도 방울새 “cardellino“의 이탈리어 발음이 엉겅퀴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carbo“와 비슷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쓰게 될 가시면류관을 상징한다.

이 그림에서 보이듯 붉은 옷에 푸른 망토를 걸친 마리아의 머리를 정점(頂點)으로 하고 어린 요한과 아기예수를 이용한 종장(縱長)의 삼각형구도를 구성하였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모자를 그린 작품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실 이 작품(검은) 방울새의 성모16C부터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작품이다이 작품이 완성된 후. 40년 지난 1547년에 이 작품을 보관하고 있던 로렌초 니사의 집이 무너지면서 작품이 크고 작은 17조각으로 부서졌다. 이 작품이 17조각으로 부서진 채로 구입한 메디치가()가 리돌포 기를란다요 에게 복원을 지시하는데, 원작자인 라파엘로가 이미 1520년에 37세 나이로 로마에서 임종하였기에 그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리돌포 기를란다요는 17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작품을 붙이는 과정에서 무리한 복원을 시도 할 수밖에 없었고, 16C 이후에도 몇 번이고 다시 복원작업을 진행되었다. 이 서툰 복원 때문에 작품의 원래 색체가 많이 훼손되어 갔다.

현대에 들어와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우피치 미술관은 1990년대부터 차근히 복원 작업을 시도한다. X-선 찰영과 같은 첨단기술 장비와 과학적인 기법으로 라파엘로가 그린 다른 작품을 비교하고, 또한 동시대 색체연구를 통하여 얻은 결과물을 도입했다. 그 결과 완벽에 가까운 수준의 원작을 복원하는데 성공하였다.

10년간 복원작업을 마무리하고. 200810월에 1505년 원작의 모습으로 그대로 이 그림이 공개 되었을 때, 피렌체시의 지역 신문들은 문화관련 기사에 “10년간 떠나있던 피렌체 딸이 돌아왔다,”라고 언론보도를 하였다.

1508년 무렵에 피렌체를 떠나기 전에 그린 또 다른 성모상으로는(아름다운)정원사의 성모(1507년경)이 있다

이 작품 성모화(聖母畵))는 가련미(可憐美)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지혜의 상징을 뜻하는 책을 든 성모 마리아가 푸른 망토를 반쯤 걸친 채 자신의 무릎에 기대어 선 아기들(예수와 요한)들에게 애정이 듬뿍 든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요한은 예수를 바라보고 있고 예수는 성모마리아를 향하여 눈길을 하고 있음으로 우리의 시선은 위 시선 그대로 차례로 옮겨지는 것을 유도하며, 성모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감동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라파엘로의 명작들 특히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마리아상은 마치 르네상스시기에 표현되었던 성모마리아상의 모든 장점을 모아서 표현한 것 같아 보였다. 이런 것들은 스승 페루지노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후 모든 예술가의 장점만 뽑아서 자기만의 색깔로 융화시킨 라파엘로의 천재적인 기질과 그만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특히 동시대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그에게도 엄청난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피렌체 머문 시기에 라파엘로는 아름다운 성모상과 이야기가 담아있는 종교화 말고도, 피렌체의 관리나, 부유한 상인들을 대상으로 초상화도 그렸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피터궁전에 전시되어 있는 도니 부부의 초상화로 부부를 따로 그린 하나의 세트로 되어 있는 두 점인 작품이다. 아놀로 도니와 그의 부인인 막달레나 스토로치(1506년경)초상화가 그것이다,

 

주인공인 모델이 작품의 전면으로 앞당겨지고 그림배경인 멀리 있는 자연풍경이 뒤에 있는 초상화 기법은 모나리자등에서 선보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기법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강조한 신비스러운 분위기 유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으며, 사실주의적이고, 단독직업적인 인물의 묘사가 압도적이게 두드러진다.

남편인 아놀로 도니는 다소곳한 자세로 좀 냉철한 사업가로 나타나고 있으며, 부인인 막달레나 스토로치는 현재 사업가 사모님의 자신의 위치가 만족하고 있는 귀부인 모습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나타내고 있다.

 

1508년경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오2의 초청으로 로마로 갔다

교황 율리오2세는 당시 베네치아가 교황령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에 프랑스, 나폴리 등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하여 이를 물려 나게 하고, 1508년 가을 페루자와 볼로냐를 교황청의 지배하에 두게 한다. 1510년경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에서 강한 군사력을 지니었으며 프랑스 루이12세의 이탈리아 지배를 막은 업적도 포함해서 당대의 강력한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505년에는 스위스 용병근위대를 창설하게 하는 등 어려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커다란 업적은 르네상스의 교황수식어에 칭하는 예술분야에 집중되었다. 역대 교황 중 예술을 가장 크게 후원한 교황으로서, 미켈란젤로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브라만테와 라파엘로를 포함한 그 외 예술가들을 후원했다는 점이다. 또한 미켈란젤로에게 모세의 조각상을 세우게 하고, 시스티나 부속예배당에 있는 천장벽화들을 그리게 하였다. 브라만테 등 건축가들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공사를 위한 설계도를 만들 것을 처음으로 지시함으로써 이 후 약 120년 동안 지속된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첫발을 내었다.

라파엘로에게는 바티칸 궁에 있는 스탄차(stanza)라고 알려진 방의 벽면에 프레스코들을 그리게 했다. 당시 그는 프레스코화의 작업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명의 방을 맡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자, 결과적으로 나머지 방 즉, ”엘리오도로의 방“(Stanza di Eliodoro)(1512-1514), ”보르고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1514-1517)도 의뢰 받았다. 라파엘로는 이방들의 벽과 천장에 있는 프레스코에서 완전한 디자인과 균형 잡힌 구성의 탁월한 솜씨로 증명해보였다

 

이러한 방안에 있는 프레스코 작품의 구성 계획은 대단히 복잡하고, 구성요소 또한 역시 이지적이었지만, 지식의 네 분야인 사학(史學), 철학(哲學), 신학(神學), 법학(法學)이 기본 주제로 구성되어있다. 여기에 시(또는 음악)와 삽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주제는 상당히 방의 기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라파엘로가 맡은 방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인간에게 계시된 진리를 나타나 보고자, 그린 성체논의와 마주보고 있는 편에 그린아테네 학당이 있는 곳, 서명의 방(서명실)일 것이다. 두 개의 대형 뤼네트(lunette)인 반원형 창안에 각자 자리한 이 두 작품은 각각 신학과 철학을 나타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뤼네트에 그려진 것은 미덕 (Virtues)파르나소스 (Parnassus)이다. 라파엘로는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하기위해, 어려운 공식이나 개념대신 단순한 화학적 방법을 찾아, 이와 같은 대작을 그렸다는데, 그의 천재성이 여기에서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완벽한 구상을 가지고, 이를 표현한 균형 잡힌 구성의 내용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이 방들의 천체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 방안에서 한 참 머물며, 작품 속 그림 하나의 움직임이 다른 작품의 그림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상호작용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전체적인 윤곽과, 그 짜임새들의 조화와, 다양성을 느껴 봐야 할 것이다. 이 그림들의 방 밖으로 끌어내려, 축소판으로 그림을 보면 딱딱하게 보일 것이다.

작품의 그림 속에 분산되어 서 있던 개별인물들이 축소판으로 보면 어려 인물 군상속에 흡수되어 인물들의 모습과 맡은 역할 등이 분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구상의 우아한 선율의 일부를 형성하는 역할을 상실하여 버리고만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의 부족이라는 한계와 세밀한 관찰의 필요성 및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이유 등으로 독자들에게 작품 속 그림의 축소판을 낼 수 밖에 없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서명의 방(서명실)에서 중세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 당시 제 1학문으로 필수적인 요소인 신학의 요소가 가장 강하게 비추는성체논의(신이) 인간에게 계시(啓示)된 진리를 상징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그림은 중앙의 위에 아 버지 하느님에게 축복받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地上)의 옥좌에 자리하고 있고, 성모 마리아와 셰레요한이 좌/ 우로, 그리고 반원형(半圓形)의 양 날개에는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성 베드로, 아담, 복음서의 요한, 다윗, 성 로란, 성 지오르지오, 성 에티엔느, 모세, 성 자크, 아브라함, 성 바울이 차례로 앉아있으며. 그 위에는 천사들이 둘려 싸인 풍경을 그려 냈다.

그리고 하단에는 그리스도교(가톨릭)의 교세 확립과 포교에 진력한 성 그레그리오, 성 제롬, 베르나르, 아우쿠스티누스 등의 위인과 철학자 그리고, 시인으로 활약한 진리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르네상스시대 인물인 단데, 스승 페루지노, 개혁종교가 시보나롤라 등이 라파엘로 자신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와 마주보고 있는 편에아테네 학당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성체논의와 반대 성향을 지닌 자연에 존재하는 합리적 진리인 철학(哲學), 그리고 그 속에 인간들이 이루어 내려온 역사(歷史)를 지닌 사실과 사상을 말해준다.

르네상스 건축가인 브라만데가 그 당시 로마로 와 성 베드로 대성당(공사)을 위한 설계안을 마치고, (초기)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그림의 배경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안에 근거한 느낌을 주는 장엄하고 고전적인 건물을 배치하고, 그린 그림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군상(群像)의 집단들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배경의 그림은 라파엘로도 로마정착기에 보았겠지만, 로마에 남아있던 고대의 건축물의 미와 기하학의 재발견이라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격자무늬 아치로 틀을 만든 구성의 정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토론하며 앞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이 있고, 양옆으로 많은 군중들이 그려져 있다. 서로 마주보고 토론하며 앞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표현하며, 왼편의 플라톤은 저서인 티마이오스를 들고, 자기의 이데아론에서 나온 이상론을 설파하려는 듯, 왼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자기의 현실론적인 목적론적 자연관과 형이상학을 말하려는 듯, 오른손으로는 아래쪽 방향을 향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이 두 사람 주변으로 일군의 무리가 토론을 듣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왼편의 녹색의 옷을 입은 소크라테스가 또 다른 토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경의 아랫부분의 왼편에서는 피타고라스가 글을 쓰고 있으며, 그 옆에 있는 어린소년이 조화론의 도해를 그린 듯 한 칠판을 그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맞은편인 오른쪽에서는 한 무리의 유클레스가 석판 위로 몸을 기울인 채, 컴퍼스를 들고 기하학의 정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 뒤로는 지구본을 든 프톨레마이오스와 자라투스트라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아래 계단에 누어있는 이는 무소유를 실천한 디오게네스이며 그리고 앞 부분의 중앙에서 조금 왼편으로 치우친 계단 아래 자리에 생각에 잠겨있는 듯 옆으로 비스름히 앉아있는 자세를 취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그림에서 몇 인물들이 라파엘로 자신을 포함한 자신이 살고 있는 르네상스의 시대 실존 (예술가인)인물들의 얼굴 초상을 그려 넣었는데 있다. 중앙의 플라톤의 모습이 당시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상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유클레스는 브라만데 초상이라고 한다. 본래의 스케치에는 없다가, 나중에 그려진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초상화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오른쪽에 많은 군중사이로 우리를 향하여 흩끗 쳐다보는 인물이 있는데, 그것이 라파엘로의 자기의 자화상을 본 뜬 것이다.

 

아테네 학당작품의 그림에 나타나듯이 라파엘로는 색체를 넓게 표현했지만, 급격하게 충돌되는 양상인 색조의 대비는 피했으며, 색조와 색체의 변화는 그림 자체의 구성양상의 다양성 및 흥미를 부여 했다. 색체의 특성상 그림의 구성요소를 명료하게 제시하도록 하고, 조화롭게 이루게 하는데. 이 그림에서 중앙의 인물들은 밝은 색체의 옷을 입고 있고, 양 측면에 녹색 옷에 흰 겉옷을 입은 인물이 자리하는 등 색조와 색체의 변화를 유도하되. 완만하게 처리하도록 한 것은 인물들의 구별하는 동시에 색체의 조화를 이루는 목적 하에서 사용된 것이 틀림없다.

이 작품의 그림 전체의 구성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벽화에 사용했던 벽의 창문 효과라는 관례를 택하였지만, 이 작품의 그림을 환영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원근법을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 그림에서 위에 있는 중앙의 인물인 플라톤과 아리스토델레스의 원래자리보다 크게 한,(원근법에 어긋나게 한 인물그림의) 자리의 조정처리도 이런 계획에서 비롯된다.

그는 격자 문양의 바닥과 계단의 관례를 탐구하여, 그림에 보듯 (넓은)광장과 계단에 인물들을 배치하도록 했다. 그리고 인물들을 전경에 밀집시키기보다, 계단주변에 분산시켜, 시각 상으로 더 많은 인물들 보이도록 하였으며, 또한 인물의 인상과 특성을 명확하게 나타나고자 했다. 이리하여 이 작품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이 차분하고, 균형 잡힌 질서를 느끼게 하는 하나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바티칸 내부의 서명실에 천장벽화를 그리고, 양면의 커다란 뤼네트 속에성체논의,아테네 학당나타났으며, 그 옆(천장부분)에 있는 작은 뤼네트에 철학(도덕)개념이 강한미덕 (Virtues)과 아래 부분에 창문의 틀에 있는 뤼네트에 시/ 문학(또는 음악)개념이 강하게 비쳐지는 것으로 보이고 있는파르나소스 (Parnassus)그렸는데, 이는 당시 인문주의로 신플라톤주의의 근간 사상인 진/ / 미를 나타내려고 하였다, 라파엘로는 이것들을 자신의 온화한 화풍으로 그려냈다.

라파엘로가 서명실에 그린 천장벽화는 천장 중앙에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교황청의 문장이 있고, 주변에 메달리온의 안에는 신학 , 정의, 철학, 시가를 상징하는 것들이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표현하였으며, 그 아래 네모칸 안에는 에덴동산의 유혹, 솔로몬 이야기, 천문학, 아폴로와 마르시아스의 이야기 가 그려져 있다. 초기에 같이 작업을 진행하였던 소도마의 작품으로 판단되는 아폴로와 마르시아스의 이야기를 빼면 나머지 작품은 라파엘로와 그의 아틀리에가 그린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라파엘로가 그린 서명실의 천장 벽화중 에덴동산의 유혹또는 아담과 이브라 불리는 작품은 서명실의 천장벽화 그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한 르네상스적인 의미를 자랑하고 있으며, 라파엘로가 그린 천장벽화의 그림 중에서 가장 화려하다. 이 그림이 성체 논의상부에 놓인 이유는 인류의 원죄(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속죄하기위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비교적 같은 시기에 나타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그림 중 같은 주제인 그림인 아담과 이브- 원죄와 (아덴동산에서) 추방과 비교하면, 미켈란젤로의 인간의 모습 그림이 너무 근육질인데 반하여, 라파엘로의 그림은 비교적 부드러운 느낌을 갖는다,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최대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적어도 1512년경 무렵에 그는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탈리아 예술가의 최고 반열에 오른다, 그는 교황청의 내부 장식그림이나 종교화 작품외에도 교황청 내 사람들의 초상화나 로마에 사는 귀족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도 많이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쉬지 않고 계속하여 작품을 냈으며, 죽을 때까지 밀려드는 주문에 작품을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시기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이 활짝 피어있는 화려한 미를 장식하는 절정기 시대였으며, 그 중심지인 로마는 예술의 중심지이자, 이 새로운 시대를 장식하는 황금의 도시이었다,

 

라파엘로가 이때 그린 그림은 성모 등을 그린 종교화 말고도 프레스코화, 초상화, 등 장르를 따지기 않고, 어려가지 작품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현재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는 이탈리아의 귀족 시지스몬도 디 코미티부스를 위한 그린 것으로 알려지는 라파엘로의 폴리뇨의 성모 마리아 Madonna di Foligno (1512)는 성모는 영광의 존재로 나타나며 소박한 인간상은 천상의 버전으로 충만한 장엄함으로 그려져 완전히 내재된 속성으로 그려지게 되고 하나의 기준으로써 어려가지 다양한 성격을 지니는데, 이는 고상함과 여유로운 우아함을 성질을 뛰어넘어 하나님 혹은 예수그리스도와 소통하고 있는 범접할 수 없는 위치, 아니면 천상의 여왕적인 위치로 격상된다.

 

또한 이 무렵에 그린시스티나 성모 1513-14년경는 그야말로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의 그림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이 작품그림을 보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습이 여성의 완벽한 비율로 고전적인 미의 자태를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의 그림을 어떻게 보면 성모자와 성인들 모인 성스러운 대화의 제단화 형식 틀을 깨서, 구름위에 장식하여 화면 밖으로 정면으로 바라보는 점이 이 작품 내부에서 오는 특별하고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성모의 양옆으로 성인인 성 바르바라와 성 식스투스가 있는데 이 작품 그림에서 좌측에 있는 성 바르바라는 화면 하단의 아기 천사를 보는 시선을 하고 있다. 또한 우측에 당대 교황인 율리우스2세를 모델로 하여 그려진 성 식스투스는 공손한 자세로 마리아에게 경의를 표하며, 성모를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성모자가 바라볼 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림하단에 상단에 있는 성모를 바라보며 서로 응석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으로 그린 두 명의 아기 천사의 천연스러운 모습에 이 작품의 그림을 관람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현재 이 작품은 독일 드레스덴 지역의 츠빙거 궁전 안에 있는 고전 거장 회화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나, 원래는 이탈리아의 북부 피아첸차에 있는 산 시스토 성당안에 있는 제단화이었다.

이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독일의 학자 후베르트 그리메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자신의 영결식에 사용할 목적으로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의뢰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례식에 사용되었던 그림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시스티나의 성모>는 후에 지방의 산 시스토 성당으로 보내졌다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그림에서 나온 ()식스투스 2세는 율리우스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가문의 수호성인으로 정한 교황으로, 율리우스 2세는 추기경 때부터 이 성당을 후원했다. 1512년 교황이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 맞서 군대를 일으켰을 때, 피아첸차가 지원해 준 이후로 이 도시에 대한 그의 호의는 더욱 깊어졌다. 아마도 이 도시와 당시 로마 교황청의 관계가 나중에 이제단화가 산 시스토 성당으로 보내져, 제단화의 다른 이름인 산시스토의 성모라고도 부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 후. 이 제단화는 몇 차례 주인이 바꿨는데. 1754년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1696~1763)가 이 작품을 이탈리아 매매상으로 부터 그림을 구입하였고, 이 때부터 이 작품이 독일지역으로 옮겨졌다.

라파엘로가 로마 채류시기에 남긴 초상화는 교황 레오10세와 추기경들(1518-19년경)을 비롯하여 아라곤의 잔르 초상(肖像) (1518), 발터자르 카스틸리오네의 초상(初喪) (1515-16), 배일을 쓴 여인 (1516년경), 젊은 여인의 초상(肖像)(1518-19), 외뿔송아지를 안은 여인 (연대추정불가)등이 있다. 그는 남/, 또한 계급을 가르지 않고. 모두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는 라파엘로가 가장 성숙한 예술로 나아갈 30대 초반대로 라파엘로의 후기 시대인 그림이다,

 

작품교황 레오10세와 추기경들(1518-19년경)의 그림에서 보듯 앉아 있는 인물이 교황 레오 10세이다, 피렌체 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본명은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이었다.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추기경 중 왼편에서 서 관람자를 응시하는 인물이 루이지 데 로시이었고. 반대편에 서있는 다른 인물은 줄리오 데 메디치이었다, 이 작품이 제작될 시기 무렵 1517년에 추기경에 임명된 로시는 레오 10세의 형이었던 피에로의 외손자이었으며, 교황의 비서로 활동하였던 인물이고, 작품의 오른편의 인물, 줄리오 추기경은 장차 교황으로 등극하여 클레멘스 7세로 활동하게 되는 인물이다.

사실 피렌체의 상인출신이었던 메디치에서 교황을 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반니 데 메디치의 어머니가 로마 명문가 출신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것은 바로 정치적인 입지에서 로렌초가 피렌체에서 반대를 무시하고. 로마에서 세도(世途)가 가장 높은 오르시니 가문의 딸과 결혼을 하게 만든 이유 또한 여기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이는 장차 국제 정치적요소를 빠르게 인식한 로렌초의 판단력 덕에, 후대(後代)가 교황이라는 자리까지 메디치가문이 올라갔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채, 르네상스를 후원하는 메디치가문의 교황으로 역할을 잘 이끌고, 또한 교황의 성직을 잘 수행하려는 종교적 열망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는 교황의 왼손이 위치한 작은 글문으로 된 성경의 구절에 있다. 작품에서 나온 성경의 이 구절의 대목은 누가복음이 끝나고, 요한복음이 시작되는 부분으로 4대복음서의 마지막인 요한복음이 시작되는 위치로 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복음서를 종결하는 책으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말한다. 라파엘로는 이런 성격을 갖는 성경의 오브제를 사용하여, 메디치교황의 종교적인 위치에서 표현된 시대의 변화상의 중요성을 부각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르네상스기 교황으로써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예술작품을 후원하는 등 예술의 중흥에 온 힘을 쏟아 부은 교황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종교적 열망이 지나쳐, 국제/사회적인 커다란 잘못된 인식과 판단도 있었다. 교황 레오10세는 밑에 성직자들을 시켜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의 자금 확보를 위해, 유럽 전역에 면죄부를 팔았고, 그 결과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원인 제공한 인물로 기독교의 신/ 구 분열을 만들고, 30년 전쟁을 비롯한 유럽이 약 2세기 동안 종교 전쟁에 휘말리게 될 불씨를 제공한 인물로 낙제교황으로 평가 받는다.

이 작품은 후대에 클레멘스 7세 결정으로 로마에서 피렌체로 옮겨,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또한 라파엘로는배일을 쓴 여인 (1516년경)를 비롯하여, 젊은 여인의 초상(肖像)(1518-19), 외뿔송아지를 안은 여인 (연대추정불가)작품이 그린 것이 이 무렵이다, 이 시기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표현된 것과 같은 분위기나 작품의 그림 속에 내제된 여인의 모습자체가 비슷한 여인의 초상화 및 (윗글에 작품의 설명문에도 나오는) 성모상이 나오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배일을 쓴 여인 (1516년경)을 보면 아름다운 진주장식으로 한층 멋을 낸 검은색 머리의 한 여인이 백색의 베일을 머리로부터 내려쓰고 있다. 확실하지 않지만 베일을 쓴 여인작품은 얼굴 생김새나 자세가 젊은 여인의 초상(肖像)(1518-19), , 라 포르나리나(제빵사의 딸)’ 작품과 비슷해 일부에서는 라파엘로의 연인인 마르게리타 루티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젊은 여인의 초상(肖像)(1518-19)라 포르나리나작품과는 달리 단정한 모습과 절제된 표정을 짓고 있어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설이 진위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 여인 상이 라파엘로에 가슴 속에 내재된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냈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동일한 시대작품인 시스티나의 성모, (작은) 의자의 성모등 그의 후기 작품에 나타난 성모의 모습이 이 여인과 가깝다는 사실도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정리된 조용한 아름다움을 나타나고 있는 얼굴과 복잡한 옷 주름의 사실적인 의상표현, 콘트라스트 색의 대조는 이 작품 여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킨다.

 

젊은 여인의 초상(肖像) 또는 라 포르나리나(1518-19) 이 그림에서 라파엘로의 연인이었던 라 포르나리나(마르가리다 루티)의 모습으로 누드로 상반신은 물론, 허리까지 드러나고 있는 아주 파격적인 작품이다. 만년의 그의 특질과 점차적으로 당시 미술계에 선보이고 있던 매너리즘의 기질 역시 조금씩 보인다. 그녀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듯 그녀에 팔에 그린 팔찌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 >라는 명문이 새겨있다. 이 초상화가 원래는 젊은 여인으로만 불려오다가 18세기 중반에야 라 포르나리나 제목으로 불렸다

이 작품은 16C말경 로마의 산타파오라 백작 집안(부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1618년에 부콘바니가()에 보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642년에는 바르베리나가()로 옮겨진다, 그 이후에도 몇 번 걸쳐서, 주인이 바뀐 것 같다. 현재 로마에 있는 보르게제 회랑(미술관)에 들어온 것은 근년에 일이다.

 

라파엘로의 생애에 있어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변화산상에의 그리스도(1520)은 사실 15204월에 그가 열병으로 급사해 라파엘로의 미완성작으로 완성부분인 상단그림과 하단의 밑그림만 남긴 채 있던 그림을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하단의 그의 밑그림을 보고, 또한 그의 표현력을 모방하여 완성시켰다.

이 제단화는 두 장면을 상/ 하로 나누어 표현되었다. (주제 내용은 신약성경 마태오 172-6절과 14-18절에 있다.) 라파엘로가 그린 상단에는 그리스도의 변모 장면 이 그려져 있고, 제자인 줄리오 로마노가 완성시킨 하단에는 마귀 들린 소년이 치료 받기위해 사도들의 앞에 나오지만 소년을 치료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각자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그림은 두 장면을 교묘하게 S자형의 동적구도(動的構圖)로 결합되어 성공적으로 감정을 고양시킨다. 소년에 대한 사람들의 흥분과 그 놀라움은 그 산상(山上)에서 떨어지는 기적을 본 장면의 충격과 결합되어 이룬 강한 동태의 전류가 형성된다. 빛에 의하여 더 부각되어진 그리스도의 상승력은 여전히 강한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의외로 거룩하고 조용하다. 하단의 떠들썩함에 대한 상단의 엄숙함이 이 그림이 주제 표현의 의미이기도 하다.

 

명암이 강조된 동적인 구조에 있어서, 바로크 양식에 가깝다는 평을 들기도 한 그날이 만37세인 라파엘로의 마지막작품은 그가 완성한 르네상스 고전양식을 스스로 해체하고 승천하고 말았던 안타까움이 더 해진다.

 

그가 죽자, 교황 레오10세와 교황청은 크게 안타까워하며, 그의 무덤을 위대한 자만이 묻을 수 있는 고대 로마의 신전인 판데온 내부에다 만들게 했다. 라파엘로의 묘비는 학자였던 벰보 추기경이 지었다.

 

여기는/ 생전의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